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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는 1993年 新經營 宣言 直後 託兒所 지었다 [+映像]|新東亞

이건희는 1993年 新經營 宣言 直後 託兒所 지었다 [+映像]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3-12-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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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企業이 어린이집까지 하나

    • 託兒所 지으면 無住宅者가 집 갖는다

    •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도 어렵다

    • 奬學金 주면서 條件 달지 마라

    [+映像] 半導體 戰爭 中인 只今은 '李健熙' 다시 읽을 때



    [Gettyimage, 삼성]

    [Gettyimage, 三星]

    1993年 下半期 新經營 推進에 本格的으로 나선 李健熙 會長은 밤낮없이 祕書室長에게 電話를 걸어 생각을 쏟아냈다. 過去의 組織과 시스템을 모두 바꾸라는 메시지 그대로 祕書室도 改編이 大大的으로 이뤄졌다.

    삼성전자 水原工場에 있다가 다시 祕書室로 불려간 한용외 理事長은 新經營 宣言 直後 祕書室 全面 改編 措置에 따라 1993年 11月 三星SDS 管理本部長(상무)으로 자리를 옮긴다. 하지만 한 달도 못 돼 갑작스러운 人士 通報를 받는다.

    “李鶴洙 祕書室 次長이 電話를 하셔서 ‘韓 常務, 文化財團으로 가야겠다’ 하는 거예요.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데다 財團 일이라는 것이 메인 部署라기보다 支援 業務 性格이 江하잖아요. 荒唐했죠. 이런 제 마음을 아셨는지 李次長이 ‘會長님이 專務 승진시켜 보내라 하신다’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는 데 시키는 대로 해야죠.

    나중에 저를 왜 財團으로 보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짚이는 대목이 있긴 했습니다. 1992年에 三星美術文化財團을 感謝해 會長님께 報告를 드린 적이 있어요. 會長께서 ‘文化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內部를) 잘 봤노?’ 하시는 거예요.



    財團에 對해 여러 憂慮되는 部分, 問題點들을 짚었는데 會長님 생각과 비슷하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그때 저를 念頭에 두셨는지 나중에 祕書室 人力을 다 바꾸는 過程에서 ‘한용외 어디 갔노’ 찾으시더니 常務 2年次밖에 안 된 저를 專務로 승진시켜 財團 運營을 맡기신 거죠.”

    가난을 救濟한다

    한 理事長이 첫 事業으로 指示받은 게 바로 託兒所, 卽 어린이집 事業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事業은 이 會長이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宿願 事業이었다. 그것도 新經營 宣言을 하자마자 實踐에 옮긴 것이라는 點이 特異하다.

    生前 李 會長의 育成을 따라가 보면 어린이집 事業을 여러 角度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첫 番째 論理가 ‘가난을 救濟한다’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會議에서 한 말이다.

    “우리는 住宅 問題가 深刻하다. 서울 달동네는 더 그렇다. 달동네가 없어지지 않는 限 우리나라 部(富)가 아무리 많아져도 分配 問題는 解決되지 않을 것이다. 달동네 男子들은 (막勞動이 大部分이라) 한 달이면 班을 공친다. 女子들은 아기가 있으니 일을 제대로 못 한다. 熱心히 벌어야 한 달에 40萬~60萬 원이다.

    이런 달동네에 託兒所를 지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엄마들이 아기를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들은 우리 建設會社와 連繫해서 臟器로 就業 契約을 해주는 方案을 硏究해 봐라. 석 달 程度 일을 배우면 웬만한 것은 攄得할 것이다. 이렇게 夫婦가 둘이서 일하면 한 달에 150萬 원은 벌 수 있지 않겠나, 1年 半 동안 한 달에 100萬 원씩 貯蓄해도 1800萬 원이다.

    三星이 託兒所를 지어 아이를 5年만 맡겨놓고 일하면 달동네를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옆에서 보면 周邊 다른 사람들도 希望이 생길 것 아닌가. 이걸 우리가 보여주자는 거다.”

    李 會長은 “女性 人力을 活用해야 先進國이 된다”는 말도 많이 했는데 어린이집 事業은 이를 위한 中心 事業이기도 했다.

