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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業에 失敗하고 人間에 絶望했을 때 구들이 날 살렸다”|신동아

“事業에 失敗하고 人間에 絶望했을 때 구들이 날 살렸다”

熱效率 높은 回戰구들 傳播하는 안진근 名匠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入力 2011-09-21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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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事業家 氣質을 타고난 안진근氏는 벼락富者에서 빈털터리 身世를 反復하면서 特異하게도 구들 놓는 데서 마음의 安息을 얻었다. 安氏는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가 暖房 方式의 大勢를 이루는 只今 傳統 方式의 구들을 改善한 膾電球들을 傳播하는 이다. 이番 號 ‘여기 사는 즐거움’의 여기는 바로 우리 民族의 ‘DNA’에 刻印된 구들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인간에 절망했을 때 구들이 날 살렸다”
    몇 해 前 서울 평창동 어느 골짜기에서 재미있는 곳을 發見했다. 煩雜한 서울하고도 鍾路區인데 深深山골에서나 볼 수 있는 개울이 흐르는 것도 新奇했지만 거기서 구들學校라는 곳이 運營되고 있다는 게 더욱 흥미로웠다. 구들學校엔 다양한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다. 建設會社 CEO, 放送社 PD, 新聞記者, 主婦, 大學生, 區廳 公務員….

    구들이 都大體 뭔가. 아궁이에 불을 때서 房바닥에 깔아둔 돌을 덥히는 고릿적 暖房 方式 아닌가. 그게 都市에서 都大體 可當키나 한가. 그러나 구들을 그리워하는 이는 如前히 많다. 나는 구들장에 몸을 푹 ‘支持는’ 것이 疲勞를 푸는 데는 最善이라 여기는 이도 봤고 부침개를 먹으며 구들장에 느긋하게 엎드려 노는 것이 幸福의 頂點이라고 말하는 이도 만났다. 한 番도 구들房을 經驗하지 않은 아이들도 一旦 구들房에 들어가면 즐겁게 뒹군다. 韓國人의 몸細胞 안에는 數千 年 동안 구들에 몸을 눕힌 記憶이 刻印돼 있는 것 같다.

    나 亦是 구들에 關한 즐거운 記憶이 셀 수 없이 많다. 그건 깊은 아궁이와 고래(구들 아래 불과 煙氣가 통하는 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불길과 隱密하고 따뜻하던 굴뚝과도 聯動되는 追憶이다. 메주를 쑤고 造淸을 考古 食醯를 담그는 날의 房바닥의 溫度는 집안에 가득한 냄새들과도 깊이 關聯되어 있다. 구들은 韓國人의 衣食住에서 의(衣)를 뺀 式(食)과 週(住)의 根本이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구들은 急激히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렸다. 땔나무가 至賤인 시골에서조차 傳統的 意味의 구들房은 찾아보기 어렵다. 數千 年 구들장에 몸을 지지면서 추위를 이겨온 우리가 찜질房 말고는 갈 곳이 없어졌다. 昌原 隣近에서 事業을 하던 안진근(61) 先生이 구들에 注目한 건 그런 理由였다. 아니 그는 自身의 구들사랑을 ‘八字’라고 말한다. 事業에 失敗했을 때, 人間에게 絶望했을 때, 疲勞가 極에 達했을 때 구들房에 누워 한숨 자고 나면 절로 힘이 불끈 솟는 것을 經驗하곤 했다. 절집과 黃土와 땔나무와 아궁이에 特別히 이끌렸다. 그러니까 이番 號 ‘여기 사는 즐거움’의 ‘여기’는 일정한 地域이 아니라 우리 民族의 DNA에 刻印된 ‘구들’李 되겠다.

    七佛寺 亞字房의 祕密



    “河東 七佛寺에 아짜방[아(亞)자방]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지예. 한 番 불을 지피면 溫氣가 100日을 가는 房이라고 所聞이 났지예. 무슨 아궁이가 百日 동안 熱氣를 保存할 수 있을까. 구들을 都大體 어떻게 놓았는가. 그게 늘 궁금했어예. 스물 몇 살부터 七佛寺에 가서 얼씬거렸지예. 七佛寺 아짜방은 2000年 前 新羅時代에 만들어진 區들인데 단공禪師라는 분이 만들었다고 傳해지지예. 해마다 아짜방에 가면서 하나씩 祕密을 벗겨냈어예. 한 番 불을 지폈는데 熱氣가 百日 동안 간다면 누가 믿겠어예. 그러나 스님들이 거짓말할 理도 없고, 무슨 祕密이 있긴 있겠다 싶었지예.”

