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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尹伊桑 같은 變節者와 比較하지 말라”|신동아

“나를 尹伊桑 같은 變節者와 比較하지 말라”

北韓이 버린 天才 音樂家 精麤 1923~2013

  • 송홍근 記者 | carrot@donga.com

    入力 2013-07-19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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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머리 차이코프스키’…享年 90歲 永眠
    • 1957年 모스크바서 反金日成 示威 主導
    • ‘不歸의 亡命者’로 마감한 70年 音樂 人生
    • 尹伊桑, 김원균, 精麤의 엇갈린 人生 航路
    • “죽거든 故鄕에 묻어달라” 遺言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分斷의 桎梏에 날것으로 부딪치면서 한 篇의 映畫 같은 삶을 살아온 男子가 5月 13日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別世했다. 音樂家 精麤(1923~2013). 韓半島가 낳았으나 韓國에서도, 北韓에서도 버림받은 悲運의 天才다.

    光州→平壤→모스크바→알마티

    故人은 1923年 光州에서 태어났다. 1942年 日本 니혼(日本)代에 入學해 音樂을 工夫했다. 以後 日帝에 强制徵兵 當했다. 오사카에서 8 ·15光復을 맞았다. 1946年 朝鮮프롤레타리아映畫同盟 初代 書記長이던 親兄 정준채를 따라 越北했다.

    1952年 世界 3大 音樂院 中 하나인 모스크바 國立 차이코프스키 音樂大學으로 留學을 떠났다. 6 ·25戰爭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다. 1957年 모스크바에서 김일성 偶像化 反對 示威를 벌였다. 그 길로 50年 넘게 望鄕(望鄕)의 歲月을 보냈다.

    韓國 近現代史에서 波瀾萬丈한 삶을 살아온 人物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으나 精麤처럼 劇的인 一生을 산 이를 發見하기는 쉽지 않다. 日帝强占期엔 ‘皇國臣民’, 光復 後엔 北韓 公民, 北韓에서 버림받은 뒤엔 無國籍者(카자흐스탄에서 17年間 그는 國籍이 없었다), 그 뒤엔 蘇聯 公民, 蘇聯이 崩壞한 後에는 카자흐스탄 國民으로 살았다. ‘植民地 朝鮮’에서 태어나 社會主義者가 됐다가 革命國家 建設에 一助하겠다면서 38線을 넘었고 김일성 偶像化에 反對한 後 苦難의 삶을 끌어안았다. 末年엔 北韓 獨裁集團을 打倒하겠다고 나섰다.



    故人은 1992年 日本에 亡命한 남로당 마지막 總責 박갑동(1957年 脫北)을 비롯한 亡命客들과 힘을 합쳐 朝鮮民主統一救國戰線(救國戰線)을 結成해 死亡할 때까지 議長을 지냈다. 차이코프스키 音大 卒業 作品 ‘曺國’, 스탈린 獨裁 時節 沿海州에서 中央아시아로 强制 移住한 高麗人의 恨을 담은 交響組曲(몇 個의 樂曲을 모아서 만든 交響曲) ‘1937年 9月 11日 17時 40分 스탈린’, 統一祖國의 愛國歌가 되기를 바라면서 作曲한 ‘내 祖國’이 代表作이다.

    故人의 生前 證言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音樂을 再照明해본다.

    越北했지만 平生 反北 외쳐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精麤는 5月 14日 카자흐스탄 알마티 近郊 부른다이 墓地에 묻혔다.

    그는 光州의 符號이던 外家에서 어린 時節을 보냈다.

    “1930年代 外할아버지宅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어요. 藝術人 집안이었죠. 外三寸도 베를린 音大를 卒業했어요.”

    그는 일곱 살 때 노래를 作曲하는 等 어릴 적부터 天才性을 드러냈다. 집안 雰圍氣가 藝術的 感受性을 간질였다고 한다. 兄弟들도 藝術家로 活躍했다. 兄 정준채는 1950年代까지 北韓에서 映畫監督으로 活躍했다. 現在 서울에 居住하는 동생은 童謠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을 作曲한 音樂家다.

    “1938年 光州西中 다닐 적에 朝鮮語 使用 問題로 日本人 敎官과 다퉈 退學당했습니다. 迂餘曲折 끝에 양정고보에 編入해 卒業狀을 받았어요. 1942年 니혼臺 音樂學科에 入學해 音樂을 工夫했습니다. 滿洲로 가서 獨立運動을 하고 싶었는데, 恩師께서 專門性을 키운 後 그것에 기초해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助言하시더군요. 1944年 日本軍에 强制 徵集됐습니다. 親舊들과 脫營을 圖謀하고 있을 때 日本이 敗亡했어요.”