    다시 한 理事長 말이다.

    “會長님이 저를 直接 불러서 말씀하셨어요. ‘先進國 指標 中 하나가 女性들의 社會活動이다. 우리나라를 調査해 보니 너무 떨어져 있다. 韓國의 主婦들이 到底히 일을 못 하는 狀況이 된 데는 아이 問題가 크다, 外國에서는 아이를 어딘가에 맡기고 일을 나가지만 우리는 맡길 데가 없다.’

    이걸 三星에서 解決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長期的으로는 아이들의 未來까지 달려 있다고 하셨어요. 어린이집 敎師들에게 俸給을 제대로 주고 敎材도 잘 만들어서 普及하면 아이들이 컸을 때 三星맨과 三星 家族이 될 수 있고 顧客도 된다는 거죠. ‘이런 多角的 效果를 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事業 中의 眞짜 事業이다, 10~20年 後 반드시 成功할 수 있다’는 말도 하셨어요.”

    한 理事長은 “于先 全國에 어린이집 數字가 얼마나 되는지 統計를 뽑아봤다”며 數字를 正確하게 記憶하고 있었다.

    “1991年 當時 國立, 公立, 私立 다 包含해서 1919個더군요. 삼성복지재단에서 땅을 사고 建物을 지어 서울市 等 地自體에 寄贈하고 運營을 三星에서 하는 것으로 進行하면 되겠다는 計劃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全國에 55個까지 늘었죠.

    會長님은 무슨 일을 할 때 未來 社會가 어떻게 될지, 狀況이 어떻게 變할 것인지를 먼저 보고 그걸 위한 商品 開發, 核心 事業 프로그램으로 무엇이 必要한지 생각했습니다.

    어린이집 事業도 ‘外國에 가보면 女性들의 活躍이 많은데 韓國은 왜 안 될까,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家父長制 影響도 있겠지만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게 第一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質問 속에서 解決策을 어린이집으로 잡았고 이걸 잘 運營하려면 第一 먼저 무엇을 해야 하나, 바로 敎師를 優待해 줘야 한다, 이런 結論을 내게 되는 거죠.

    事實 어린이집 運營에서 가장 重要한 사람은 敎師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는 敎師 俸給을 많이 줬어요. 敎材나 장난감 等 敎區와 敎育 프로그램도 開發해 供給했지요. 이러다 보니 입所聞이 나서 엄마들이 三星어린이집 보내려고 500名, 1000名씩 기다렸어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登錄하는 엄마들도 많았어요. 3, 4年씩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죠.”

    우리가 先頭에 서면 다 쫓아온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추진 훨씬 이전부터 어린이집 사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어린이집을 세워서 엄마들을 육아로부터 해방시키면 맞벌이 가정이 늘어 소득이 늘 것이고 아이들도 전문교사에게 맡기면 교육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이 어린이집 사업을 하는 것에 내외에서 반발이 많았다. 사진은 1990년 7월 서울시립 꿈나무어린이집 개원식 참석 모습. 오른쪽은 고건 당시 서울시장. [동아DB]

    李健熙 會長은 1993年 新經營 推進 훨씬 以前부터 어린이집 事業에 對한 關心이 많았다. 어린이집을 세워서 엄마들을 育兒로부터 解放시키면 맞벌이 家庭이 늘어 所得이 늘 것이고 아이들도 專門敎師에게 맡기면 敎育效果가 높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當時만 해도 企業이 어린이집 事業을 하는 것에 內外에서 反撥이 많았다. 寫眞은 1990年 7月 서울市立 꿈나무어린이집 開院式 參席 모습. 오른쪽은 櫜鞬 當時 서울市長. [東亞DB]

    어린이집이란 것이 只今은 너무도 一般化됐지만 30餘 年 前만 해도 三星이 왜 이런 事業을 하는지 疑訝해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證言이 있다.

    祕書室 人事팀長을 지낸 노인식 前 社長 말이다.

