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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場人이 月給奴隸라니요? 愛國者예요”|신동아

“職場人이 月給奴隸라니요? 愛國者예요”

高東眞 前 三星電子 社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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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연 記者

    grape06@donga.com

    入力 2023-10-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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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東眞은 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評價

    • 同期보다 앞서기 위해 選擇한 武器 = 語學

    • ‘갤럭시의 아버지’란 別稱은 당치 않아

    • 聽力 잃고 ‘이 또한 지나간다’는 敎訓 얻어

    • 갤럭시노트7 事態 收拾 原則은 透明性·責任

    • ‘일하며 살아가고, 살아가기 위해 일한다’

    고동진 삼성전자 고문은 2022년 3월 주주총회를 끝으로 38년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현직에서 물러났다. [조영철 기자]

    高東眞 삼성전자 顧問은 2022年 3月 株主總會를 끝으로 38年 職場 生活을 整理하고 現職에서 물러났다. [조영철 記者]

    出發線에서 한참 뒤처진 始作이었다. 서울 西大門區 굴레房로 아현시장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6男妹의 家長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每日 새벽같이 野菜市場으로 向했다. 和睦했지만 끼니는 每日 돌아왔다. 現實을 直視한 兄弟들은 하나같이 自力으로 일어서기를 擇했다. 長男은 일찌감치 電氣技師 2級을 따 生業 戰線에 뛰어들었고, 次男은 高校 卒業과 同時에 公務員이, 長女는 夜間高等學校를 나와 銀行員이 됐다. 子息들은 아버지의 성실함과 어머니의 儉素함을 體化했다. 서로가 家族에 짐이 되기보다는 得이 되는 쪽으로 不斷히 담금질했다. 돌아보면 成功의 밑거름이 됐으나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단한 時節이었다.

    어머니는 여섯 살 난 막내아들을 앉혀놓고 “열 子息 中에 한 子息만 잘되면 된다”고 말했다. 일찍 철이 든 막내아들은 ‘그 子息이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中學生 때는 ‘내 나이 마흔이 되면 點心때 언제든 불고기 白飯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目標를 세웠다. 온 食口들의 支援으로 學業에 沒頭하는 幸運을 누렸다. 그 德에 大學에 入學했고, 1984年 卒業과 同時에 國內 最高 大企業에 入社했다. 入社 첫날부터 막내아들의 꿈은 ‘이 會社의 社長이 되는 것’이었다.

    118億3800萬 원어치의 勞苦

    職場 生活 31年 만인 2015年 12月, 막내아들은 마침내 꿈을 이뤘다. 가진 것 하나 없던 平社員에서 社長이 된 祕訣이라고는 남들보다 두세 倍 努力한 일 外엔 없다. 일하는 날에도 일하지 않는 날에도 自身의 效能을 높이는 데 集中했다. 그에 對한 評價가 날로 달라져 主要 補職을 두루 거친 건 當然한 手順이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所重한 것도 잃었다. 2006年 8月, 會議를 마친 直後 갑자기 쓰러져 應急室에 실려 갔다. 그날 以後 왼쪽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내의 挽留에도 補聽器를 끼고 會社 生活을 이어갔다. 聽力을 잃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곤욕스러운 瞬間에 直面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職場 生活은 緊張의 連續이었다.

    6年餘間 선봉에서 組織을 陣頭指揮하던 그는 2022年 3月 株主總會를 끝으로 38年間의 職場 生活을 마무리했다. 會社는 그에게 그해에만 118億3800萬 원(給與·喪輿·退職金 包含)을 支給했다. 한 사람이 38年間 會社에 바친 勞苦의 價値를 單純히 돈으로 換算하기가 저어되지만, 數字만큼 確實한 것이 또 있을까. 高東眞(62) 삼성전자 顧問이 三星에서 흘린 땀방울의 價値는 118億3800萬 원 以上일 터다.