    구들에 關한 冊을 찾아보고 七佛寺에 가서 불도 때報告 하면서 安氏는 차츰 亞字房의 祕密을 把握할 수 있었다. 亞字房의 크기는 48㎡, 한 열다섯 坪쯤 된다. 參禪하는 스님 서른 名이 빙 둘러앉을 수 있는 큰 房이고 七佛寺에서 가장 重要한 房이다.

    “옛 記錄을 찾아봤더니 壯丁이 나무를 가득 얹은 지게를 지고 畫室(火室)로 들어갔다는 內容이 나와예. 熱氣가 百日 동안 갔다는 것은 百日 동안 식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百日 동안 탈 수 있을 만한 나무를 畫室 안에 미리 꽉 채워놨다는 뜻이더라고예. 불 調節을 해야 하니까 아궁이 兩쪽에 補助아궁이가 있어서 거기서 空氣 調節을 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어놨더라고요. 熱力學的으로 봐서 하루에 땔감 1㎏을 땐다면 100㎏을 넣어서 100日을 땐 거지, 1㎏으로 100日까지 갈 수 있게 한 건 아니더란 말이지예. 그런 構造란 事實 있을 수 없지예.”

    安氏는 처음 亞字房을 구경 간 지 30年 만인 2009年 11月 드디어 亞字房의 解體修理를 맡았다. 住持이신 通關스님이 隱密히 亞字房의 구들을 새로 놓겠다는 提案을 했을 때 그는 가슴이 뛰었다. 흙과 돌을 걷어내면 거기 神祕한 構造가 드러날 것을 期待했다. 스님과 다른 구들장이들의 立會下에 그는 房바닥을 뜯어내고 흙을 걷고 구들장을 들어냈다. 自然石 돌마저 걷어낸 後 고래가 놓인 位置와 構造를 살폈다.

    “구들의 軸熱 機能과 熱 分配 構造를 내 눈으로 確認했지예. 規模가 크고 고래 놓인 것이 複雜한 것 말고는 事實 큰 祕密은 없었어예. 古代人이 어찌 이런 暖房法을 생각했던가 싶은 驚異로움은 있었지만예.”

    亞字房과 相關없이 安氏는 이미 自己 나름의 새로운 구들을 開發해두고 있었다. 한 番 불을 때면 닷새 동안 房이 식지 않는 劃期的인 구들이었다. 바닥을 平平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가마솥 바닥처럼 움푹하게 팠다. 그래서 煙氣가 지나가는 길을 여러 겹 回轉하게 만들어 熱氣가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方式이었다. 熱氣를 오래 잡아두기도 하지만 아궁이와 굴뚝에 잠금裝置를 만들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熱氣를 아예 源泉封鎖했다.

    ‘한 番 불 때면 溫氣 5日 가’

    “불을 때고 난 後엔 고래 안을 眞空狀態로 만들어버리지예. 그러니 熱氣가 빠져나갈 틈이 없어예. 傳統 方式의 고래는 熱氣의 40~50%가 굴뚝으로 빠져나가버립니더. 回戰 구들은 97% 以上이 句들 안에 머물러 있지예. 長斫이 타서 熱氣가 한番 고래 안으로 들어가면 그 熱이 밖으로 빠져나오지를 못하게 자꾸 뱅뱅 돌리는 겁니더. 그 熱氣가 空氣 中에서 저절로 식을 때까지 한 5日은 維持되는 거지예.”

    正말 劃期的이지 않을 수 없다. 長斫을 한 番 때면 구들돌이 뜨거워져서 5日을 간다면 한 달에 6番만 불을 때면 된단 말인가?

    “勿論 바깥 氣溫에 따라 差異가 나긴 하지예. 구들學校에서 배워간 學生들이 돌아가서 回戰구들을 設置하거든요. 그들이 놓은 구들도 5日을 가는 걸 보면 誇張하는 거는 아니지예. 傳統 구들이 고래에 列을 많이, 오래 貯藏하고 있지 못하는 건 構造上 問題가 있기 때문이라예. 傳統 구들의 고래는 普通 房의 길이에 比例하게 되어 있거든예. 傳統 구들의 大部分은 일(一)字形인데 이런 구들은 아궁이와 굴뚝이 1個의 고래로 連結되어 있거든예. 아궁이에서 들어온 熱氣가 고래에 오래 머물지 않고 古來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굴뚝으로 나가버리는 거지예. 이런 構造의 구들에서는 損失되는 熱이 無慮 60%나 됩니더. 回戰 구들은 그걸 막으려고 고래의 길이를 最大限 늘렸어예.”

