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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亡하여도 都市엔 봄이 오고’|신동아

‘나라는 亡하여도 都市엔 봄이 오고’

1920年代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入力 2011-08-23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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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本誌 創刊 80周年을 記念해 韓國 近代의 風景을 새로운 視線으로 살펴보는 連載를 始作한다. 이 글은 韓國 近代의 한복판에 該當하는 1920年代의 歷史的 事件과 事實을 素材로 한 논픽션이면서, 新聞記者이자 늦깎이 文學徒인 한림 (韓林)이라는 虛構의 話者(話者·narrator)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獨特한 다큐멘터리다. 只今 우리 삶의 近代的 形態는 80~90年 前 서울과 當時 사람들에 많이 기대고 있다. 이 글은 그 뿌리를 더듬는 흥미로운 旅行이 될 것이다. 이 글은 當時 동아일보 記事를 主로 活用했으며, 其他 參考資料와 書籍은 雜誌 記事 形式上 連載 末尾에 실을 豫定이다. <편집자>
    #第1張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19年 서울 崇禮門 一帶 거리.

    겨울의 개울이 얕게 흘렀다. 서린동(瑞麟洞)을 지나던 新聞記者 한림(韓林)은 걸음을 멈추었다. 築臺 아래 개울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흰 치마저고리와 쪽찐 머리들 뒤로 河川敷地는 흙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청계천은 장마철 아니면 물이 穩全히 차는 일이 드문 건천(乾川)이다. 汎濫 아니면 가뭄. 개川은 두 모습 中 하나다. 한 길 높이의 石築 벼랑에는 아이 키만 한 가마니들이 빨랫감을 가득 채우고 줄지어 섰다. 광주리 한두 個씩으로는 不足한 模樣이다. 빨래터는 엊그제부터 풀린 날씨로 活氣를 띠고 있다.

    異常한 겨울이다. 얼마 前 12月 中旬에는 봄날 氣溫 같고 여름 장마 같은 날씨가 一週日이나 이어졌다. 그러다 同志(冬至) 녘에 사나흘 平年 氣溫을 되찾는 듯하더니 요 며칠 또 氣溫이 올라갔다.

    異常 暖冬 現象은 12~13日부터 全國에 水害를 몰고 왔다. 平安北道 宣川(宣川)軍에서는 3日間 내리 비가 내려 여름 장마를 彷彿케 했다. 거기다 山과 들에 쌓인 눈, 개川에 한 隻(尺) 以上 얼었던 얼음까지 다 녹아내렸다. 水路는 죄다 汎濫하고 陸路는 모조리 잠겼다. 平壤과 新義州를 잇는, 이 傳統의 交通 要衝은 痲痹됐다. 바로 위 龍泉(龍川)도 暴雨로 말과 自動車 通行이 杜絶되고 郵便物 配達이 中斷되었다. 겨울의 물亂離에 老人들은 처음 보는 氣候라고 수군댔다. 때 아닌 비와 포근한 날씨로 初有의 엉뚱한 겨울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림은 記事에 썼다. 全國의 支局(支局)에서 올라오는 消息을 社會部 選任 記者 한림은 사흘째 綜合하고 있었다.

    몇 個月 동안 繼續된 가뭄에 눈도 비도 구경 못하고 새벽마다 물 길어 나르던 咸鏡南道 弘遠(洪原)君 住民들은 때늦은 겨울 暴雨에 어이없어 했다. 3日 동안 퍼붓는 빗속에 道路는 진흙바다가 되어 通行杜絶이었다. 忠淸南道 公主(公州) 地方은 溫暖化로 보리農事에 害를 입지 않을까, 傳染病이 돌지는 않을까 憂慮가 높았다. 東海岸에는 例年보다 明太가 많이 올라와 商人들은 價格 暴落을 걱정했다. 南海岸에는 따뜻해진 바닷물로 大邱가 蹤跡을 감췄다. 農作物이 全滅한 데 이어 漁場까지 망쳤다고 人心이 洶洶했다.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酷毒한 가뭄 被害를 본 慶尙南道 密陽(密陽)에서는 올 時期에는 안 오더니 오지 않아야 할 時期에는 온다고 怨望이 쏟아졌다. 慶尙北道 星州(星州)에서는 닷새 동안 그치지 않는 비로 蓮못이 넘치고 家屋이 잠겼다. 金泉(金泉)에서는 흙비가 내렸다. 3日 連續 그야말로 한時도 쉬지 않고 뿌린 빗줄기에 보리 이삭은 마구 패었다. 數十 年 以來 처음 보는 겨울 장마였다. 올 벼農事를 가뭄으로 망쳐버렸는데 보리까지 全滅 地境이니 來年 보릿고개 넘기는 더욱 힘들게 됐다. 主要 港口마다 貨物은 쌓여 있고 荷役 못한 배들로 滿員이었다.