    “當時만 해도 企業이 어린이집을 運營한다는 것은 宏壯히 破格이었습니다. 該當 地域의 利害關係도 따져야 하는 複雜한 問題였죠. 막상 事業을 하려다 그런 問題에 부딪혀 計劃을 取消한 地域도 있었습니다. 三星어린이집 水準이 매우 높다 보니 比較도 되고…. 外部 反撥도 많았습니다.

    內部에서도 反對意見이 많았어요. 저도 反對意見을 냈다가 혼났습니다(웃음). 會長님은 ‘이게 한두 해 할 事業이 아니고 眞짜 未來의 우리 애들을 위해 하는 거다, 맞벌이도 자꾸 늘어날 것이고 保育施設 支援 政策도 不足하니 우리가 先頭에 서면 다 쫓아올 것’이라고 하셨죠.”

    三星生命 社長을 지내며 保險 외길 人生을 살아온 황학수 前 社長도 어린이집 事業에 對해 懷疑的이었다고 한다(신경영실천위원회 冊子). 그의 말이다.

    “1993年 1月 15日로 記憶된다. 金融系列社 代表理事들과 午餐을 하는 자리에서 會長님이 託兒所를 擴大 設置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特히 生命保險은 많은 契約者를 갖고 있기 때문에 國民 生活과 密接한 關係를 맺고 있는 企業이며, 따라서 그 利潤은 社會 還元 次元에서 託兒所를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三星이 託兒所를 많이 지어 어린이들을 잘 길러내면 나중에 黃 社長이 國會議員 나가도 票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弄談까지 하셨다.

    달동네에 託兒所를 만들면 가난을 救濟하고 國家에 寄與할 것이라는 會長 말씀은 當時로서는 多少 荒唐한 얘기로 들렸다. 企業이 뭐 그렇게까지 할 必要가 있을까. 內心 疑問을 가졌던 것도 事實이다. 하지만 只今 어떻게 됐는가. 먼 來日의 世上을 내다보면 託兒 事業이야말로 正말 必要한 社會福祉事業이라는 慧眼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궁석 前 三星SDS 社長도 會長이 얼마나 託兒所 事業에 꽂혀 있는지 傳하는 에피소드를 이렇게 紹介하고 있다.

    “1994年 3月에 來韓한 美國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會長과 李健熙 會長이 미팅을 갖는 자리에 陪席한 뒤 그룹 情報 인프라에 對해 報告할 機會가 있었다. 컴퓨터 使用의 올드 패러다임(Old Paradigm)과 뉴 패러다임(New Paradigm), 그룹 內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標準化 問題, 情報化 敎育의 重要性 等에 對해 報告했다.

    그러면서 于先 IBM과 헤어져야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只今 世界는 호스트(Host) 中心의 컴퓨터 使用에서 急速度로 오픈(Open) 시스템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IBM은 그 速度가 늦다는 事實을 들었다. 따라서 IBM과의 合作 關係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要旨의 報告를 했다.

    그러자 會長은 ‘헤어져야 한다는 判斷이 서면 하루빨리 헤어져야 한다’면서 ‘다만 絶對로 IBM을 섭섭하게 해서 보내진 말라’고 했다. (中略) 한番은 도노반 美國 MIT 敎授와 미팅이 있은 後 會長이 도노반 敎授가 어떠냐는 質問을 했다. 한마디로 表現하기 어려워 우물쭈물하자 ‘답답하긴, 한마디로 그룹에 必要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에요?’ 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未來에 對한 槪念을 배우는 데 必要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도노반 敎授의 이야기를 저희들이 實行하려면 1年은 걸려야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라고 나름의 所信을 披瀝했다. 그러자 會長은 ‘1年이요? 10年은 걸릴 겁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일 이야기를 한참 하던 會長은 갑자기 重要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고, SDS에 女社員이 많지요, 託兒所 짓도록 하세요.’ 내가 우물쭈물하자 結論이 떨어졌다. ‘왜 答이 없어요, 돈 때문에? 그래도 지어야 해.’”

    어린이집 事業은 以後 政府와 保育業界에서 ‘三星이 保育까지 占領하려 한다’는 非難 輿論 때문에 더는 擴大하지 못했다. 한용외 理事長 말이다.

