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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像] 싸우면서 協商한 ‘황제국’ 高麗, 實利 外交 끝판王|新東亞

[映像] 싸우면서 協商한 ‘황제국’ 高麗, 實利 外交 끝판王

이익주 敎授와 함께한 歷史의 再發見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

    入力 2024-03-1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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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次 高麗·거란 戰爭과 不屈의 英雄 楊規

    • 거란을 說得하고 人質이 된 外交官

    • 戰鬪에 지지 않고 協商으로 平和를 얻다

    • 500年 동안 功臣을 잊지 않은 나라

    • 황제국의 多元的 天下觀과 實利 外交

    • 單一民族과 朝鮮 建國이라는 高麗의 遺産



    “考慮에 對한 關心이 높아진 것을 皮膚로 느끼고 있습니다.” 高麗 歷史와 前近代 東아시아 國際關係詞를 主로 硏究해 온 이익주 서울시립대 國史學科 敎授는 KBS2 드라마 ‘高麗 거란 戰爭’李 每回 10% 안팎의 높은 視聽率을 記錄하며 話題를 뿌리는 것에 반가움을 표했다. 덩달아 ‘韓國 歷史,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를 내걸고 2022年 始作한 ‘이익주는 歷史’(유튜브)에서 드디어 高麗時代 콘텐츠의 照會數가 朝鮮時代를 앞지르기 始作했다. ‘高麗의 英雄 顯宗’ 47萬 回, ‘거란족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수 있다고?’ 43萬 回 外에 강감찬·양규·河拱辰·智蔡文·김은부 等 人物 시리즈도 드라마의 展開에 따라 照會數가 急騰하고 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고려·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 후기 정치체제’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 연구 대상은 고려시대 국제관계사와 고려 후기 정치사다. ‘한국 역사,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를 내걸고 ‘이익주는 역사’(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이익주 서울시립대 國史學科 敎授. ‘高麗·元 關係의 構造와 高麗 後期 政治體制’로 서울대 國史學科에서 博士學位를 받았고 株 硏究 對象은 高麗時代 國際關係詞와 高麗 後期 政治史다. ‘韓國 歷史,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를 내걸고 ‘이익주는 歷史’(유튜브) 채널을 運營하고 있다. [조영철 記者]

    “大部分의 사람들이 陽竅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텐데 드라마를 통해 不利한 戰況에도 도망가거나 降伏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不屈의 象徵이 됐잖아요. 반갑죠. 硏究 對象이 될 만큼 充分한 資料가 남아 있지 않은 人物들을 알릴 方法이 없는데 드라마니까 可能했어요.”

    高麗는 918年에 建國海 1392年까지 無慮 474年間 存續했지만 學問的으로는 空白이 많은 나라다. 一旦 硏究할 수 있는 史料가 不足하다. 1010年 거란의 2次 侵入으로 開京이 불탈 때 初期(太祖~穆宗) 實錄이 消失됐고, 현종이 이를 復元한 뒤 30代 ‘충정왕實錄’까지 編纂됐으나 몽골·紅巾賊의 侵入을 받을 때마다 이리저리 옮겨지다 1592年 壬辰倭亂 때 完全히 消失됐다. 그나마 情事로는 朝鮮 前期 世宗의 命으로 編纂된 ‘高麗史’가 남아 있다. 歷史의 主舞臺가 北韓에 있다는 것도 高麗史 硏究가 不振한 理由 中 하나다. 1次 史料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遺跡이나 遺物은 大部分 高麗의 首都였던 個性에 있으니 直接 가볼 수 없는 硏究者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歷史學이란 假說을 세우고 이를 證明하는 것인데, 史料가 不足하면 證明할 方法이 없으니 論文을 쓸 수가 없어요. 高麗時代 硏究者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壁이죠. 硏究가 不振할 수밖에 없는 理由는 너무나 많고, 잘할 수 있는 理由는 없는 게 바로 高麗時代 硏究죠.”