    退職 後 便하게 사는 쪽을 擇할 법한데, 高東眞 顧問은 正確히 1年 4個月 뒤 後輩 職場人들을 위한 冊 ‘일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出刊했다. 제대로 된 멘토의 助言이 목말랐던 職場人이 많았던지 出刊 1週日 만에 1萬 部가, 한 달餘 만에 2萬 部가 팔려나갔다. 獨自 가운데 “職場人은 ‘會社 奴隸’ ‘月給 奴隸’ 같은 單語들로 貶下될 對象이 아니다” “職場人들은 個人, 會社, 더 나아가 國家經濟에 얼마나 所重한 사람인지 모르는 境遇가 많다” “誠實性과 꾸준함을 바탕으로 最善을 다해 살아가는 멋진 사람, 尊敬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冊 속 文句에 慰勞받았다는 後期도 적지 않다.

    普通은 잊고 사는, 일의 本質이란 무엇인지에 對해 듣고자 9月 初 서울 한남동 自宅으로 그를 찾아갔다. 情·財界 主要 人士들이 모여 산다는 高級 住居團地의 森嚴한 經費를 通過하고 共用 커뮤니티센터 會議室에서 그와 마주했다. 健康하게 그을린 皮膚에 사람 좋은 눈웃음, 다부진 體格에서 人生의 頂點에 오른 老紳士의 餘裕가 느껴졌다.

    退任한 CEO들은 同種業界 會社를 設立하거나 大學에서 後學을 養成하기도 하는데, 退任 後 첫 行步로 出刊을 擇한 特別한 理由가 있을까요.

    “出刊도 後學 養成과 같은 脈絡이죠. 朝鮮時代에는 선비들이 退任 以後 故鄕에 돌아가 書院을 세우고 著述 活動을 했으니까요. 隱退 前부터 漠然하게 생각은 했습니다. 2021年 社業部長에서 물러나면서 餘裕가 생겼고, 1週日에 2番씩 新入社員, 學部生, 碩士 等 9名 程度와 點心 懇談會를 했어요. 그때 質問 하나씩을 가져오라고 해서 卽問卽答을 했죠. 人事部에서 記錄을 다 남겼고, 지난해 美國 出張길에 資料를 쭉 살펴봤어요. 우리 三星은(고동진 顧問은 ‘우리’ 三星이라고 말했다.) 韓國 社會에서 하나의 集團으로 그루핑돼 있습니다. 三星 內部에서 나눈 도움 될 만한 이야기들을 三星 밖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어요. 20代 初盤에 안병욱 敎授님이 쓴 冊을 읽으며 꿈을 키웠던 記憶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 亦是 對話하는 멘토로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더 正確히는 38年間 三星과 社會로부터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隱退란 時速 200~300㎞로 달리다가 60~70㎞로 달리는 氣分이라고 했는데, 現在 삶은 만족스러운가요.

    “獨逸을 旅行할 때 아우토반에서 時速 200㎞로 달려봤어요. 그때는 아내와 아이들을 車에 태우고 있으니 앞만 보고 運轉했죠. 職場 生活도 마찬가지였어요. 이제 速度를 늦추고 보니 周邊 風景이 보여요. 家族, 兄弟, 함께했던 先輩, 同僚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退任하고 拷問으로 지내면서 連絡 끊겼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있어요. 主禮도 세 番이나 섰습니다(웃음). 스타트업을 運營하는 젊은 代表가 諮問을 求하기에 時間을 내주기도 했죠.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付託은 拒絶을 못 하겠어요. 모두 個人的인 還元이라고 생각해요. 나쁘지 않은 日常입니다.”