    回戰구들은 房의 아래쪽을 둥글게 파서 고래를 原形으로 돌려가며 만든다. 傳統 구들의 고래가 4m 程度 된다면 回戰구들의 고래는 40m가 넘는다. 이렇게 房 全體에 고래를 原形으로 造成할 境遇 熱氣의 97%가 고래에 貯藏된다는 것이다.

    “熱效率이 가장 높다는 原子爐의 熱 利用率이 65%라예. 그렇다면 우리 구들이 價値가 越等히 높은 거 아입니꺼?”

    구들은 元來 ‘구운 돌’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溫突’보다 더 오래된 純 우리말이다. 草家집이나 기와집 같은 우리의 옛날 집에서 使用되던 바닥 暖房施設 그 自體를 말하거나 이런 暖房法을 利用한 房바닥 또는 房을 통틀어 가리킨다. 구들은 西洋에서 흔히 보이는 大氣暖房 方式이 아니다. 거기서 몇 段階 進化한 暖房法으로 世界 最初의 바닥 暖房 方式이다. 炊事와 暖房을 겸할 수 있어 合理的이며 우리 民族만의 獨步的인 暖房法으로 이 때문에 신을 벗고 室內에 들어와 앉는 坐式文化가 생겨났다.

    돌을 달구는 축열式 暖房이라 西洋 暖房法에 비해 열에너지를 오랜 時間 貯藏할 수 있고, 煙氣가 室內로 流入되지 않는다. 구들의 長點은 더 있다. 바닥을 따뜻하게 만들어 더운 空氣를 위로 올라가게 만드는 加熱方式은 발을 따뜻하게 하고 머리를 서늘하게 만든다. 韓醫學이 말하는 頭寒足熱(頭寒足熱)이다. 머리가 차고 발이 따뜻한 것은 健康의 基本要素로 殊勝화강(水乘火降)이란 韓醫學의 基本原理에 들어맞는다. 물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불기운은 아래로 내려와야 生命의 循環이 일어난다는 哲學인데 구들이 가져오는 頭寒足熱이 바로 人體에서 殊勝화강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구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렇게 말하면 구들이 最高의 暖房法人 것 같지만 傳統구들엔 相當한 弱點이 있다. 바로 房이 빨리 식는다는 것이고 長斫이 많이 든다는 것이고 구들 고래가 쉬이 내려앉는다는 것이고 추운 겨울 바깥에서 불을 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불 때는 아궁이를 가진 집을 여럿 이미 구경했었다. ‘여기 사는 즐거움’에 登場한 이들 中에도 아궁이 暖房을 하는 이가 몇 있었다. 樵隱當 이성래 夫婦는 房과 居室의 높이를 달리해서 居室에 아궁이를 두는 方式을 써서 暖爐 兼用 暖房을 했고 盜賊骨 畫家 夫婦는 아궁이 代身 和睦 보일러를 써서 바닥을 뜨끈뜨끈하게 만들었으며, 智異山 햇살네 夫婦는 傳統 구들과 아궁이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안진근 先生이 만든 回戰구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進化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인간에 절망했을 때 구들이 날 살렸다”

    안진근氏는 房 아래쪽을 둥글게 파서 고래를 原形으로 돌려가며 구들을 놓는다.

    지난 40年間 우리나라 住宅 暖房의 歷史는 엄청나게 變했다. 1950年代엔 都市에서도 나무장수가 있어 當然히 나무를 때는 구들을 쓰다가 그 다음에는 煉炭으로 구들돌을 덥히는 方式을 썼다. 다음에 나온 것이 所謂 煉炭보일러라는 것으로 보일러란 파이프에 물을 넣고 그 물을 데워서 暖房하는 方式이었다. 이어서 1980年代에 기름값이 싸지면서 기름보일러가 나왔고 以後 가스보일러, 이어서 都市가스로 보일러 暖房을 하고 차츰 값싼 深夜電氣가 생겨 그걸로 바꾸는 사람이 늘다가 最近에는 太陽熱 에너지를 쓰기도 하고 드물게는 地熱 에너지 暖房을 하는 집도 생겼다. 40年 만에 바닥을 暖房하는 거의 모든 方式이 總動員됐다 해도 過言이 아니다. 이 中에서 구들은 가장 原始的인 方式일 것이다.