    니혼臺 在學 時節 그는 兄 정준채의 影響을 받아 社會主義者가 돼 있었다. 解放 空間에서 左翼 映畫界의 中心人物이던 정준채는 1946年 社會主義 革命 雰圍氣가 高調되던 北韓으로 건너갔다. 그는 北韓에 到着한 直後 동생을 平壤으로 불러들였다.

    “어머니가 나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며칠 동안 平壤에 다녀오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38線을 넘었죠. 그러곤 어머니 얼굴을 只今껏 뵙지 못했습니다.”

    越北 後 平壤音大에서 學生을 가르쳤다. 1952年 社會主義 宗主國의 首都이면서 社會主義圈 文化·藝術 中心地이던 모스크바로 留學을 떠났다. ‘김일성勳章’을 받은 北韓의 ‘音樂 英雄’ 김원균(1917~2002)李 모스크바 時節 그의 留學 親舊다. 차이코프스키 音大에서 精麤와 함께 工夫한 김원균은 北韓의 ‘愛國歌’와 ‘김일성 將軍의 노래’ 等을 作曲했다. 北韓 最高의 音大(김원균平壤音樂大學)에 自身의 이름이 붙는 榮譽를 누렸다.

    精麤는 1957年 10月 17日 모스크바大 廣場에 서 있었다. ‘靑年 精麤’의 외침은 쩌렁쩌렁했다.

    “北韓에 金日成 崇拜가 있다는 게 事實 아닌가. 蘇聯에서도 스탈린을 格下한다. 獨裁는 마르크스 社會主義를 배반하는 것이다.”

    1956年부터 北韓에서는 김일성 主導로 反(反)宗派 鬪爭이 일어났다. 남로당파에 이어 蘇聯系, 옌안界를 肅淸하면서 精麤, 김원균 같은 留學生을 相對로도 史上 檢閱을 했다. 精麤를 비롯한 一部 留學生은 ‘反宗派 鬪爭은 김일성 偶像化로 가는 길이며,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偶像崇拜와 다를 게 없다’고 결론지은 後 半(反)김일성 示威를 組織했다.

    精麤는 1957年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示威의 主動者 中 하나였다. 北韓 當局은 모스크바 留學生 全員을 平壤으로 召喚해 調査를 벌였다. 김원균은 이 過程에서 平壤으로 되돌아갔다. 정의롭지 못한 權力에 抵抗한 音樂家(精麤)는 不遇했고, 權力 품에 안긴 作曲家(김원균)는 榮譽를 누렸다. 精麤는 當時를 이렇게 回顧했다.

    “김일성이 蘇聯系度 잡고, 옌안系도 잡고, 甲山系도 잡고, 南쪽에서 온 사람들도 다 잡아버렸어요. 蘇聯系 韓人 許可이는 6·25戰爭 때 김일성이 하는 일을 마뜩잖게 여겼어요. 許可이는 그 나름의 힘을 가진 人物이었어요. 許可이가 金日成을 制壓할 機會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죠. 結果的으로 許可이는 김일성을 살려 놨는데, 김일성이 許可이를 죽여버린 겁니다. 許可이는 1953年 自殺했고, 박헌영은 1955年 死刑宣告를 받았죠. 나 같은 境遇는 모스크바에서 쫓겨나 平壤으로 붙들려 갈 뻔했고요. 示威를 主導한 데다 南朝鮮에서 왔으니 平壤에 갔다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反金日成 示威 主導

    정준채度 權力鬪爭 過程에서 肅淸됐다.