    異常 氣候·陰散한 비

    오래 내리는 궂은비에 全國은 陰散하게 젖어들었다. 마치 甲午(甲午)年 氣候 같다는 둥 온갖 陰散한 風說이 돌아다녔다. 甲午年이라면 1894年을 말한다. 東學(東學)敎徒와 農民들이 官軍(官軍)과 靑軍(淸軍) 일군(日軍)과 부딪치며 內戰(內戰)을 벌였던 해, 淸나라와 日本이 朝鮮의 땅과 바다에서 大田(大戰)을 벌인 해다. 35年 前이다. 그로부터 始作된 15年間의 阿修羅 歲月을 거치고서 朝鮮은 日本에 倂合되었다. 그리고 다시 20年이 더 지났다. 甲午年 같은 阿修羅場이 더 남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올해 봄과 여름은 酷毒한 가뭄이었다. 가뭄 끝에 단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한바탕 洪水가 짧게 지나갔을 뿐이다. 그렇게 한 해 내내 말라 시든 山川에 겨울의 暴雨가 歲밑을 쓸고 간다.

    地方 各地에서 올라오는 狀況들을 보면서 한림은 ‘가뭄 끝의 쓴 비’라는 題號를 떠올렸다. 하지만 주제넘게 나서지 말자고 생각했다. 자네 小說에나 쓰지. 部長(部長)은 分明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날 記事의 題目은, ‘처음 보는 以上 氣候-陰散한 비(陰雨)’로 나왔다. 두 週 前의 일이다.

    朝鮮王朝에서라면 이쯤 되면 祈晴祭(祈晴祭)를 지냈을 일이다. 1418年 8月7日의 太宗實錄은 傳한다.

    地震(地震)李 나고 큰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都城 밖은 물이 넘쳐서 말이 빠져 죽고 穀食이 크게 損傷되었다. 祈晴祭를 行하였다.

    王이 直接 祭壇에 나서는 祈晴祭를 지내는 代表的인 곳은 都城 바깥의 境遇 南端(南壇)이었다. 南山에서 西南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丘陵의 끝자락에 位置한 南端은 이제 朝鮮駐屯軍司令部의 領內로 編入돼 자취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

    京城(京城)은 비 被害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異常한 氣候이긴 했다. 올해 12月은 비 온 날이 안 온 날보다 많았다. 寫眞記者는 어디서 개나리 움트는 寫眞을 찍어왔다. 陰沈한 長安에 개나리의 때 아닌 봄빛. 寫眞은 그러한 說明을 달고 新聞의 社會面을 채웠다. 겨울비와 異常氣溫은 下旬 들어서야 겨우 주춤해졌다.

    最高 人氣歌謠 ‘落花流水’

    한림은 川邊(川邊)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개川의 水量은 겨울치고는 많은 便이다. 시린 손길들이 서둘러 빨래를 헹구어낸다. 얼음 안 언 것만도 多幸이다. 한쪽에서는 長斫불을 피워 끓는 물에 빨래를 삶아낸다. 冬至달 맨발 벗고 물 길을 때 짚신 삼아주던 媤아버지 생각난다더니, 俗談이 아니어도 冬至달은 겨울이다. 온終日 映像 氣溫을 維持하는 이런 날씨가 아마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同志를 지나면서 낮은 조금씩 길어지고 있으나 매서운 추위는 이제부터다. 陰氣(陰氣)가 極盛하다는 同志와 가장 춥다는 小寒(小寒) 사이, 오늘은 冬至달 그믐날이다.