    ▼ 回電球들에도 구들돌을 쓰나요?

    “돌을 쓰지만 옛날 같은 구들돌은 아니라예. 自然石을 使用하면 求하기도 어렵고 施工期間도 늘어나고 模樣이 規格化되어 있지 않아 틈을 맞추느라 時間을 虛費하게 되지예. 그래서 規格化된 돌을 써예. 예전에는 高溫에 견딜 수 있는 돌이 自然石밖에 없었지만 耐火板이라고 高溫에 견디는 돌을 特別히 考案했어예. 回戰구들에는 두 種類의 돌이 使用됩니더. 하나는 거친 花崗巖이나 雲母를 쓰는데 여기서 좋은 기운이 나와예. 이런 돌들은 高熱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니까 低溫의 煙氣가 닿은 部分에 쓰고 1000℃까지 견디는 內畫板은 高溫이 닿는 불木돌로 使用하지예.”

    ▼ 돌만 씁니까?

    “고래에 濕氣가 차면 불을 지펴도 불氣가 잘 안 들어예. 房고래에 불을 들이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불氣가 고래 안으로 들어가 空氣 中의 水分을 吸收하지만 불기운이 줄어들면 다시 濕氣로 變하거든예. 불을 안 때면 濕氣가 구들장 밑에 물방울로 맺히거나 고래 內部의 흙에 吸收되지예. 이 濕氣 때문에 곰팡이類가 繁殖하고, 벌레들도 자라고 濕氣가 甚하면 고래 뚝이 무너지기도 하거든예. 그래서 在來式 구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몇 해만 지나면 무너져버려예. 쥐나 고양이 같은 짐승들도 들어가고예. 回戰구들은 그걸 막으려고 濕度를 調節할 수 있는 裝置를 開發했어예. 濕度調節 裝置는 花盆처럼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缸아리를 쓰지예. 이 缸아리 안에 者玉石과 雲母와 소금을 채워 넣어예. 아궁이를 中心으로 네 귀퉁이에 各其 1個씩, 그리고 가운데에 두 個를 놓으면 소금과 雲母에서 좋은 기운이 나오고 濕氣가 調節됩니더.”

    濕期 吸收 위해 소금 넣기도

    缸아리에 자옥席이나 雲母를 넣는 理由는 이런 鑛物들이 뜨거운 熱을 받으면 遠赤外線을 90% 가까이 房事하기 때문이며, 소금을 넣는 理由는 濕氣를 吸收하는 性質과 軸熱 機能 때문이란다. 缸아리는 構造上 流入된 空氣가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어 한番 들어온 空氣를 오랫동안 가둬둔다. 實驗을 해봤더니 고래 內部에 缸아리 같은 熱貯藏 裝置를 設置할 境遇 溫氣가 머무는 時間이 12時間 程度 늘어났다고 한다.

    ▼ 都大體 이런 구들을 어떻게 發明하게 됐지요?

    “한番은 가마솥 앞에서 불을 때고 있었지예. 솥에 담긴 물이 끓자 바깥으로 넘쳐나지 않고 中心을 向해 둥글게 몰려들데예. 냄비는 물이 끓으면 밖으로 넘쳐버리잖아예. 냄비 바닥은 平平하고, 가마솥 바닥은 둥그렇잖아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지예. 제가 元來 이런저런 實驗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예. 구들도 가마솥 바닥처럼 둥그렇게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예. 圓의 槪念은 始作도 없고 끝도 없고 防衛도 없잖아예. 回戰구들을 하면 굴뚝도, 아궁이도 아무 方向이나 놓을 수가 있으니까 그것도 좋지예.”

    ▼ 回戰구들의 短點은 뭐지요? 아무리 좋다 해도 限界가 있을 게 아닙니까.

    “費用이 많이 들어가는 거지예. 그리고 都市에서는 쓸 수 없다는 거고! 經濟的으로 餘裕 있는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지 않으니까 普及에 限界가 있고 普及에 限界가 있으니까 材料값이 비싸지지예.”