    “나중에는 現狀 維持 쪽으로 方向을 바꿨지요. 하지만 저희가 뿌린 씨앗이 寄與한 대목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2005年에 調査해 보니 全國 어린이집이 3萬8000個로 늘어나 있더군요. 15年 사이에 20倍 가까이 늘어난 건 三星어린이집이 刺戟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利益의 10%는 남 돕는 데 써야 한다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도 어렵다”고 말한 이건희 회장은 일찍이 삼성의료원을 통해 의료복지를 실천하고 싶어했다. 직접 의사들을 향해 강연하기도 했다. 1994년 4월 삼성의료원 의사를 상대로 한 강연 모습. [동아DB]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도 어렵다”고 말한 李健熙 會長은 일찍이 삼성의료원을 통해 醫療福祉를 實踐하고 싶어했다. 直接 醫師들을 向해 講演하기도 했다. 1994年 4月 三星醫療院 醫師를 相對로 한 講演 모습. [東亞DB]

    李健熙 會長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것인지를 窮理하는 한便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對해서도 苦悶했다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會議 育成에서도 드러난다.
    “各 社가 내 生日에 記念 膳物 가져오는데 그거 가져오지 말고 그 날짜 맞춰서 周邊 養老院, 託兒所 도와주세요. 날짜를 定하면 잊어버리지도 않고 좋잖아. 요즘 敎授에 經濟學 博士라는 사람들이 企業이 利益을 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건 亡兆野 亡兆, 나라 亡할 소리예요.

    企業이 利益을 안 내면 어떻게 하나. 利益을 最大로 내고 從業員, 投資者 株主들에게 最大 利益을 주고 人類에 貢獻하고 그리고 남은 돈은 再分配해야 합니다. 文化事業도 하고 가난한 사람, 달동네 도와주고 社會 疏外階層 돕는 데 利益의 10%는 써야 합니다. 그리고 一般 庶民들에게 도움을 주는 方法이 뭔지 繼續 硏究해야 해요. 經實聯 같은 市民團體에 諮問도 求하고 말이에요. 三星이 벌어들인 利益을 우리가 좀 더 가져간다고 이 나라가 나아지나요. 벌어들인 만큼 社會에 베풀어야 되는 겁니다.”

    한 理事長은 福祉財團에서 다시 三星前者 社長으로 갔다가 2004年 財團 總括로 자리를 옮긴다. 다음은 그 時節에 會長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돈은 벌기보다 쓰는 게 어렵다는 겁니다. 社長團 會議에서도 ‘자네들이 經營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라. 나는 쓰는 것만 硏究하겠다’ 하셨어요. 會長님은 돈을 제대로 쓰는 것을 宏壯히 重要하다고 생각하셨고,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인지에 對해서도 關心이 많았습니다. 받는 사람이 正말 必要한 곳에 쓸 수 있게 써야 하고 쓰더라도 三星 이미지에 어떻게든 도움이 돼야 한다는 거죠.

    저는 돈은 쓰는 게 重要하다는 말을 會長님한테 처음 들었어요. 特히 제가 맡은 일이 系列社가 번 돈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이어서 會長님 말씀은 늘 제 業에 對한 話頭이기도 했죠. 돈 쓰는 分野에서 會長님이 가장 强調한 것은 사람에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代表的인 게 앞서 얘기한 어린이집 事業이었죠.”

    한 理事長은 李健熙 會長이 말로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實際 삶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就任하기 十數年 前부터 生日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洪 女史와 때로는 子女分들을 데리고 京畿道 의왕시 癩患者 마을인 ‘性儺者로 마을’을 訪問해 患者들을 慰勞했습니다. 앞서 달동네 이야기를 했는데 財閥 會長님이 어떻게 달동네 事情을 알 수 있느냐 하지만 實際로 틈만 나면 訪問해서 어려운 이웃들 사는 모습을 直接 보셨어요.