    李 敎授가 서울대 國史學科에서 工夫하던 1980年代는 韓國 古代史와 朝鮮時代 硏究가 主流였다. 이는 近代 歷史學의 始作이 日本人에 依한 ‘植民史學’이었다는 데서 비롯한다. 植民 私學의 1次 目標는 植民 支配의 正當性을 어떻게 歷史的으로 證明하느냐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古代史와 朝鮮時代 硏究에 集中했다. 反面 光復 以後 韓國의 民族主義 歷史學은 이를 反駁하기 위한 硏究에 매달리다 보니 亦是 古代史와 朝鮮時代에 集中하게 됐다. 考慮가 우리의 視野에서 漸漸 더 멀어진 세 番째 理由다.

    “조선도 500年 高麗도 500年인데 每年 發表되는 論文 편수만 比較해도 좀 不當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高麗時代를 專攻하면서 朝鮮時代처럼 하나의 主題로 깊이 들어가는 硏究를 하기는 어렵지만 큰 主題로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는 硏究를 할 수 있다는 點이 魅力的이었습니다.”

    드라마 ‘高麗 거란 戰爭’은 거란의 2次 侵入을 막아내는 過程에서 活躍한 英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1000年 前 高麗로 우리를 招待한다. 이제 이익주 敎授의 解說을 들으며 우리가 몰랐던 ‘황제국 考慮’의 世界로 들어가보자.

    거란은 993年(高麗 成宗 12)부터 1019年(高麗 顯宗 10)까지 26年 동안 세 次例 高麗를 侵略했고, 高麗는 세 次例 모두 막아내는 데 成功했다. 1次(993~994) 때에는 徐熙가 거란의 蕭遜寧과 外交 談判을 벌여 江東 6週(흥화·용주·統主·撤酒·鬼誅·곽주: 鴨綠江 以南과 淸川江 以北 사이 地域으로 現在 平安北道에 該當)를 獲得했다. 2次(1010~1011) 때에는 强調의 政變으로 穆宗이 廢位되고 현종이 옹립된 것을 名分 삼아 쳐들어왔으나 顯宗의 親朝(거란에 直接 가서 皇帝를 만남)를 約束받고 撤收하다 陽竅와 김숙흥의 決死隊로부터 큰 被害를 보고 敗退했다. 3次(1018~1019) 때에는 上元帥 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鬼誅에서 거란軍을 물리치면서 26年에 걸친 高麗·거란 戰爭이 幕을 내린다.

    世間에서는 鬼誅大捷을 乙支文德의 薩水大捷, 李舜臣의 한산大捷과 함께 우리 歷史에서 3代 大捷으로 꼽지만, 相對的으로 양규 等이 活躍한 2次 戰爭은 注目받지 못했다. 드라마 ‘高麗 거란 戰爭’李 뜨기 前까지 陽竅의 이름도, 김숙흥의 存在도 記憶하는 이가 없었다. 楊規 役을 맡은 俳優조차 이 作品을 통해 처음 그 이름을 接했다고 한다. 이익주 敎授는 “實際로 1010年 11月부터 1011年 1月까지 두 달 남짓한 戰鬪 記錄만 남아 있어서 陽竅의 本館조차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過程을 거쳐서 그 자리에 올랐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았다

    “壬寅日 陽竅와 김숙흥이 거란軍과 싸우다 죽었다(壬寅 楊規·金叔興與契丹戰死).”

    1011年(玄宗 2) 1月 28日(以下 陰曆) 두 사람의 죽음을 傳하는 ‘高麗史 世가’는 單 12者다. 多幸히 ‘高麗史 列傳’과 ‘高麗史節要’에 斷片的인 記錄이 남아 있다. 서북면都巡檢使 陽竅의 專攻과 이에 對한 功勞로 追贈(追贈·事後 品階를 높여주는 일)하고 代代로 後孫에게도 官職을 내렸다는 內容 等이다.