    “兄님이 1956年에 平壤에서 최승희 舞踊劇을 映畫로 찍었습니다. 그런데 錄音裝置 같은 것이 제대로 準備가 안 됐던 模樣이에요. 그래서 北韓 當局이 兄님을 모스크바에 보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필름을 現像하고 編輯하느라 2~3個月 머무른 뒤 平壤으로 돌아갔어요. 兄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蘇聯은 들떠 있었습니다. 또 다른 革命의 時期였죠. 先生들이 스탈린의 잘못을 하나둘씩 暴露했습니다. 學生들도 그것에 呼應해 別의別 이야기를 다 했고요. 우리 音大만 해도 美學 先生인 완슬라브 敎授가 스탈린 탓에 無辜한 市民 數千萬 名이 죽었다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한 짓이 金日成이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兄이 그런 雰圍氣를 지켜본 後 平壤으로 돌아갈 때 내가 飛行場까지 나가 餞送을 했습니다. 北韓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消息을 兄은 모스크바에서 다 알고 간 것 아닙니까. 그 뒤로 兄과 連絡이 닿지 않았습니다. 數年 後에 ‘朝鮮映畫’라는 雜誌를 보니 南쪽에서 兄이 데리고 올라간 사람들의 이름이 다 빠져 있더군요. 勿論 정준채라는 이름도 없었고요. 그렇게 해서 兄이 肅淸됐다는 것을 알게 됐죠. 兄은 勿論이고 兄嫂와 5∼6名 되던 조카들마저 모두 儉德收容所로 갔다는 얘기를 傳해 들었는데, 確實한 行方은 몰라요.”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精麤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50年 넘게 亡命客으로 살았다.

    北韓은 蘇聯 當局에 精麤를 逮捕해 送還해달라고 要求했으나 蘇聯 當局은 折衷案을 提示했다. 當時는 蘇聯系 肅淸 等으로 北韓-蘇聯 關係가 梗塞됐을 때다. 北韓은 “흐루시초프의 蘇聯이 修正主義 路線을 걷고 있다”고 批判했다.

    蘇聯 當局은 精麤를 北韓에 送還하는 代身 알마티로 ‘流配’를 보냈다. 半(半)百年 넘는 亡命 生活이 始作된 것이다.

    “數日間의 汽車 旅行 끝에 톈산(天山)山脈 아래 都市, 아는 사람이 單 한 名도 없는 알마티에 到着했어요. 異邦人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始作됐습니다.”

    “北 愛國歌는 主體思想 讚頌歌”

    北韓의 英雄 김원균에 對한 그의 感情은 곱지 않았다.

    “김원균은 別名이 ‘使道’였어요. 留學 時節 함께 어울려 다녔죠. 나와 그치의 運命이 갈린 것은 김일성 偶像化 反對 示威 때죠. 나는 祖國 獨立을 苦悶하는 過程에서 社會主義者가 됐지만, 스탈린주의는 옳지 않다고 여겼어요.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執權하면서 蘇聯에서 스탈린 格下運動이 벌어졌습니다. 그 過程에서 北韓의 김일성 偶像化 行態에 對한 批判的 輿論이 모스크바 留學生 사이에서 擴散됐죠.

    김원균은 내가 金日成 反對 演說할 때 現場에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김원균이 放學 때 北韓 留學生들에게 잠깐 平壤에 다녀와야 한다고 꾀었던 模樣입니다. 다른 學生들이 걱정하지 않게 집도, 冊도 두고 몸만 잠깐 갔다 오면 된다면서 平壤으로 데리고 갔어요. 留學生을 對象으로 捕虜收容所에서 하는 것처럼 한 名씩 思想 檢討를 했다고 합니다. 김일성 批判이 옳다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가뒀고요. 김원균은 蘇聯에 留學 온 김일성의 조카딸에게 戀人 感情을 갖고 있었어요. 조카딸은 工夫도 못하고 러시아말도 서툴렀습니다. 김원균이 김일성의 忠僕 노릇을 한 것은 ‘김원균平壤音樂大學’이란 名稱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침은 빛나라 이 江山’으로 始作하는 北韓 ‘愛國歌’는 完全히 讚頌歌예요. 그도 그럴 것이 主體思想은 世界 10代 宗敎 中 하나 아닌가요? 主體思想에 딱 맞는 讚頌歌가 ‘愛國歌’인 거예요.

    김원균의 實力이요? 實力은 무슨, 뭐 어디 音樂學校에 다닌 적도 없고, 日帝强占期 에 篤實한 基督敎人이어서 讚頌歌나 알고 있는 形便이었어요. 다만 그치가 作曲한 ‘김일성 將軍의 노래’는 나쁘지 않아요. 나름대로 잘 만들었습니다. 北韓 當局이 김원균을 主題로 한 映畫를 製作해 김원균과 나를 比較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는 金日成 反對해서 여기 남고, 하나는 金日成 讚揚해서 그리로 돌아가고…. 그 사람은 아마도 平壤에서 最高의 榮譽는 다 받았을 겁니다.”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1 1955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音大의 北韓 留學生 中 김원균(뒷줄 中央, ‘김일성 將軍의 노래’ 作曲者)과 精麤(김원균의 왼쪽). 2 1960年 알마티에서 作曲하고 있는 精麤. 3 1941年 도쿄에서 映畫 撮影 中인 精麤의 兄 정준채. 4 1937年 外叔父인 정석호 宅에서 피아노를 치는 精麤.