    ▼ 예전부터 구들 놓는 사람은 氣壓이나 바람의 方向이나 地形이나 氣候를 잘 살펴 科學的으로 놓을 줄 알았다고 하던데요.

    “허허, 맞아요. 그렇지만 거기에도 限界가 있었던 거지예. 옛날 사람들은 아궁이에 不滿 잘 들고 房이 고루 따뜻하기만 하면 구들 잘 놨다고 하거든예. 에너지 消耗가 많든 적든 따지지를 않았지예. 불을 잘 들이는 건 事實 簡單한 일이라예. 물은 내려가는 性質이 있고, 불은 올라가는 性質이 있어예. 自然의 그 原理만 알면 사실 아궁이에 불을 잘 들게 하는 건 簡單해예. 고래를 위로 올라가게 만들기만 하면 되거든예. 불이 잘 든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熱氣가 밖으로 빨리 빠져나간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예? 熱이 고래 안에 오래 머물고 있어야 좋은 구들이지 빨리 빠져나가서야 좋은 구들이 아니잖아예.”

    ▼ 回戰구들 놓을 집이 많을까요? 都市에서는 不可能한 暖房法 아닙니까?

    “勿論 都市에선 안되지예. 아파트에도, 四大門 안에도 쓸 수가 없지요. 뜰이 있는 집에서 찜질房 하나 程度 짓는다면 모를까. 只今 우리나라 農村住宅이 200萬戶假量 됩니더. 이 中에서 半은 비어 있지예. 구들 놓는답시고 全國 어디든 안 다녀본 데가 없어 내가 좀 알지예. 나머지 100萬戶 中에서 半은 암만 回戰구들이 좋다고 해도 돈이 없어 못 놓습니더. 그 나머지 50萬戶에 回戰구들을 놓자는 겁니더. 시골 가면 老人들이 기름보일러 해놓고 기름이 아까워서 못 때고 다들 오들오들 떨면서 겨울을 나지예. 번듯한 古宅들도 魔讚歌지고예. 深夜電氣 보일러 놓은 집들도 겨울을 춥게 나는 건 마찬가지라예. 그런 집들에 回戰구들을 놓으면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解決되지예.”

    ▼ 땔나무는 充分한가요? 燃料를 쉽게 求하지 못하면 回戰구들도 소용없잖아요?

    “나무는 많아예. 1年에 山불로 毁損되는 山林만 汝矣島 面積의 열 倍인 400萬坪이臘니더. 間伐과 颱風 같은 災害로 毁損되는 山林이 800萬坪이고. 그 1200萬坪에서 나오는 나무만 해도 80萬戶의 땔감이 나온답니더. 只今 颱風에 쓰러진 나무들은 木材로도 쓰지 못하고 쓰레기場으로 보내서 돈을 들여 燒却하거든예. 그거 얼마나 아깝습니까. 木材로 쓰던 헌 나무들도 다시 使用하기는 어렵다네요. 헌 나무는 大槪 못이 박혀있어서 거기 電氣톱을 對面 톱날이 나가버린답디더. 그런 나무들 다 長斫으로 만들어 때면 되지예. 누이 좋고 妹夫 좋다 아입니꺼.”

    設置費 비싼 게 欠

    安氏의 말이 맞다면 回戰구들은 시골사람들에겐 자그만 福音이겠다. 다만 初期 費用이 너무 많이 든다. 坪當 150萬원 程度! 普通 房 하나에 구들을 놓자면 700萬~800萬원이 든다는 計算이니 普及하기가 쉽지는 않겠다.