    “얼마 뒤에 거란의 大軍이 갑자기 進軍해 오자 陽竅와 김숙흥이 終日 힘써 싸웠지만 兵士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陣中에서 戰死했다. (中略) 陽竅는 孤立된 軍士들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番 싸워 죽인 敵軍이 매우 많았고, 捕虜가 되었던 3萬餘 具(口)를 되찾았으며, 鹵獲한 駱駝·말·兵仗器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려사 列傳)

    2次 戰爭 當時 두 사람의 專攻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事後 35年이 지난 1046年 文宗이 陽竅와 김숙흥의 肖像을 功臣角(功臣閣)에 걸어 後代 사람들에게 勸奬케 하라는 제서(制書·임금의 命令書)를 내린 것으로도 斟酌할 수 있다. 이 文宗의 制書에 威貌(蝟毛·고슴도치 털)라는 表現이 登場한다.
    “거란이 侵略했을 때 서북면都巡檢使 楊規, 部指揮 김숙흥 等은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番 연달아 敵을 擊破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戰爭 中에 戰死했다.”(고려사 列傳)

    이 짧은 記錄을 根據로 드라마 ‘高麗 거란 戰爭’은 활을 들고 거란 皇帝(成宗)를 向해 한 걸음 한 걸음 前進하다 선 채로 온몸에 화살이 박혀 죽은 陽竅와 김숙흥의 壯烈한 最後를 演出했다(16회). 歷代級 名場面이라는 讚辭를 받으며 ‘高麗版 李舜臣’ 陽竅를 再照明하는 契機가 됐다. 그러나 利益主 敎授는 드라마가 아닌 歷史에서 우리가 注目해야 할 人物은 河拱辰이라고 말한다.

    거란과 치른 일곱 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양규와 김숙흥. [KBS2TV ‘고려 거란 전쟁’ 화면 캡처]

    거란과 치른 일곱 番 戰鬪에서 赫赫한 功을 세우고 壯烈한 最後를 맞은 陽竅와 김숙흥. [KBS2TV ‘高麗 거란 戰爭’ 畵面 캡처]

    名分 찾고 화친 提案한 河拱辰

    河拱辰은 누구인가. 1011年(玄宗 2) 12月 ‘이달에 거란이 河拱辰을 죽였다(是月, 契丹殺河拱辰)’(高麗史 世가). 陽竅와 마찬가지로 河拱辰度 ‘享年’을 남기지 않아 出生年度를 가늠할 수 없다. 河拱辰은 흔히 高麗의 武臣으로 紹介되지만 穆宗 때 文身 官職인 上書左司郎中이 돼 武班에서 文班으로 ‘個班(改班)’을 했다.

    거란의 2次 侵略 時 河拱辰은 流配된 狀態였다. 當時 거란과 冊封 關係에 있던 高麗는 거란에 侵略의 名分을 주지 않기 爲해 穆宗 弑害 事實을 숨기고 時間 끌기에 들어갔지만 餘震이 재빨리 高麗의 內部 狀況을 거란에 알리면서 水泡로 돌아갔다. 거란 成宗은 “强調가 賃金을 弑害한 것은 大逆罪이니 軍士를 내어 罪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며 40萬 大軍을 이끌고 高麗를 侵略했다.

    거란 成宗은 最前方 흥화진(平安北道 義州)을 包圍하고 降伏을 要求했으나 양규 等이 끝끝내 버티자 흥화진 攻掠을 抛棄하고 兵力을 둘로 나눠 折半을 무로대(義州 南쪽)에 駐屯시키고, 나머지 折半을 이끌고 行營都統使(最高 司令官) 强調가 30萬 大軍을 이끌고 駐屯한 統主(平安北道 宣川)로 갔다. 통주성 앞 三수채에서 벌어진 戰鬪에서 高麗軍은 大敗하고 强調마저 敵에게 사로잡혀 죽는다.