    이 대목에서 짚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會長님이 新經營 推進과 더불어 社會奉仕團을 만듭니다. 이건 單純한 社會 貢獻이 아니라 當身이 直接 體驗하고 느낀 것을 任職員들과 나누려는 마음에서 出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實際로 이 活動을 통해 베푸는 삶이 貴하다는 걸 直接 體驗한 任職員이 많습니다.”

    옥정도 氏가 바로 그런 境遇였다. 三星社會奉仕團 理事를 지낸 그는 1996年에 美國 全域의 自願奉仕 매니저級 코디네이터와 醫局 自願奉仕團體 幹部級 2000餘 名이 參加하는 大規模 會議였던 샌프란시스코 ‘前美 自願奉仕大會’에 參加한 經驗을 통해 나누는 삶이 얼마나 보람을 주는지를 經驗했다면서 이런 回顧를 한다(신경영실천위 冊子).

    “司會者는 三星이 單一 團體로는 가장 많은 人員이 參席했다면서 滿場의 拍手로 激勵해 주었다. 超大型 스크린 2個에 三星을 紹介하는 비디오 映像이 上映되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나왔다.

    上映이 끝나도 繼續되던 커다란 拍手喝采는 우리 19名 모두의 눈시울을 感激과 興奮의 눈물로 흠뻑 젖게 했다. 入社 十數年 만에 이 같은 감격스러운 場面은 처음이라며 모두들 말을 잇지 못했다.

    自願奉仕 活動을 더욱 積極的으로 活性化해야겠다는 覺悟가 힘과 勇氣를 솟아나게 했다. 開會式이 끝난 後 많은 團體 代表가 우리에게 握手를 請하며 名銜을 주고 資料를 要請했다. 複道에서, 各 展示 코너에서 그들은 우리를 家族처럼 親密하게 對해 줬다.”

    그러면서 玉 理事는 世界와의 이런 交流가 글로벌 企業의 本質的 役割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契機였다고도 했다.

    “나는 當時 行事에서 自願奉仕야말로 人類의 普遍的 共同體 삶의 原則임을 切實히 깨달을 수 있었으며, 아울러 世界와 交流하는 것이 얼마나 必要한 일인지를 알게 됐다. 또한 世界市民과 世界國家를 相對로 貿易을 하는 企業이 地域社會를 위한 奉仕活動을 하는 것이 얼마나 重要한 連結고리를 갖는지도 느꼈다.

    企業은 왜 利益을 내야만 하는가? 利益의 窮極的인 目標는 무엇인가? 商品에 담긴 價値는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든 活動은 弘益人間의 理念으로 向해 있으며, 自然도 人間과 共存하거나 人間의 삶을 潤澤하게 하기 위해 存在하는 것으로 認識된다. 그렇다! 自願奉仕 精神은 바로 휴머니즘이다.”

    삼성의료원 개원에 앞서 미리 현장을 찾아 이곳저곳을 살피는 이건희 회장. [동아DB]

    三星醫療院 開院에 앞서 미리 現場을 찾아 이곳저곳을 살피는 李健熙 會長. [東亞DB]

    삼성의료원 개원에 앞서 미리 현장을 찾아 이곳저곳을 살피는 이건희 회장. [동아DB]

    三星醫療院 開院에 앞서 미리 現場을 찾아 이곳저곳을 살피는 李健熙 會長. [東亞DB]

    技術 重視와 人間 尊重

    배종렬 前 제일기획 社長은 “李 會長이 就任 後 第2創業을 宣言하며 湖巖 創業會長의 經營 方針과 가장 다른 키워드를 넣은 것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과 技術’입니다. 技術 重視라는 말과 함께 人間 尊重을 넣은 거죠. 湖巖 會長님은 사람을 人災第一이라고 表現했고 李會長님은 人間 自體를 리스펙트(Respect)하자는 거였죠.”