    十一月 同志에 萬物이 未生(微生)하니 일양(一陽)李 初動(初動)이라. 겨우살이 準備에 바빠진 어머니는 이맘때 밤이면 반짇고리 뒤적이며 思親歌(思親歌) 한 대목을 부르곤 했다. 해 짧아 덧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農閑期의 아버지는 그 곁에서 새끼 꼬며 農家月令歌(農家月令歌) 가락을 흥얼대었다. 추위와 어두움은 깊고 길지만 光明과 生命은 여기서 움튼다는, 同志의 뜻을 담은 音律들이다. 時節에 곁들여 自然史와 人間事를 노래하는 이들 家事(歌詞)는 朝鮮(朝鮮) 五百年間 時調(時調)와 함께 普通 敎養人의 生活 風流였다.

    요즈음 歌詞나 時調를 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좀 敎養 있다는 兩班들도 다들 가요(歌謠)를 즐겨 한다. 身分으로서 兩班(兩班)은 이미 朝鮮朝와 함께 消滅했다. 나라도 임금도, 兩班도 상민도, 主人도 奴婢도 사라진 山河에서 다들 이 兩班아 저 兩班아, 서로를 불러댄다. 군밤타령이나 한五百年 같은 民謠는 이제 저잣거리 庶民들도 하품하고 外面한다. 지체가 높건 낮건 男女老少 할 것 없이 새로 나타난 新式 노래에 限껏 빠져들고 있다. 올해 最高의 人氣 歌謠는 斷然 落花流水(落花流水)였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勿忘草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워요

    家事는 세련되고 가락은 新鮮하며 唱法은 優雅하다. 新女性의 모던한 音色을 타고 흐르는 3節의 落花流水는 저무는 1920年代의 끝자락, 朝鮮人의 가슴에 아련한 물결을 일으키며 흘렀다. 新銳 이정숙(李貞淑)은 中央保育學校(中央保育學校)에서 音樂을 工夫한 인텔리 女性이다. 올해 日本에서 歸國해 中央保育學校 敎授로 赴任한 홍난파(洪蘭坡)를 四史(師事)했다. 中央保育學校는 後날 중앙대학교의 前身(前身)李 된다.

    落花流水라는 題目의 活動映畫가 團成社(團成社)에서 上映된 것이 2年 前. 梨花學堂을 거쳐 日本(日本) 留學을 다녀온 복혜숙(卜惠淑)李 有婦男 畫家와 悲戀에 빠져드는 妓生 役을 맡았다. 無聲映畫 落花流水는 興行에 成功했다. 落花流水가 上映 中이던 1927年 가을, 열 篇 가까운 映畫가 上映 中이거나 開封을 앞두고 있었다. 活動 中인 映畫製作社도 열 個에 達했다. 바야흐로 映畫의 時代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이런 記事가 있었다.

    朝鮮映畫製作界는 製作所의 數爻로 보아 끔찍이 繁昌해졌다. 映畫가 나타나는 數爻로 보아도 10月과 11月이 映畫 시즌이라 그런지, 繁昌의 兆朕인지는 모르겠으나 只今 程度로 보아서는 지나치게 繁昌하여가는 模樣이다. 두 달 동안 錦江키네마의 ‘落花流水’, 桂林映畫協會의 ‘먼동이 틀 때’가 開封되었다. 11月에 들어서는 朝鮮키네마의 ‘뿔 빠진 황소’가 막 조선극장에서 開封돼 上映 中이며, 곧 나운규프로덕션의 ‘잘 있거라’가 團成社에서 開封될 模樣이다. 뒤이어 考慮映畫製作所가 製作 中인 ‘혈마(血魔)’가 開封 豫定이고 그 다음에 朝鮮映畫製作소의 ‘운명’이 開封될 模樣이라 한다. 大邱(大邱)에서 만경관(萬鏡館)을 中心으로 프로덕션이 하나 일어나서 映畫를 製作 中이라 하며 平壤(平壤)에서 平壤키네마라는 것을 세워 듀마 原作의 椿姬(椿姬)를 製作 中이라 한다. 開城(開城)에서 靑年들이 모여가지고 映畫製作을 하기 始作하여 거의 撮影을 끝마치게 되었다 한다. 그 外에도 映畫製作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그 數爻를 헤아릴 수 없을 程度다.