    統主 戰鬪에서 勝利하고 곽주를 陷落시킨 거란軍은 이어 西京을 攻擊하지만 智蔡文 等의 抵抗에 부딪히자 顯宗을 잡기 위해 곧장 開京으로 向했다. 이 消息을 듣고 羅州로 避難을 떠나기 直前 玄宗은 指揮官 한 名도 아쉬운 터라 河拱辰과 有終의 復職을 命했다. 流配地에서 돌아온 河拱辰은 窓化現(京畿道 洋酒) 附近에서 顯宗을 謁見하고 이렇게 아뢴다.

    몽진하는 현종에게 “거란군영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고 제안하는 하공진(왼쪽). 거란의 2차 침략으로 개경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현종과 신하들. [KBS2TV ‘고려 거란 전쟁’ 화면 캡처]

    蒙塵하는 玄宗에게 “거란軍營에 使臣을 보내 和親을 請하자”고 提案하는 河拱辰(왼쪽). 거란의 2次 侵略으로 開京을 抛棄하고 南쪽으로 避難을 가는 玄宗과 臣下들. [KBS2TV ‘高麗 거란 戰爭’ 畵面 캡처]

    “거란은 本來 强調를 處罰하는 것을 名分으로 삼았는데 이미 强調를 逮捕했으니 이제 더 싸울 名分이 없습니다. 只今 使臣을 보내 和親을 請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軍隊를 撤收할 것입니다.”

    이익주 敎授는 이 대목이 “河拱辰의 外交的 判斷이었다”고 解釋한다. 玄宗은 和親의 機會라는 提案을 받아들여 河拱辰 便에 거란 皇帝에게 表文(外交文書)을 보낸다. 다음 날 河拱辰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먼저 部下들을 시켜 거란 軍營에 가서 이렇게 傳하게 한다.

    “國王께서 直接 와서 뵙기를 願하셨으나 軍事의 威勢를 두려워하셨고, 또 國內의 여러 어려운 事情 때문에 江南으로 避難 가셨으므로 背信(陪臣) 河拱辰 等을 보내 事由를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河拱辰度 亦是 두려워서 敢히 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速히 軍士를 거두어주소서.”

    여기서 ‘背信’이란 高麗 國王의 臣下가 國王을 冊封한 皇帝에 對해 自身을 가리키는 말이다. 卑屈하리만치 自身을 낮추는 代身 현종이 避難할 時間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豫想보다 거란의 先鋒軍이 빨랐다. 河拱辰의 部下들이 거란 軍營에 到着하기도 前에 先鋒軍이 窓化現에 到着했다. 京畿道 光州에 머물고 있던 玄宗의 코앞(藥 4㎞)까지 追擊한 셈이었다. 多急해진 河拱辰이 直接 거란 軍營을 찾아갔다. 거란 側이 “너희 國王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河拱辰은 “江南으로 가고 계신데 계신 곳은 알지 못합니다”라며 잡아뗀다. 다시 거란 側이 “江南이 먼가, 가까운가”라고 묻자, 河拱辰은 “너무 멀어서 몇萬 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 말을 듣고 顯宗을 追擊하던 거란軍이 돌아갔다고 ‘高麗史 列傳’은 傳한다.

    “河拱辰은 窓化現에서 거란의 先鋒軍을 만나 이들을 따라 本震까지 간 것으로 推定됩니다. 여기서 거란 成宗을 만났을 可能性이 크죠. 그리고 顯宗의 親朝를 約束하며 거란 皇帝를 說得해 거란軍의 南下를 막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北으로 撤收시키는 데 成功합니다. 代身 自身이 人質로 끌려가 結局 거란 땅에서 죽습니다. 外交官이란 自己 나라의 利益을 위해 外國에 派遣되어 거짓말을 하는 가장 正直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 어쨌든 河拱辰은 相對가 받아들일 수 있는 條件을 提示해서 說得하고 그것을 貫徹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强大國을 相對하는 弱小國 外交의 姿勢죠.”