    “20年 前쯤 安東 어느 곳에 있는 古宅에 구들을 놓으러 갔더니 老人丈이 이런 말을 下臺예. 40代 되는 젊은 놈이 鬚髥도 못 깎고 구들을 놓고 다니니까 惻隱之心이 생겼던가봐예. ‘앞으로는 집을 짓는 게 能事가 아닐 거다. 지어놓은 집을 잘 管理하는 게 더 重要한 일이 될 거다, 그걸 硏究해봐라’ 라고 하셔예. 그 어른의 말씀이 늘 귀에 쟁쟁했지예. 그때만 해도 기름값이 싸서 시골 古宅들이 暖房을 다 기름보일러로 바꿨거든예. 기름보일러로 바꾸니까 便利는 한데 濕氣 때문에 오래 묵은 기둥이 다 썩어버리거든예. 나무기둥이 있는 집은 구들로 불을 때야 벌레도 죽고 濕氣도 걷을 수 있는데 바닥에 溫水를 돌리는 보일러를 놓았으니 濕氣를 못 잡아서 겉만 멀쩡하지 기둥뿌리는 정작 다 썩는다는 겁니다. 그 말을 고맙게 들었지예. 溫水를 돌리는 보일러가 아니라 傳統 方式 구들을 살릴 길이 뭔지를 그때부터 찾아 나선 거라예. 바닥에 불을 깔고 사는 民族은 우리 民族밖에 없어예. 滿洲사람은 돌을 뜨겁게 달궈 올라앉고 日本사람은 뜨거운 물을 이불 밑에 넣지만 우리는 房바닥 全體에 뜨거운 煙氣를 깔고 살잖아요. 人間은 아랫도리가 뜨거워야 불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힘이 생기는 거지예.”

    ▼ 西洋에서도 最近 우리 溫突이 人氣가 있다면서요? 殊勝화강이란 韓醫學 原理 때문에 그런 건가요?

    “主로 겨울이 긴 北유럽 사람들이 우리 溫突 暖房을 좋아하지예. 그러나 그건 嚴密히 말하면 구들은 아니지예. 구들이란 구운 돌이란 意味의 純 우리말이고 溫突은 ‘溫突(溫突)’이라고 쓰는 漢字말이잖아예. 돌을 달구든 바닥에 파이프를 깔고 물을 넣어 轉機로 돌리든, 나무로 돌리든, 가스를 돌리든 바닥이 따뜻한 건 無條件 溫突이라고 불러예. 그러나 구들은 돌로 달구는 것만을 말하니까 뜻이 같지는 않지예. 獨逸,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같은 北유럽 사람들이 溫突을 한番 맛보면 反해서 죽을라고 하지예. 그 곳은 페치카(壁暖爐) 暖房을 主로 하는데 페치카는 불이 들어가면 바로 열이 나오는 反射暖房 아입니꺼. 그런데 우리 구들은 黃土와 돌이 달궈져서 熱을 내는 複寫난방이거든예. 유럽人들은 戰爭을 하고 사냥을 하느라고 빨리 움직여야 되니까 포크, 나이프를 쓰고 느긋한 에너지源이 必要 없었어예. 그런데 우리는 한자리에 붙박여 살기 때문에 徐徐히 熱이 나오는 느긋한 에너지源이 훨씬 좋았던 거라예. 暖房法의 發生은 地域 文化와 氣候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만 인제는 그들도 한자리에 느긋하게 붙박여 사니까 溫突이 좋은 거지예.”

    ▼ 獨逸에서는 溫突의 正式 名稱으로 우리말 그대로 ‘ONDOL’로 부른다고 들었어요.

    “溫突이 아닌 ‘GUDUL’로 부르는 게 더 좋겠지예. 文化란 모든 게 같이 따라가는 겁니더. 하나가 올라가면 나머지도 같이 따라 올라가는 거지예. K-POP이 海外에서 人氣가 있으면 구들도 海外에서 더 큰 人氣를 얻을 겁니더. 앞으로 回戰구들 暖房法을 輸出하지 말란 法도 없지예. 中國이 아리랑을 自己네 文化遺産으로 登錄했다는 뉴스 봤습니꺼? 氣가 막힐 일이지예. 눈 빤히 뜨고 우리 것을 멍청하게 남에게 뺏기는 꼴 났잖아예? 구들도 마찬가집니더. 日本이나 中國이 自己 거라고 가져가버리면 우리는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됩니더.”

    在日同胞와의 運命的 만남

    “사업에 실패하고 인간에 절망했을 때 구들이 날 살렸다”

    안진근氏가 京畿 加平의 한 禪房에서 구들을 놓고 있다.

    그는 富裕한 집안의 長男으로 慶南 창원시 上南洞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는 철이 늦게 들었다고 하지만 그는 局量이 크고 義俠心도 있었던 것 같다. 1980年代 初 그가 釜山空港에 勤務할 때였다.

    “오야마(韓國 이름은 김종달)라는 在日同胞 事業家가 釜山을 자주 往來했어예. 그는 한 番 오면 同胞 小商工人을 한 70名쯤 데리고 와예. 그가 水蔘을 사 가지고 가다가 通關이 안 돼 쩔쩔매고 있을 때 節次 等을 좀 度와드렸지예. 그랬더니 고맙다고 자꾸 돈을 주려고 해요. 當然한 일을 한 건데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돌아가서는 一週日 쯤 뒤에 連絡이 왔데예.”