    映畫 落花流水는 團成社와 조선극장(朝鮮劇場)의 主任 變死(辯士) 김영환이 臺本을 쓰고 監督 이구영(李龜永)의 女同生 이정숙이 主題歌를 불렀다. 映畫 落花流水의 人氣를 타고 解說集 소리판이 올해 出市되었다. 거기에 落花流水의 主題曲이 ‘강남달’이라는 曲名으로 실렸다. 콜럼비아레코드社가 製作한 이 音盤은 映畫 못지않은 人氣를 끌었다. 이 노래는 音盤으로 出市된 最初의 創作 歌謠였다. 그때까지 歌謠는 民謠를 變形하거나 日本 엔카(戀歌)를 飜案한 노래 一色이었다. 名實相符한 國産 歌謠의 時代가 막 始作되고 있었다.

    3年 前에 發表된 윤심덕(尹心悳)의 ‘社(死)의 讚美(讚美)’는 요시프 이바노비치가 作曲한 루마니아의 왈츠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歌詞를 붙인 一種의 飜案曲이었다. 그래도 ‘死의 讚美’는 最初의 가요 吹入, 그것도 聲樂家가 부르는 藝術家요 吹入이라고 해서 長安이 떠들썩했다.유부남 愛人과 玄海灘(玄海灘)에 몸을 던진 그女가 쓴 노랫말은 遺言처럼 남았고 오사카(大坂) 닛도오(日東) 레코드에서 吹入한 音盤은 10萬張이 팔려나갔다. 그해 1926年의 京城(京城) 人口가 30萬名 線이었다. 日本人과 其他 外國人을 뺀 京城 居住 朝鮮人은 約 20萬名이었다.

    빅터레코드社가 名唱 李東伯(李東伯)의 판소리를 吹入해 처음으로 소리판을 發賣한 地圖 20年이 넘었다. 이제 소리와 窓가, 名唱과 歌手는 少數의 專有物이 될 수 없었다. 소리판 或은 레코드, 留聲機 或은 蓄音機의 普及이 늘어가면서 사람들은 身分 高下에 關係없이 모든 種類의 音樂을 共有하고 享有하기 始作했다. 그中에서도 歌謠의 人氣는 눈에 띄게 높아갔다. 妓生집에서 소리판을 트는 것은 基本이 되었다. 妓生이 굳이 노래를 불러주지 않아도 더 멋진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蓄音機와 音盤을 갖춘 茶房과 카페도 따라서 늘어갔다.

    歌謠의 擴散에 불을 지핀 것은 라디오였다. 2年 前 1927年에 呼出符號 JODK 鮮明하게 새긴 京城放送局이 貞洞(貞洞) 언덕에 設立되고 라디오 放送이 開始되었다. 레코드와 蓄音機가 神奇하게 보인 것도 暫時,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電波를 타고 노래가 흘러나온다. 名唱 歌客을 對面하지 않고도 노래를 들을 수 있는 蓄音機 世上이 열렸다 했더니, 蓄音機 없이도 노래를 들을 수 있는 世上이 잇달아 到來했다. 每日같이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고 있다. 戰車와 汽車 그리고 自轉車와 自動車를 보고 衝擊을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半世紀 前의 일이다. 그 모든 것은 西洋에서 日本을 거쳐 들어오고 있다. 音盤業體의 後援을 받는 妓生들이 放送에 出演해 노래를 부르면서 商品性을 인정받기 始作했다. 大型 商店들은 저마다 高級 라디오를 入口에 틀어놓고 손님을 끌고 있다. 沐浴湯과 食堂, 그리고 술집도 早晩間 그 뒤를 이을 품새를 보이고 있다. 京釜線 列車에도 라디오가 設置되었다. 聽取料 2원은 너무 비싸다고 말들이 많아 1원으로 내렸다.