    侵略에 맞서는 高麗의 姿勢

    李 敎授는 거란과 벌인 세 次例 戰爭에서 重要한 役割을 한 사람을 꼽으면 1次戰은 서희, 2次戰은 河拱辰, 3次戰은 강감찬이라고 말한다.

    “劇的인 戰鬪 場面은 高麗가 侵略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우리가 이겼다는 것을 浮刻하지만 그보다 더 重要한 것은 窮極的으로 侵略에 맞서는 高麗의 姿勢가 무엇이냐에 있어요. 河拱辰의 役割에 注目하는 理由는 戰爭과 外交를 同時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考慮다운 對應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考慮다운 對應이란 무엇일까.

    “한便에서는 싸우고 한便에서는 協商하는 거죠. 考慮엔 戰爭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亡하지 않게 하는 게 重要했어요. 戰鬪는 高麗 領土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被害는 고스란히 高麗人에게 돌아갑니다. 農耕地가 荒廢해지고, 人命이 殺傷되고, 이런 被害가 全部 高麗 사람들 몫이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戰鬪를 中斷시켜야죠. 이것은 協商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어요. 一旦 戰鬪에서 얼마나 優位를 占하느냐에 따라 協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戰鬪에서 지지 않고 協商으로 平和를 얻는다. 이게 高麗의 傳統的인 方法이고 이것을 2次 戰爭에서 가장 잘 한 사람이 河拱辰입니다.”

    한便 “(현종이 있는) 江南은 너무 멀어서 몇萬 里인지 알 수 없다”는 河拱辰의 거짓말만 믿고 追擊을 거둘 만큼 거란이 어수룩했을까. 李 敎授의 解釋은 다르다.

    “서로 手를 다 보면서 對話한 것이죠. 牌를 다 펼쳐놓고 치는 고스톱에 比喩할 수 있어요. 高麗와 거란은 그런 고스톱을 친 겁니다.”

    戰爭 이기고 師大를 請하는 外交의 白眉

    李 敎授는 드라마가 ‘戰爭’에 焦點을 맞추고 있지만 ‘外交’를 볼 것을 注文했다. 2次 戰爭 때 約束한 顯宗의 親朝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를 빌미로 거란은 3次 侵略을 했지만 鬼誅에서 大敗했다.

    “姜邯贊의 鬼誅大捷이 있은 지 1年 뒤인 1020年 2月 高麗는 거란에 使臣을 보내 ‘事大關係를 復元瑕疵’고 要請합니다. 戰爭에서 이긴 考慮가 거란을 上國으로 認定하겠다는 提案을 먼저 한 거죠. 이것이 高麗 外交의 白眉라고 생각합니다. 考慮다운 거죠. 이렇게 하지 않으면 繼續 싸워야 하잖아요. 거란도 戰爭을 더 하는 건 實益이 없다고 判斷해 高麗의 要請을 받아들이고 冊封―朝貢 關係를 維持합니다. 거란-송-고려의 勢力 均衡 속에 約 100年間 平和가 이어지면서 考慮는 安定期에 접어들었고, 對外關係의 安定을 바탕으로 以後 300年을 버틸 수 있는 基盤을 마련합니다. 考慮는 싸움을 잘한 나라가 아니라 싸운 걸 가지고 外交를 잘하는 나라였어요. 이것이 只今 우리에게도 必要한 게 아닐까요.”

    거란에 人質로 끌려간 河拱辰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죽는다.