    배 前 社長이 말하는 ‘리스펙트’라는 部分에 對해 일찍이 이 會長의 人間 尊重 마인드를 體驗했다는 證言이 있어 紹介한다. 안기훈 前 삼성코닝 社長이 新經營實踐위 冊子에 쓴 글이다.(당시 李健熙 會長은 그룹 副會長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안 前 社長은 글을 쓸 當時 職銜인 會長을 그대로 쓰고 있어 그대로 살린다)

    “1975年頃 내가 三星電子 經理課長으로 勤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番은 會長이 事務室에 들렀다가 協力業體 社長들이 다 떨어진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뿌연 담배煙氣 속에서 어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當時는 그것이 一種의 慣行이었고, 어음도 90日을 넘기는 게 當然했다.

    그 場面을 줄곧 지켜본 會長은 ‘協力業體 社長은 新製品 開發이나 品質을 높이는 데 時間을 쏟는 것이 本業이고, 莫重한 責任도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고작 어음 한 張 받으려고 2~3時間씩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경리과長은 앉아서 圖章 찍는 일만 할 수 있는가? 이래서야 部品의 質이 좋아지겠으며, 그런 部品을 갖고 우리 製品이 제대로 되겠는가. 協力業體 社長에게 人格的 物的 待遇를 해주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部品이 나올 수 없다. 빨리 代金 支拂 方法을 바꾸고 그 사람들이 앉는 소파부터 바꾸라’며 크게 나무랐다.

    購買 擔當 社員들의 姿勢에 對해서도 1970年代 後半부터 자주 强調했다. 當時에 購買 쪽에는 ‘우리 돈 주고 우리가 사는데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이 澎湃해 있었고, ‘싸고, 좋고, 빨리’ 中에서 ‘좋고’ 槪念은 不足하고 그저 納期에 맞춰 現場에서 모자라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것이 通念이었다.

    主로 新入社員들이 이런 일을 해 40~60歲의 協力業體 社長들과는 人生經驗에서 큰 差異가 있었다. ‘아니 李 社長, 납祈禱 못 맞추면서 價格은 왜 이리 높아?’ ‘이렇게 하면 다음엔 끊어버리겠어’ 等 젊은 職員들이 나이가 지긋한 協力業體 社長들을 함부로 對하는 境遇가 非一非再했다.

    會長은 이런 모습을 보더니 ‘協力業體 社長들이 얼마나 人生의 無常함을 느끼겠는가? 當身들이라면 이런 侮辱을 받고도 子息에게 家業을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20年 30年씩 일군 家業을 子息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그間 쌓인 많은 技術과 노하우가 어떻게 傳授될 수 있겠는가? 技術이 斷絶되면 더는 品質이 좋아질 수 없다. 部品의 質이 좋지 않은데, 完製品 品質이 穩全하겠는가? 이것이 우리와 日本의 根本的인 競爭力 差異’라며 크게 叱責하셨다.

    新經營 敎育을 할 때 會長은 ‘日本에서는 JIT(Just In Time·必要 部品을 生産 時點에 딱 맞춰 生産해 재고 費用을 줄이는 것으로 ‘摘示 生産’으로 飜譯한다)가 可能하고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은, 方法과 技術은 알지만 協力業體가 신이 나서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大企業 社長은 月給쟁이니까 名譽를 먹고 살지만 協力業體 社長은 오너이기 때문에 名譽보다는 돈을 잘 벌어야 신바람이 나서 일을 熱心히 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購買는 部品의 品質, 그 自體를 결정짓는 核心 要素이며 完製品의 競爭力을 確保하기 위한 源泉이 되는 힘이다. 따라서 購買의 藝術化란 JIT나 原價 管理 같은 技術만이 아니라 協力業體에 對한 人間 尊重까지 包含한 綜合管理 藝術인 것이다.”

    한便 安 前 社長은 監査를 받다가 會長한테 혼난 적이 있는데 이때 會長은 但只 會社의 不實 經營을 짚은 게 아니라 ‘사람에 對한 愛情’ 次元에서 짚어 놀란 적이 있다며 이렇게 回顧한다.