    50圜과 돼지껍질의 追憶

    高東眞 顧問은 再次 “個人과 社會에 還元”한다는 意志를 披瀝했다. 還元하려면 받은 게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이룬 成功이라기보다는 스스로 努力해 爭取한 成功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周邊 環境, 家族의 應援, 會社의 支援 等 어느 하나 도움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어린 時節부터 自意識이 剛했던 듯합니다. ‘열 子息 中 한 子息만 잘되면 된다’는 어머니 말씀을 새겨듣고 ‘불고기 白飯’을 每日 먹는 삶을 꿈꿨다고 했는데요. 少年 高東眞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사람의 人生은 周邊 環境에 依해 決定된다고 생각해요. 제겐 아버지와 어머니, 兄弟들이 많은 影響을 미쳤어요. 아직도 기억나는데,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고 交通費 50圜을 아끼려 鍾路에서 아현동까지 걸어오셨어요. 그때 50圜이면 밀크캐러멜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그런 아버지를 따라 兄弟들도 다 節約하며 살았죠. 어머니께서는 제게 늘 ‘한 子息만 잘되면 된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커서 兄弟들한테 물어보니 아무도 못 들었다는 거예요(웃음). 6男妹 中에 막내가 제법 工夫를 잘하니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負擔이 되기보다는 ‘꼭 지켜야 할 約束’이라고 생각했어요. 커서는 目標를 세웠죠. 初等學校 때 第一 많이 먹은 게 돼지껍질이었거든요. 아버지가 牡丹市場에서 돼지비계를 사오시면 작은兄이 털을 다 벗겨서 나눠 먹었어요. 불고기 白飯은 特別한 날 먹는 象徵的 飮食이었는데, 中學校 때 마흔이 넘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을 만큼 成功하겠다고 다짐한 거죠. 그때는 安定된 삶을 願했으니까요.”

    성균관대 産業工學科 卒業과 同時에 삼성전자에 入社했는데, 入社 初 社長을 目標로 設定했습니다. 時代 雰圍氣였는지 특별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2年 前에 新入社員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여기서 社長을 꿈꾸는 사람이 있느냐고. 딱 1名이 손을 들더군요. 다 같이 拍手치며 應援해 줬습니다. 제가 入社했을 때는 社長님이 講演을 했어요. ‘나중에 나도 社長이 돼서 講演하면 멋지겠다’ 생각했어요. 1984年에 入社한 그해 이병철 會長이 日本에서 ‘도쿄 구상’을 했습니다. 저도 釜山에 내려가서 이틀 동안 나오지 않고 30歲부터 60歲까지 人生 로드맵을 짰어요. 사람이 한番 태어났으면 足跡을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目標를 높게 잡으면 副社長까지는 하겠지 싶어서 처음부터 社長으로 잡았습니다.”

    職場人의 標本이 된 男子

    高東眞 顧問은 入社 初부터 남들과 달랐다. 會長이 企業의 未來를 苦悶하며 로드맵을 짤 때, 그는 自身의 未來를 苦悶하며 計劃을 세웠다. 그렇다고 허황된 꿈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성실함은 基本, 自己 客觀化도 徹底히 했다. 新入社員 當時 不足한 點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이 있었다. 事務室 移徙날 누구보다 熱心히 짐을 날랐는데 하루 終日 보이지 않던 動機가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얼굴로 日本語 飜譯 業務를 마치고 나타났다. 뒤따르던 上司에게서 “고동陣 氏는 期待가 컸는데, 아직 뭐가 잘 안 되나?”라는 말을 듣고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그날 以後 退勤 後엔 日本語를 밤새워 獨學하고, 週末마다 梨泰院에 가서 實戰 英語를 익혔다. 會社 일도 먼저 찾아서 效率的으로 處理했다. 上司에게 每日 ‘50秒 브리핑’으로 業務報告를 했고, 退勤 前에는 다음 날 할 일을 整理해 ‘套 두 리스트(To do list)’를 만들었다. 일을 찾아서 하는 社員으로 所聞이 나자 商社들이 그를 찾았다. 通譯 없이 英語와 日語를 하게 되자 會社는 더 많은 機會를 提供했다. 그는 英國 서섹스代 技術政策學 碩士를 取得하고 삼성전자 유럽硏究所腸, 無線事業部 開發管理팀長, 無線事業部 技術戰略팀長을 두루 거쳤다.