    그렇게 해서 安氏는 航空社를 그만두고 오야마의 韓國 ‘現地 祕書’ 노릇을 始作했다. 오야마가 提議한 일이었다. 安氏는 작은 오퍼상을 내고, 오야마가 데려오는 日本人 小商工人들에게 韓國의 物品을 仲介해주는 일을 맡았다. 日本 商人들은 主로 가방, 신발, 옷, 造景用品 같은 것에 關心이 많았다고 한다.

    “待遇物産 같은 곳을 連結만 해줘도 커미션(手數料)을 3%씩 正確하게 通帳에 넣어주데예. 中間에서 10원도 더 깎지 않았어예. 觀光 案內를 해서 가게에서 커미션을 줘도 제 주머니에 넣지 않고 日本 小商人들에게 똑같이 나눠서 돌려주곤 했지예. 그 바람에 그들로부터 信賴를 얻었어예. 日本 事業家의 信賴는 엄청나데예. 그렇게 한 一 年 지내다 通帳을 보니 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어예.”

    ▼ 얼마나 쌓여 있던가요?

    “韓 10億쯤 되데예. 1980年代 後半 釜山에서 49.5㎡(15坪) 住公아파트 값이 1000萬원쯤 했거든예. 그런 아파트 10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지예. 當時 釜山에서 BMW 自動車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朴正熙 大統領 主治醫와 안진근 둘뿐이라는 말이 있을 程度였지예.”

    그러나 다 옛날이야기다. 쉽게 들어온 돈은 올 때보다 더 쉽게 나가버렸다고 한다. 以後에도 事業을 해서 목돈이 들어온 적이 있지만 虛妄하게 날아갔다. 그가 돈을 날린 이야기도 재미있으니 잠깐 들어보자.

    짧은 期間에 壓縮成長韓 우리 經濟는 個人에게 갑작스러운 財物을 안겨주고 또한 갑작스럽게 거둬가는 副作用도 낳았다. 한창 돈을 벌 當時 30代인 그에게 오야마가 權限 趣味가 乘馬였다. 乘馬를 하면 健康에도 좋고 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乘馬의 魅力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예. 말의 키는 170cm도 안 됐지만 말 等位에 올라가서 보는 世上은 全혀 달라 보였지예. 발끝에 힘을 꽉 주고 말과 한몸이 되면 世上 두려울 게 없어져예. 自然과 人間과 動物이 三位一體가 되는 짜릿함이 엄청났어예. 한동안 말밖에 보이는 게 없었어예.”

    쉽게 번 돈 쉽게 나가

    그는 돈이 모이니까 좋아하는 말을 실컷 사고 싶었고 말이 여러 筆 생기니 乘馬클럽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計劃이 어그러지면서 그는 瞬息間에 큰돈을 날렸다. 그러면서 괴로움이 커졌고, 몇 年 새 확 늙어버렸다.

    “그 무렵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데 내 또래쯤 되는 사람이 석남사 가는 길을 물어봐예. 가르쳐줬더니, ‘예, 어르신’하고 고개를 숙이더라고요. 또래 사람이 나를 어른 待接하는 게 神奇해서 거울을 仔細히 봤지예.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얼굴이 完全히 老人으로 變해버렸데예.”