    “個人的으로 會長에게 宏壯히 惹端을 들은 적이 있다. 1980年代 初 三星電子는 매우 큰 고비를 겪었다. 이때 祕書室에서 實施한 經營 監査 結果, 그동안 量的인 面에만 置重한 나머지 會社 內에 相當한 管理 不實과 不正이 存在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監査 結果를 본 會長은 나를 불러서는 ‘當身은 두 番 罷免해도 시원치 않을 사람이다. 簡單히 얘기해서 나는 삼성그룹의 株主다. 三星電子가 利益을 많이 내서 配當이 많아지면 그것만으로 滿足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管理 不實로 인한 損害는 高速 成長期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하겠지만, 남의 집 貴한 子息을 데려다가 敎育도 안 시키고 不淨한 마음을 갖도록 한 罪는 容恕할 수 없다.

    돈 버는 것보다 더 重要한 것은 職員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社員들의 福利 厚生 欲求를 충족시키고 企業의 社會的 責任을 다한 後에 利益을 내야 올바른 經營者다. 그렇지 않으면 經營者, 管理者로서 資格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當身을 管理 不實로 한 番 罷免시키고, 남의 집 貴한 子息들 데려다 不淨한 마음을 갖게 하고 좋은 일꾼으로 키우지 못한 잘못을 물어 한 番 더 罷免시키고 싶다. 그렇게 두 番을 罷免시켜도 내 속이 시원치 않을 것 같다’며 叱責을 거듭하셨다.

    참으로 뼈아픈 體驗이었다. 그러나 이 經驗을 통해 나는 企業에는 質 좋은 製品을 適期에 싸게 供給해 社會에 貢獻한다는 基本的인 役割 外에도 社會的 責任이 있다는 自覺을 하게 됐다.

    卽 社會에 寄與할 수 있는 바른 人材를 育成하고, 從業員의 滿足度도 높이면서 利益을 내는 것이 企業 活動의 本質이자 社會的 責任임을 깊이 銘心하게 된 것이다.”

    奬學金에 條件 안 걸어도 우리가 잘하면 온다

    이와 關聯해 한용외 理事長은 會長이 內部 人材 養成뿐 아니라 자라나는 未來 世代의 人材 養成에 對해서도 關心이 많았다고 했다.

    “湖巖 創業會長님도 늘 人材 養成, 人材第一을 强調했는데 選對 會長님이 더 執拗했던 것 같아요. 湖巖 會長님은 ‘사람이 重要하다’는 것을 强調했다면, 選對 會長님은 사람을 잘 기르고 키워서 活用해야 한다는 것까지 내다보았다고 할까요. 全體 槪念에서 보면 湖巖은 ‘사람이 重要하니까 좋은 사람 골라 써라’는 槪念이었다면, 李健熙 會長은 ‘사람이 重要하니 키워서 써라. 머리 좋은 사람 골라서 留學 보내주고 工夫를 시켜서 人材를 만들어줘라’ 이렇게 擴張된 거죠.”

    이런 次元에서 奬學金을 줄 때에도 條件을 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三星奬學財團이 1年에 1人當 5萬 달러씩 支援을 해줬는데 요즘 換率로 따지면 6500萬 원이 넘는다는 얘기잖아요. 어느 企業이 工夫만 하는 데 그렇게 支援해 주겠어요. 더구나 1990年代 初에는 破格的인 額數였어요.

    會長님은 學生들에게 ‘工夫 끝내고 韓國에 꼭 들어와야 한다거나 三星에서 일해야 한다거나 하는 條件을 걸지 말라’고 하셨어요. 三星이 아닌 다른 企業에 가거나 韓國에 돌아오지 않고 美國이나 世界 어느 나라에 가서 일하더라도 韓國人으로서 位相을 높일 수 있다면 國家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專攻도 무엇이나 相關없다면서 말이지요.

    會長께서 奬學金에 條件을 달지 말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하면 人材는 저절로 오게 돼 있다’는 自信感과 信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政府 硏究機關이든 GE나 애플 같은 企業보다 三星이 더 未來가 보이고 待遇가 좋으면 自然스럽게 三星으로 올 것 아니냐는 생각이셨죠.”