    ‘語學은 紙匣 속 10張의 마르지 않는 手票’라고 했는데, 週末까지 返納하며 남과 다른 武器를 만들 當時 氣分이 어땠나요.

    “無條件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를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大入 때 電氣 大學에서 떨어지고 後期 大學 中에 가장 좋은 성균관대를 갔습니다. 父母님이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는데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우시는 걸 봤습니다. 꼭 갚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會社 일은 同期들보다 50% 더하면 됐는데 그 以上의 무언가가 必要했죠. 海外 留學을 가려면, 誇張 以後 駐在員으로 가려면, 社長을 하려면? 語學이 答이었습니다.”

    管理者로서 平社員日 때의 自身을 돌아보면 어떤 評價를 내릴까요.

    “그 當時 先輩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記憶에 남아요. 1990年 삼성전자가 三星半導體와 合倂하면서 綜合企劃室로 發令이 났는데 會食 자리에서 ‘고동陣 代理는 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거기 가서도 成功할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못 할 理由를 따지기 始作하면 그 생각에 끌려갑니다. 저는 어떤 일이 닥치든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일은 하면 된다. 안 될 수도 있겠지. 그때는 또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英國 留學과 駐在員 時節, 남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機會를 통해 어떤 所得을 얻었나요.

    “1990年代 初盤 2年間의 留學 生活을 통해 배운 건 ‘사람은 平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때까지 長幼有序가 甚했는데 世界的으로 有名한 敎授께서 저더러 퍼스트네임을 불러도 된다기에 놀랐습니다. 敎授님 宅에서 每週 夫婦同伴 食事를 했어요. 나이 들어서 간 留學이었지만 公正하게 같은 人格體로 待遇해 주는 것에서 어떤 知識보다 많은 걸 깨달았어요. 2000年代 中盤 駐在員 生活을 할 때는 글로벌 市場에서 不足한 點을 느꼈습니다. 當時 유럽 市場은 노키아, 모토로라, 지멘스, 에릭슨이 占領할 때였어요. 노키아를 보면서 ‘只今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親舊를 이길 수 있을까?’ ‘韓國에 사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소프트웨어에 對한 理解의 幅을 넓히면서 思考의 幅도 넓히는 契機가 됐습니다.”

    1980年代 初부터 2020年代 初까지, 高東眞 顧問은 삼성전자에서 한길을 걸었다. 三星이 携帶電話 事業에 死活을 걸었던 時期, 10餘 年間 開發管理와 技術戰略을 擔當했고 IM(IT·Mobile)部門 社長 就任 後 갤럭시 스마트폰의 歷史를 써 내려갔다. ‘S펜슬’ ‘三星페이’ ‘三星Knox’ 等 삼성전자가 굵직한 轉換을 이끌어내는 데 寄與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두루 精通한 人物이기에 可能했던 結果라는 評價를 받는다.

    갤럭시와 生死苦樂을 함께

    ‘갤럭시의 아버지’라고 해도 過言이 아닐 程度입니다. 피처폰부터 스마트폰까지 삼성전자의 携帶電話 革新을 이끈 原動力은 무엇이었나요.

    “갤럭시의 아버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 앞에 많은 훌륭한 事業部長님들이 계셨습니다. 이기태 社長(피처폰), 최지성 社長(DM), 신종균 社長(스마트폰 하드웨어) 等에 이어 제가 6年餘 동안 社長을 맡았을 뿐이죠. 다만 달랐던 건 소프트웨어에 좀 더 神經을 썼다는 겁니다. 三星 갤럭시는 구글OS를 使用했는데 갤럭시만의 差別化가 必要했고, 硏究 끝에 三星페이와 三星Knox를 만들었죠. 開發 過程에서 專門家 後輩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옳다고 생각되면 일할 수 있게 밀어줬습니다.”

    2006年 海外商品企劃室 無線開發管理팀長으로 勤務하던 當時 聽力을 잃었습니다. 人生의 轉換點이 됐을 듯한데, 어떻게 克服했나요.