    “‘高麗史 列傳’에 따르면 거란 成宗이 河拱辰을 죽인 뒤 心臟과 肝을 꺼내 먹었다고 해요. 皇帝의 背信感과 憤怒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러나 ‘寮舍(遼史)’에는 河拱辰이라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한便 河拱辰이 죽었다는 消息이 傳해지자 考慮에선 그의 아들 하칙충에게 祿俸과 自給(資給)을 올려줍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河拱辰이 죽은 지 287年이 지난 1298年 忠宣王은 거란軍의 退却을 이끈 서희, 河拱辰, 노전, 양규 等의 內外孫의 玄孫 中 한 사람에게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許諾한다는 敎書를 내립니다. 여기서 ‘內外孫의 玄孫’이란 河拱辰을 할아버지라 부르는 사람(孫子)을 高祖할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無慮 7代에 걸쳐 챙겼다는 것이죠. 이처럼 高麗는 300年이 되도록 두고두고 功臣을 記憶하고 後孫들에게 끊임없이 補償합니다. 高麗가 500年을 維持한 데에는 絶對 功臣을 잊지 않았다는 點도 記憶할 部分입니다.”

    “解凍天子(海東天子)이신 只今 皇帝에 이르러 部處와 하늘이 屠牛시니 敎化가 널리 퍼져 世上이 다스려지도다. 恩惠가 깊이 遠近과 古今에 드물어라.”(고려사 樂誌)

    高麗 皇帝의 聖德을 稱頌하는 風入松(風入松)이라는 歌謠로 여기에 ‘천자’라는 呼稱이 登場한다. 考慮는 皇帝의 나라였다. 賃金은 天子, 皇帝라는 位號를 使用했고, 皇帝에 對한 尊稱은 廢하였다. 다음 後繼者는 太子라 불렀고 尊稱은 傳하였다. 皇帝의 命令은 調書(詔書) 또는 勅書(勅書)라 했고, 天子로서 하늘에 祭祀를 지내는 원구(圓丘)를 施行했다. 反面 朝鮮은 諸侯國의 나라였다. 임금을 傳하라 불렀고, 太子 代身 世子, 調書는 敎書(敎書)로 格下됐다. 또한 天子가 아니기에 하늘에 祭祀를 지낼 수 없었다.

    高麗는 建國 初부터 황제국을 標榜했지만, 거란과의 戰爭을 勝利로 이끌면서 황제국 意識이 더 높아졌다.

    “玄宗 臺에 거란과의 오랜 戰爭을 姜邯贊이 이끄는 高麗가 東아시아 情勢에 큰 影響을 줄 만큼 大勝利로 끝냄으로써, 高麗의 東아시아에서의 外交的 位置는 크게 上昇하게 된다. 그리고 高麗의 祭天儀禮人 八關會는 高麗가 影響力을 갖는 獨自的 ‘天下’ 內의 餘震, 渤海 流民 等의 勢力들은 勿論 宋, 거란, 日本의 商人 等도 參與하는 東아시아의 國際的 行事로 活氣를 띠게 되었다.”(노명호의 ‘高麗前期 天下觀과 황제국體制’)

    황제국 高麗와 單一民族이라는 遺産

    現在는 史劇에서도 高麗 임금을 ‘陛下’라 呼稱할 程度로 常識이 됐지만 1999年 노명호 서울대 名譽敎授의 ‘解凍天子와 多元的 天下觀’에 對한 硏究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황제국 考慮’는 낯설었다. 朝鮮 初 歷史 編纂者들이 高麗의 皇帝 制度를 僭濫하다고 여겨 天下를 削除하고 皇帝, 天子를 王으로 바꾸는 等 개서(改書)했기 때문이다.