    한便 노인식 前 社長에 따르면 이 會長은 國內 大學生뿐 아니라 外國 學生들까지 奬學金을 주는 制度를 施行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신경영이 本格的으로 施行돼 國際化가 話頭로 되면서 제3국 大學生들에게 아무런 條件 없이 奬學金을 주는 制度도 運營하라고 하셨어요. ‘中國·印度·베트남·인도네시아·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 等 이런 나라들이 앞으로 큰 나라가 될 수 있는 新興 第3世界 國家들이니 이 나라 똑똑한 學生들을 우리나라 友軍으로 만들어야 된다, 톱 10 程度 들어가는 大學을 찾아 優秀 學生들을 選拔해 奬學金을 아무 條件 없이 줘라, 그러면서 理工系 人文系 比率을 7代 3 乃至 6對 4 比率로 하라’는 具體的 指示까지 하셨죠.

    또 ‘앞으로 그 나라 指導者들이 될 사람들이 韓國에 對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알리는 友好 勢力이 되면 얼마나 좋겠나. 學生들이 韓國을 좋아하고 三星에 就業을 希望한다면 다 받아줘라’ 이런 말도 하셨어요.

    當時만 해도 우리나라 學生들도 奬學金 못 받는 사람이 많다고 했더니 ‘國內는 누구든지 줄 수 있다. 하지만 第3世界 國家에는 正말 똑똑한 學生들이 돈이 없어서 工夫를 못 하는 境遇가 많다’고 하셨죠.”

    盧 前 팀長은 “하지만 도와주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나라別로 溫度差가 있었어요. 特히 中國 같은 나라에서는 ‘敢히 우리 人材들을 買收하려 하느냐’는 反撥이 생겨 못 했어요. 反面 베트남·印度·泰國·인도네시아 이런 데는 몇十 名씩 했어요.

    對象者를 定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어느 學校에서 어떤 學生들이 톱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우리나라처럼 修能이나 考試 보는 것도 아니고(웃음). 結局 學校를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는데 成跡뿐 아니라 家庭 形便도 봐야 하고 말이죠. 처음엔 한 數十 名 始作했다가 차츰차츰 늘려가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IMF가 터지는 바람에 中斷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當時 海外 人材를 찾는 過程에서 韓國의 優秀한 海外 僑胞 學生들에 對한 리스트業이 됐던 것이 큰 所得이었다고 했다.

    “海外 學生들 奬學金 주려고 알아보다 보니 中國·印度 學生들이 해마다 몇萬 名씩 美國 留學을 가더라고요. 이런 아이들이 有能한 엔지니어가 된 거죠. 그런데 우리도 留學生이 많았어요. 中國이나 印度는 政府에서 人材를 體系的으로 키우는데 우리는 朴正熙 大統領 때나 했지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해마다 100名씩 最高 톱 大學 博士課程에 보내는 奬學 制度를 만들었습니다. 아마 只今도 繼續 하고 있을 거예요. 벌써 20餘 年 됐으니까 해마다 100名씩 보냈으니 最小限 受惠者가 2000名은 됐을 거예요.

    主로 美國 留學生이 70% 되고 다음이 英國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日本 도쿄대입니다. 이 中에서 韓國으로 들어온 사람은 少數예요. 人文系 빼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人文系度 30%假量 뽑았어요.

    그때 보니 正말 우리나라 學生 中에 優秀한 사람이 많더군요. 모든 科目에서 다 滿點을 받은 天才級이 많더라고요. 그中에는 父母가 餘力이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公務員이나 敎授, 敎師 子女로 形便이 빠듯한 境遇도 많았어요. 2001年度 5萬 달러면 작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그는 野心滿滿하게 出發한 베세토 프로그램도 있었다고 했다.

    “會長님께서 앞으로 한·中·日 세 나라가 重要하니 우리나라 大學生들을 베이징(베) 서울(세) 도쿄(土) 現地 體驗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해서 200名을 한꺼번에 태우는 크루즈先導 샀어요. 1年에 두 番, 一週日에서 열흘 程度를 서울 도쿄 베이징에 가는 프로그램이었죠. 學生들이 支援을 많이 했습니다. 最高 知識人들을 모시고 先生 討論도 하고요. 이것도 IMF 때문에 딱 두 番하고 말았어요. 나중엔 크루즈船까지 損害 보고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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