    “只今도 記者님 목소리가 窓戶紙를 하나 댄 채로 말하는 것처럼 들려요. 그때는 아내가 일을 그만두라고 했어요. 自尊心이 許諾하지 않았습니다. 1年만 더 다녀보고 決定하겠다고 하고 復歸했는데 補聽器를 알게 됐어요. 끼고 일하니 할 만했습니다. 그 무렵 勤務 環境도 바뀌고, 리더도 바뀌면서 適應해 나갔습니다. 배운 게 있다면 ‘이 또한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高東眞 顧問은 40~50代 때 人生에서 가장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1年 平均 180日間 海外 出張을 다녔다. 잦은 飛行에 每番 바뀌는 낮밤, 몰아치는 日程에 몸이 성했을 理 없다. 한番은 重要한 미팅을 앞두고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約束 時刻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同行한 上司가 連絡이 닿지 않으니 놀라서 警察을 불러 호텔 房門을 부수고 들어갔다. 約束 時間을 지키지 못했다는 당혹스러움보다 몸에 큰 異常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掩襲했다. 그날 以後 高東眞 顧問은 健康을 더욱 徹底히 챙기고 있다. 이 일 以外에도 그에겐 잊지 못할 事件이 하나 더 있다. 그가 IM部門 無線事業部 部長(社長)으로 就任하고 이듬해인 2016年, 갤럭시노트7 배터리 爆發 事件이 터졌다.

    會社 內部的으로 큰 이슈였겠지만 國民들도 ‘國內 最高 企業이 쓰러지는 것 아닌가’ 하는 憂慮도 컸습니다. 責任을 回避하지 않고 正面으로 맞서는 三星에 一流 企業의 格을 느낀 사람도 많습니다. 그때를 回想하면 어떤가요.

    “(고개를 저으며) 回想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나는 떠난다’고 다짐했을 程度로 重且大한 問題였어요. 리더의 役割이 重要한 때였죠. ‘原則을 定하고, 原則을 흔들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그 原則이란 ‘透明性’과 ‘責任’이었습니다. SNS가 活性化된 時期라 所聞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任職員이 納得할 수 있는 原則을 세워야 했고, 消費者·去來線·事業者 等 會社 안팎으로 똑같은 메시지가 나가야 했어요. 이게 첫 番째, 透明性이죠. 또 該當 製品에 對한 全面 리콜을 實施했습니다. 이게 두 番째, 責任이었습니다. 아직도 고마운 게 當時 無線事業部 任職員들이 하나로 뭉쳐서 事態를 收拾한 거예요. 安全과 品質에서 한 段階 成熟하는 契機가 됐다고 봅니다.”

    高東眞 拷問는 38年 職場 生活史를 回顧하며 “職場은 내 努力의 代價로 給與를 받는 프로들이 모인 곳” “우리는 일하며 살아가고, 살아가기 위해 일한다” 等의 말을 했다. 그의 말은 일이란 무엇이냐는 質問에 答을 찾으려 한 16年次 記者에게 餘韻을 남겼다.

    人間에게 일이 주는 價値가 매우 큰 듯합니다. 일이 하나의 有機體라면 38年을 함께한 日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은가요.

    “日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끔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생각해 보면 일이 있어서 살아왔고, 補償을 받았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덧붙여 그런 일 自體를 준 先輩들, 上司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남은 人生은 大韓民國에 사는 젊은 後輩 職場人들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給與 生活을 하는 모든 사람이 愛國者라고 생각해요. 只今도 默默하게 自身의 일을 하는 後輩들에게 ‘잘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傳하고 싶습니다.”



    정혜연 차장

    정혜연 次長

    2007年 東亞日報 出版局에 入社. 여성동아, 週刊東亞, 채널A 國際部 等을 거쳐 2022年부터 신동아에서 勤務하고 있습니다. 金融, 不動産, 재태크, 流通 分野에 關心이 많습니다. 意味있는 記事를 生産하는 記者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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