    京城에 自轉車 1萬臺

    冬至날 밤바람에 설취한 술도 다 깨어버렸다. 어젯 밤 淸進洞(淸進洞) 술집을 나서면서 한림은 염상섭(廉想涉)에게서 들었던 句節을 떠올렸다. 세 살 위의 廉想涉은 한때 한림의 新聞社 同僚였다. 다른 新聞社에 勤務하는 只今도 자주 어울린다. 그의 助言에 따라 한림은 退勤 後나 出勤 前 틈틈이 小說을 써보고 있다. 鍾路通의 戰車(電車) 길을 건널 때는 正말이지 方今까지 마신 술이 깨는 氣分이었다. 날씨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올해 들면서부터 생긴 現象이다. 이番 달은 職員들의 술자리가 많았다. 年末이라고 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異常한 해다.

    술자리가 興이 나지 않으니 宿醉가 생길 일은 없다. 개울 건너便에 視線이 머문다. 欄干 없는 築臺 위에 두 돌은 되었을까 싶은 아기가 코를 흘리고 앉아 있다. 손톱길이만하게 솟아오른 머리카락은 밤톨만큼씩 두어 군데가 뭉텅 빠져나갔다. 제 어미가 있는 듯 개川 쪽을 바라보며 혼자 노는 아이 뒤로 自轉車가 지나간다. 바람결에 흙먼지가 일어난다. 京城에는 벌써 自轉車가 1萬臺 가까이로 늘었다. 댕기머리를 허리까지 내린 예닐곱 살 少女가 빨래 광주리를 이고 한손으론 치맛단을 걷어 올린 채 돌階段을 디뎌 흙길로 올라선다. 築臺는 한림처럼 구두에 洋服 차림이 훌쩍 뛰어내려도 큰 無理 없이 着地할 듯싶은 높이다. 正方形과 長方形의 돌을 쌓아 올린 築臺는 개川敷地와 川邊 길을 나누고 있다. 築臺는 漢陽(漢陽)을 둘러싸고 四大門과 師大 山을 잇고 있는 初期 都城의 城郭 壁과 닮은 느낌으로 築造되어 있다. 1763年 英祖(英祖) 時節에 쌓은 石築(石築)의 原形이 많이 간직되어 있다.

    이곳 서린동은 仁王山(仁王山)에서 흘러내리는 백운동천(白雲洞川)과 北岳山 溪谷으로부터 發源하는 三淸洞千(三淸洞川)이 合流하는 地點이다. 이 川邊 길을 밟은 지도 벌써 十年. 1920年 봄 新聞社에 記者로 入社해 每日처럼 이 周邊을 지나는 동안 한림은 二十代 靑年에서 三十代의 成年이 되었다. 하루를 보내는 氣分으로 一週日이 갔고, 한 週를 보내는 느낌으로 달을 보냈다. 그렇게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지나 어느새 1920年代가 저물고 있다. 조금 後면 夕刊新聞이 거리에 깔릴 것이다. 오늘 夕刊은 消化(昭和) 4年 12月31日子로 날짜가 박혀 있다. 短期(檀紀)도 아니고 書記(西紀)도 아닌 日本 年號(年號)다. 날짜 앞에 무엇이 붙건 朝鮮人들이 보는 朝鮮人의 新聞이다. 이곳이 京城(京城)이건 漢城(漢城)이건 서울이건 때는 年末이고 오늘 新聞은 送年號다. 내리누르는 듯한 흐린 하늘을 보며 新聞社로 出勤했는데 한두 방울 물氣가 떨어지기 始作한다. 아직도 濕氣가 남았는가. 歲밑 京城에 부슬비가 내린다. 1929年 12月30日이었다.