    精麤는 尹伊桑(1917~1995)과도 곧잘 比較된다. 尹伊桑(1917~1995)은 韓國이 버린 音樂家다. 1967年 ‘동백림 事件’ 以後 故鄕땅을 밟지 못했다. 동백림 事件으로 韓國에서 버림받은 後 北韓式 社會主義와 關聯해 迷妄(迷妄)을 가졌다. 韓國人을 包攝해 北韓에 보내는 일을 한 적도 있다. 精麤와 윤이상의 足跡은 正反對다.

    ‘高麗人의 노래’ 1000曲 採譜

    精麤는 ‘카자흐스탄의 尹伊桑’이란 表現을 싫어했다. 不當하다는 것이다. 生前에 이런 말을 했다.

    “윤이상이 朴正熙 獨裁政權에 抵抗한 民主鬪士인 것으로 알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北韓 組織에 깊숙이 介入했다는 事實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김일성 集團이 獨裁政權이라는 事實을 알았을 텐데, 어떻게 北韓을 斗頓하는 行動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北韓 體制를 反對한 亡命자고, 윤이상은 似而非 社會主義 獨裁國家를 讚揚한 사람입니다. 나를 그와 比較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尹伊桑 같은 變節者가 아니에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北韓이 主張하는 ‘强盛大國’은 엘리트層이 목숨을 扶持하기 위해 내놓은 搜査(修辭)일 뿐입니다. 最近 韓國에서 從北 ·親北 人物이 나타나는 것을 당최 理解할 수가 없습니다. 北韓이 좋다는 사람들은 말로 說得하지 말고 北쪽으로 보내 偶像化가 뭔지, 人權 없는 世上이 어떤 건지 直接 보게 하는 게 方法일 겁니다.”

    1992年 故人은 北韓 民主化와 統一祖國 建設에 一助하겠다는 마음으로 救國戰線 結成에 參與했다. 救國戰線은 北方 政策을 推進하던 노태우 政府와도 線이 닿았다. 政府는 救國戰線을 經濟的으로 도왔다. 그는 政府의 配慮로 光州를 訪問했다. 46年 만의 歸鄕. 어머니 墓所를 찾아 人事를 올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미친 듯 絶叫했다.

    그는 蘇聯이 崩壞한 이듬해인 1991年 救國戰線을 組織했다.

    “나는 그때도 알마티에 居住하고 있었고, 1957年 나와 함께 金日成 反對 運動을 한 허진은 모스크바 近方에 살고 있었습니다. 박갑동 先生, 以上조 先生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상조 先生은 1957年에 모스크바 駐在 北韓大使로 계시던 분으로 모스크바에서 김일성 反對 示威가 벌어졌을 때 蘇聯에 亡命했습니다. 이렇듯 各地의 亡命 人士들이 모여 救國戰線을 꾸렸습니다. 救國戰線의 設立 目的은 金日成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只今은 金正恩 集團을 打倒하는 게 目標입니다. 3代 世襲이 뭡니까? 大明天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故人은 알마티에서도 民族魂을 잊지 않고자 努力했다. 1937年 스탈린의 强制移住 政策으로 沿海州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荒蕪地로 떠밀려온 高麗人을 찾아다니면서 口傳 歌謠를 樂譜에 옮기는 일에 20年 넘게 情熱을 쏟아 부었다.

    “高麗人이 일하는 農場에 찾아가 그들이 부르는 傳來民謠, 勞動歌謠를 1000曲 넘게 採譜했어요. 失鄕民의 노래를 樂譜에 옮기면서 祖國으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을 달랬습니다.”

    그의 亡命地이던 카자흐스탄은 高麗人의 恨(恨)李 서린 곳이다. 高麗人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等에 사는 韓人을 가리키는 말. 러시아語로는 이들을 ‘카레예츠’라고 한다. 高麗人은 스스로를 ‘高麗사람(Koryo-saram)’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當時 막 開發된 6kg 무게의 大衆用 錄音器를 둘러메고 ‘高麗人의 노래’를 錄音했다. 2005年 國史編纂委員會와 한양대 韓國學硏究所는 그가 1959年부터 20餘 年 동안 採譜한 1000餘 曲을 묶어 ‘소비에트時代 高麗人의 노래’라는 題目의 單行本으로 出刊했다.