    以後 그는 절집을 찾아다녔다. 스님의 善防에도 들어가 앉아보았다. 절절 끓는 구들房에 누우니 붕 떠서 흔들리던 마음이 비로소 바닥으로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河東 七佛寺 亞字房에 特히 자주 드나들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구들房이 준 慰安을 잊지 못해 그는 ‘구들, 구들’ 노래를 부르기 始作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사람은 生業이 必要하다. 일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寄生해서 살게 된다. 妓生은 自尊心을 버리는 것이다. 自存을 잃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손을 댄 게 飮食店이었다. 고기를 黃土에 싸서 아궁이에 구워서 팔면 괜찮을 듯싶었다. 늘 보는 게 구들이고 아궁이高 黃土였으니 自然히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黃土오리구이 事業으로 그는 또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貯蓄銀行에 投資했다가 그는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完全히 거덜이 났지예. 다 亡하고 나니까 對人忌避症이 오데예. 사람이 싫으니까 다시 山을 찾게 되고, 山에 가더라도 길이 아닌 길을 찾아다니고, 길이 아닌 길을 찾다보면 거기 어딘가 또 절이 있데예. 절에 가면 空밥을 주잖아예? 스님들 곁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참 좋데예. 그때부터 工夫하는 스님들 房에 구들을 놓아주기 始作했지예. 그러다보니 차츰 제가 갈 길은 이것이다 싶데예. 事業에 그토록 많이 亡한 것도, 그래서 事業에 情이 똑 떨어진 것도, 내가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한 일 같데예. 내 人生이 아주 複雜해예. 罪도 참 많이 지었어예. 가만 돌아보면 前生을 믿을 수밖에 없는 人生이라예. 馬山에 腸谷山 고개라는 게 있어예. 비가 오는 날 하늘 똥구멍을 쳐다보고 있는 辱, 없는 辱을 실컷 퍼부어 댔어예. 밤새 辱을 하고 눈물 빗물 범벅이 된 채로 새벽을 맞이했는데, 속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하데예. 가진 것을 다 잃고, 最高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내 갈 길이 훤히 보이는 게 神奇하데예.”

    그래서 完全히 빈손으로 절집을 떠돌면서 그는 구들 놓는 사람이 되었고 回戰구들을 發明해서 特許를 냈고, 因緣 따라 흘러와서 평창동 골짜기에서 구들學校까지 열게 된다. 여러 가지 일로 구들學校는 現在 門을 닫은 狀態다.

    ▼ 여러 사람에게 膾電球들이 알려진다는 건 結局 좋은 일 아닌가요?

    “좋은 일이지예. 나쁘다는 게 아니라 혼자 하기에는 기운이 빠져서예. 여기서는 구들을 놓았다 허물었다 하지만 現場에 가면 허물지 않아도 되니까 授業을 하더라도 現場에서 하고 싶어서예. 구들은 州生活 文化라예. 좋은 傳統을 이어받아 現在 狀況에 맞게 고쳐나가야 살아 있는 文化가 되거든예. 구들이 앞으로 크게 빛을 볼 거라고 나는 믿어예. 구들 배우는 사람도 늘어날 거라예. 우리나라를 찾는 外國人에게 韓屋을 보여주지만 말고 구들을 體驗하게 만들어야 해예. 한番 구들房을 經驗하고 나면 난生처음 자보는 사람들도 몸이 먼저 좋아라 하는 것을 느끼게 되거든예! 그러면 韓流처럼 우리 구들이 世界로 팔려나가게 되는 날이 올거라예.”

    돈 말고 재주 줘야 참 布施

    나는 加平에 있는 오래된 절의 禪房에서 安氏가 黃土와 甓돌과 자갈돌로 回戰구들을 놓는 것을 구경했다. 風光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庵子였다. 山의 稜線이 左右로 길게 누운 부처의 形象이었다. 山꼭대기에 올라앉았더니 이런저런 分別이 아득히 지워졌다. 겹겹이 싸인 稜線의 波濤는 本디 사람의 疲勞를 녹여주는 機能이 있다는데 그런 風光이 눈앞에 끝도 없이 이어졌다.

    “사업에 실패하고 인간에 절망했을 때 구들이 날 살렸다”
    金瑞鈴

    1956年 慶北 安東 出生

    경북대 國文科 卒業

    大邱 中央中 國語敎師, 매일경제신문·샘이 깊은 물 客員記者

    月刊 ‘東西文學’ 新人賞

    著書 : ‘女子前’ ‘김서령의 家’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等


    安氏는 거기서 겨울을 날 현우스님을 위해 구들을 놓아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울력은 현우스님이 直接 하고 먹고 자는 것은 절에서 解決하니 材料費만 받아도 밑질 건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얼마 前 勞動部가 주는 구들名匠 稱號를 얻었다. 名將이 되면 政府로부터 支援金도 나오고 한 달에 얼마씩 生活費도 補助가 된단다. 安氏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다. 그러면서 얻은 깨달음은 이렇다.

    “돈을 벌어서 사람들한테 주는 것은 布施가 아니더라고예. 子息에게도 親舊에게도 돈을 주는 것은 火를 주는 거더라고예. 돈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재주를 남에게 줘야 된다는 걸 알았어예. 菩薩 行爲는 그런 거지 딴 게 아니더라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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