    都城 壓倒하는 總督府 建物

    발길을 서둘러 毛廛橋(毛廛橋)를 건넌다. 南쪽 길모퉁이는 土産 과일을 파는 가게, 毛廛(毛廛)이 있던 곳이다. 개川 너머 光景은 南쪽과 北쪽이 사뭇 다르다. 北쪽 鍾路通(鍾路通)과 그 너머로 櫛比한 기와집, 그리고 大闕, 그 左右로 펼쳐지는 風光은 仁王(仁王)에서 北岳(北岳) 그리고 鷹峯(鷹峰)을 거쳐 駱駝(駱駝)에 이르는 山勢의 품에 고요히 안겨 있다. 3年 前 가을 景福宮(景福宮) 안에 完工된 朝鮮總督府 新廳舍는 等 뒤로 宮闕을 막아서고 正面으로 都城 全體를 굽어보는 模樣새로 頑强히 버티고 서있다. 하지만 大理石과 花崗巖의 그 巨大한 르네상스式 骨格도 仁王의 巖山(岩山)을 약화시키지 못하고, 肉重하고 强烈한 氣勢로 치솟은 鐵製 돔과 尖塔도 백악(白岳)의 頂수리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國破山河在(國破山河在). 3年 前 여름 純宗(純宗)이 昌德宮(昌德宮)에서 숨짐으로써 朝鮮王朝는 名實 共히 끝을 맺었다. 10年 工事 끝에 모습을 드러낸 朝鮮總督府廳舍는 그 模樣과 體軀에서 朝鮮의 都城(都城)을 壓倒했다. 朝鮮人은 敬畏感과 侮蔑感을 同時에 받는 듯하였다. 하지만 傳統의 建物이 幽閉되고 쓸려나간 자리에 어떤 人工 構造物이 들어서건 傘下(山河)는 如前히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한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杜甫(杜甫)의 詩 춘網(春望)의 한 小節을 떠올린다.

    나라는 亡하여도 山河는 그대로이고

    城 안에 봄이 오니 草木이 茂盛하다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30年 前後 朝鮮總督府 建物.

    3年 前 朝鮮總督府 落成式이 열리기 몇 달 前 李相花(李相和)는, 只今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始作하는 詩를 發表했다. 順從의 國葬(國葬)을 앞둔 1926年 6月이었다. 그의 詩는, 그러나 只今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로 끝맺고 있다. 한림은 그 詩에 새겨진 鬱憤과 抵抗感을 잘 理解한다. 그런데 어느 쪽이냐 굳이 말하라면 杜甫의 心情에 더 끌린다. 微妙한 差異이긴 하지만, 感情을 보다 억누르는 그 悲壯한 貞操에 더 共感이 가는 便이다. 事大主義라 해도 어쩔 수 없다.

    中華(中華)에 對한 崇慕(崇慕)는 그것이 眞心이었건 虛飾이었건 甲午 다음해인 1895年 淸日戰爭(淸日戰爭)의 從前과 함께 終焉을 告했다. 日本軍은 그해 淸國軍을 擊破해 朝鮮에서 몰아내고 朝鮮 晋州(進駐)를 旣定事實化했다. 그리고 戰爭의 勝戰物로 넘겨받은 臺灣(臺灣)을 最初의 海外 植民地로 삼아 臺灣總督府를 設置했다. 五百年間 中國의 使臣을 迎接해온 朝鮮의 慕華館(慕華館)은 그 뒤 獨立館(獨立館)으로 名稱을 바꾸었다. 慕華館 入口의 迎恩門(迎恩門)은 撤去되고 그 자리에 獨立門(獨立門)이 세워졌다. 王室의 後援을 받는 서재필(徐載弼)과 이완용(李完用)의 獨立協會가 推進한 일이다. 日本軍은 調整 宮闕과 獨立門을 두루 내려다보는 南山 北斜面에 淸日戰爭 戰勝記念塔을 세웠다. 日本은 倂合 以來 朝鮮 傳來의 많은 建築物을 없애거나 치워버리면서도 獨立門은 손대지 않았다. 獨立은 中國으로부터의 獨立이고, 그 獨立을 이뤄준 것은 日本이라는 생각인 것 같았다.