    “高麗 皇帝라면 中國 皇帝와 關係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問題가 생깁니다. 高麗 사람들은 거기도 하나의 天下가 있고, 여기도 하나의 天下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多元的 天下觀입니다. 反面 朝鮮 사람들은 하나의 天下가 있고 그 中心에 ‘名’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一元的 天下觀이죠. 勿論 같은 皇帝라고 해서 完全히 對等한 關係로 본 것은 아닙니다. 雨傘을 폈을 때 꼭지 같은 나라가 中國이고 高麗는 周邊의 작은 나라라고 보았죠. 그런 現實 認識에서 나온 것이 ‘冊封’과 ‘朝貢’입니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로부터 冊封이라는 國際的 公認을 받고 朝貢이라는 經濟的 補償을 합니다. 이때는 高麗 皇帝가 아닌 高麗 國王으로 冊封을 받았습니다. 나라 바깥에서는 王이 되고 나라 안에서는 皇帝가 된다고 해서 이를 외왕내제(外王內帝)라고 합니다.”

    이익주 敎授는 高麗時代를 理解하는 두 가지 틀로 ‘외왕내제’와 ‘本管制’를 꼽았다. 오늘날 우리가 使用하는 本館과 星氏도 高麗에서 始作됐다.

    “河拱辰은 晉州 사람이라고 했을 때 晉州가 本館입니다. 아마 河拱辰의 祖父나 曾祖父가 太祖 王建을 도운 功勞로 河氏 姓을 下賜받았을 것입니다. 高麗는 基本的으로 地方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地方 사람들이 힘을 합쳐 王建을 王으로 推戴했다고 볼 수 있죠. 王建이 高敞郡(安東)에서 甄萱과 싸울 때 直接的으로 도움을 준 豪族 세 사람에게 姓氏를 하사하는데 이들이 安東 金氏, 安東 權氏, 安東 張氏의 始祖가 됩니다. 王이 된 뒤 王建은 ‘本管制’를 통해 各 地方 勢力의 位置를 잡아줍니다. 王이 있는 開京이 있고 그다음 ‘三經(南京·書經·東京)’이라 해서 格이 높은 地方이 있고, 그다음 都護府와 목, 그다음 週·部·郡·縣이 있고, 주현 다음 屬縣이 있고, 香·蘇·부곡·辰·驛·裝·處 이런 式으로 사는 地域에 따라 序列을 매기고, 사람들에게는 姓氏를 附與함으로써 鐘으로는 身分制, 橫으로는 本官制의 位階가 만들어진 것이죠. 高麗에서는 本官이 어딘지만 알아도 그 사람에 對해 많은 것을 把握할 수 있었어요.”

    李 敎授는 高麗의 本館제가 骨品制로 대표되는 新羅 支配層의 촘촘한 差別을 없애는 데 寄與했다고 說明한다. 骨品制가 慶州에 사는 支配層만을 위한 閉鎖的 身分制였다면, 高麗에서는 一般人도 本館과 姓氏를 갖기 始作했다는 것이야말로 新羅 1000年의 支配 秩序를 흔드는 엄청난 改革이었다. 1000年 全 存在했던 이 나라는 只今 우리에게 어떤 意味일까.

    “新羅의 三國統一, 高麗의 後三國 統一로 政治的인 統一이 됐지만 如前히 백제의 後孫, 高句麗의 後孫이라는 認識이 남아 있었습니다. 漸次 그런 意識이 묽어지다가 마침내 ‘우리는 하나’라는 意識을 갖게 된 것은 高麗 後期의 일입니다. 몽골과의 오랜 戰爭이 끝나고 編纂된 ‘三國遺事’(1281)와 ‘帝王韻紀’(1287)에 나란히 檀君이 登場하죠. 高句麗·백제·新羅는 各自의 時調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建國說話를 갖고 있었고, 檀君과 連結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高麗에서 三國 앞에 檀君이라는 存在를 놓자 하나의 民族이라는 歷史의 틀이 만들어진 것이죠. ‘우리 歷史의 始作은 檀君이 만든 朝鮮’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高麗 後期엔 常識이 됐습니다. 高麗王朝만 亡했을 뿐 나라가 分裂되지 않았고 새 國號로 朝鮮을 當然하게 받아들인 것도 이 때문이죠. 이것이야말로 考慮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遺産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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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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