    “소프호스(國營農場)와 콜호스(集團農場)를 다니면서 錄音하고 採譜했습니다. 그이들의 노래는 슬픈 게 많았어요. 故鄕을 생각하거나 離別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 많았어요. 어느 누구도 生活이 어려웠다든지, 여기에 어떻게 왔다든지, 어떻게 定着했다든지 하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故人의 代表作 中 하나인 交響組曲 ‘1937年 9月 11日 17時 40分 스탈린’은 ‘高麗사람’의 애달픈 삶을 音樂으로 具現한 것이다.

    “오랜 期間에 걸쳐 하나둘씩 完成한 曲이 합쳐진 겁니다. 1970年代 中盤 交響組曲으로 構成됐습니다. 1937年 9月 11日 17時 40分, 그러니까 스탈린이 高麗人 强制移住 命令書에 署名한 바로 그 時刻을 題目으로 삼았고요.”

    카자흐스탄 ‘功勳藝術人’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1961年 ‘가가린 快擧 祝賀 公演’에서 演奏된 ‘뗏木의 노래’樂譜 (왼쪽). 오른쪽은 1970年代 鄭追加 統一 後 愛國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作詞·作曲한 ‘내 祖國’樂譜 .

    2009年 3月 알마티에서 ‘精麤 憲政 記念 音樂會’가 열렸다. 統一祖國을 꿈꾸면서 作曲한 ‘내 祖國’李 演奏됐다.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검은머리 차이코프스키’로 불렸다.

    “그해가 創作 50周年이었습니다. 그것을 記念하는 音樂會였어요. 카자흐스탄 政府는 나의 80歲, 85歲를 기리는 獻呈音樂會도 열어줬습니다.”

    韓國, 北韓은 ‘精麤의 音樂’을 잘 모르지만, 그는 카자흐스탄 音樂界가 尊敬하는 巨匠이다. 카자흐스탄 音樂 敎科書에 실린 作品만 60曲에 達한다. 1988年엔 카자흐스탄 政府로부터 ‘功勳藝術人’ 稱號를 받았다.

    “30, 40年 동안 音樂 關聯 일을 한 功勞로 준 勤勞 메달이라고 할까, 勳章이라고 할까, 뭐 그런 거예요.”

    蘇聯 當局도 그의 能力을 認定했다. 1961年 열린 ‘琉璃 가가린 快擧 祝賀 公演’에서 演奏된 ‘뗏木의 노래’가 그의 作品이다. 유리 가가린은 人類 歷史上 最初로 宇宙 飛行에 成功한 人物이다.

    “카자흐스탄에 蘇聯 聯邦의 宇宙基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人類 歷史上 첫 宇宙人 誕生을 祝賀하는 公演이 이곳에서 열렸어요. 公演을 위해 새로 作品을 쓴 것은 아니었어요. ‘뗏木의 노래’는 그前에 完成한 것이에요. 祝賀 公演 때 내가 現場에서 直接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게 蘇聯 TV에 나간 거예요.”

    그가 卒業한 차이코프스키 音大의 옛 이름은 모스크바 國立 音大다. 나중에 러시아를 代表하는 音樂家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이 붙었다. 精麤는 차이코프스키 音樂 系譜를 잇는 ‘4世代 弟子’로 불린다. 作曲家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唯一한 차이코프스키의 弟子이고, 그 타네예프의 弟子가 精麤를 가르친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다.

    하차투랸의 極讚

    “차이코프스키 音樂을 깊이 있게 工夫했어요. 1920年代 러시아에선 아방가르드 音樂, 形式主義 音樂이 宏壯히 發展했습니다. 알렉산드로프 先生께 ‘아방가르드나 形式主義 音樂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先生께서는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럼 先生님은 그런 音樂은 一切 다루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니까 ‘내가 그놈들을 비웃기 위해 諷刺的으로 아방가르드 式의 曲 하나를 썼다. 時間이 지나면 藝術이 아닌 것들이다’라고 하셨어요. 反對로 차이코프스키의 音樂은 좋은 旋律을 갖췄으며 火星이 아주 圓滿하고 깊이가 있으며 表現力이 뛰어납니다.”

    러시아 各 樂派의 代價인 알렉산드로프, 카발레프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랸 等이 그의 卒業 作品 ‘曺國’을 評價했다.

    “直系 弟子에게도 吝嗇한 點數를 주기로 소문난 알렉산드로프 敎授가 審査場에서 뛰어나오셨어요. 微笑를 띠면서 ‘너 滿點이야. 滿點. 누가 5點 滿點을 주자고 가장 먼저 말한 줄 아느냐?’ 묻기에 ‘글쎄, 누굴까요?’ 했더니 하차투랸이라고 했어요. 하차투랸은 當時 러시아 現代音樂을 牽引하던, 世界的 巨物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興奮도 했고요.”

    故人이 가장 아낀 作品은 統一祖國의 愛國歌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作曲한 ‘내 祖國’이다.

    “‘내 曺國’을 完成한 게 1970年代예요. 高麗人 한 분이 蘇聯을 主題로 쓴 詩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詩를 土臺로 歌詞를 썼습니다. 나중에는 내가 韓國語로 쓴 歌詞를 붙여 音樂會에서 연주했고요. 하모니가 宏壯히 雄壯합니다. 學窓 時節 恩師께서 民族, 國家, 獨立, 愛國을 主題로 삼은 曲을 써보라고 助言하셨어요. 完成해놓고 보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만들고자 한 曲’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統一祖國의 愛國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 祖國’이라는 題目을 붙였고요.”

    “하루빨리 北韓 民主化 實現해야”

    그는 1961年 러시아 女性과 結婚했다. 두 딸을 ‘韓國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韓國語 敎育을 시켰다. 두 딸은 1990年代 韓國에서 大學을 다녔다. 작은딸은 전남대에서 博士學位(英文學)를 받고 現在 카자흐스탄 외국어대 敎授로 일한다.

    “딸들이 韓國에서 生活하면서 韓國人에게 幻滅을 느꼈대요. 韓國 社會에 어떤 矛盾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딸들이 내 所望처럼 韓國사람이 못 돼 안타까워요.”

    生前의 그에게 어떻게 하면 統一曺國이 建設될 것 같으냐고 묻자, 盧(老)音樂家의 얼굴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北韓은 社會主義 國家가 아닌 ‘김일성 王朝’일 뿐이에요. 스탈린주의的 偶像崇拜 國家이고요. 北韓 民主化를 하루빨리 實現해야 해요. 改革, 開放과 民主化가 이뤄져야 統一祖國을 建設할 수 있습니다. 金正恩 밑에 있는 者들은 모두가 奴隸일 뿐입니다. 韓國의 젊은 世代는 ‘統一할 必要가 있는가’ ‘統一하면 삶이 고달파진다’고 생각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大韓民國이 크게 걱정됩니다. 또한 韓國이 이념적, 地域的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健康하지 않아요. 韓國은 北韓이 崩壞하면 그때 가서 管理, 支配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그런데 資本主義的 原則만 가지고선 吸收한 北韓을 管理할 수 없습니다. 北韓 사람들은 計劃經濟 體制에서만 살아왔습니다. 北韓 崩壞 以前에 準備를 徹底히 해놓아야 합니다. 바깥世上을 北韓 住民에게 알려야 해요. 資本主義 國家와 交流를 늘리는 것을 도와야 하고요.”

    그는 한쪽에서는 越北했다는 理由로, 다른 쪽에서는 배반했다는 理由로 ‘두 個의 祖國’으로부터 外面받은 剝製가 돼버린 天才다. 그의 音樂은 그의 삶을 닮았다. 이데올로기 다툼이 남긴 傷處와 統一祖國에 對한 所望이 담겨 있다. ‘曺國’ ‘내 祖國’ ‘1937年 9月 11日 17時 40分 스탈린’은 언제쯤 서울과 平壤에서 울려 퍼질 수 있을까.

    悲運의 天才 音樂家 精麤는 5月 13日 知人과의 點心約束 場所에 가려고 길을 걷다 쓰러져 急逝했다. 이튿날 알마티 近郊 부른다이 墓地에 묻혔다. “죽거든 化粧하지 말고 故鄕에 묻어달라”는 遺言을 남겼으나 ‘不歸의 亡命者’로 永眠한 것이다. 그가 땅에 묻힌 날 부른다이 墓地에는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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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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