    한림은 같은 또래인 李相和를 현진건(玄鎭健)의 紹介로 만난 적이 있다. 현진건과 李相和는 文學同人誌 ‘백조(白潮)’의 創刊同人이었다. 여러 新聞社에 勤務한 玄鎭健은 同甲인 翰林과 於焉 十年知己 同業者 關係가 되었다. 7年 前 創刊된 白鳥의 發行人은 배재고보 校長 아펜젤러 2歲였다. 最初의 近代的 敎育機關인 배재學堂을 1885年에 設立하고 2年 뒤 學校 옆에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最初의 監理敎 宣敎師 헨리 아펜젤러의 아들이다.

    배재學堂 地下室에는 三門(三文)出版社라고 하는 監理敎 宣敎部 出版社가 있었다. 國文 漢文 英文 活字를 갖춘 이곳에서 美國市民權者인 徐載弼은 1896年부터 王室의 後援金을 받아 獨立新聞을 印刷했다. 두 해 뒤 徐載弼의 指導를 받은 李承晩(李承晩)李 배재學堂 學生會 幹部 資格으로 製作한 協成會 會報(協成會 會報)라는 이름의 週刊新聞度 여기서 印刷되었다. 太宗(太宗)의 長男이고 世宗(世宗)의 兄인 讓寧大君(讓寧大君)의 16代孫인 李承晩은 1894 甲午年에 배재學堂에 入學했다. 배재學堂에서 週 1回 講義를 맡은 徐載弼은 西歐式의 民主的 會議運營方式을 가르치기 위해 協成會란 이름의 學生自治組織을 만들었다. 協成會는 土曜日마다 一般人까지 參席하는 討論會를 貞洞 監理敎會에서 열었다. 이곳은 靑年 李承晩의 政治的 搖籃이 되었다. 白鳥 2號에 同人 박종화(朴鍾和)는 1922年 白鳥 創刊 當時의 時代 雰圍氣와 文段 風土를 이렇게 表現했다.

    이때의 文學의 主潮가 浪漫과 象徵, 그리고 테카黨에 흐르게 된 것은 政治的으로 壓迫을 받는 環境 속에 있고, 또한 3·1運動을 치른 뒤에 오는 絶望的인 길로 우리의 젊은 文人을 끌고 들어가게 만들었으니 모두 다 限이요 哀愁요 自暴自棄요 유미探究뿐인 것이다.



    白鳥에 실린 詩들은 그 題目만으로도 厭世, 虛無, 頹廢의 뜻을 담은 朴鍾和의 데카당(decadence)이란 말을 뒷받침한다. 朴鍾和의 詩는 ‘密室로 돌아가다’ ‘흑방(黑房)의 祕曲(秘曲)’ 留意 題目을 달고 있다. 홍사용(洪思容)은 ‘나는 王이로소이다’, 박영희(朴英熙)는 ‘꿈의 나라로’, 李相和는 ‘나의 寢室로’. 金基鎭(金基鎭)의 詩만이 多少 決然한 느낌의 ‘한 갈래의 길’ 그리고 ‘한 갈래의 불빛’ 이라는 題目을 달고 있다.

    李相和는 1922年 파리에 留學할 생각으로 東京(東京)에 가서 프랑스文學을 工夫하던 中 다음해 憧憬大地震이 일어나자 京城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상화는 1925年 8月에 金基鎭과 함께 카프의 創立會員이 되었다. 朝鮮總督府의 機關紙 格인 每日申報(每日申報)의 記者로 있으면서 社會主義的 文學活動을 標榜한 八峯(八峯) 金基鎭은 以後 다른 新聞社들로 옮겨가며 繼續 일하고 있다.

    카프에 앞서 그해 4月 朝鮮共産黨(朝鮮共産黨)李 創立되었다. 朝鮮共産黨 創建의 主役인 박헌영(朴憲永)은 한 달 뒤 勤務하던 新聞社를 떠났다. 入社한 지 1年 남짓 되었는데 그동안 한림이 會社 안에서 박헌영을 본 것은 가끔이었다. 박헌영이 新聞社에 들어온 것은 1924年 4月15日이다. 31年 뒤 美國의 諜者라는 罪目으로 그를 死刑시키게 되는 金日成(金日成)李 金聖柱(金成柱)라는 이름으로 鴨綠江 以北 땅에서 萬 12살 生日을 맞은 날이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쥐띠로 띠 同甲이다.

    翰林과 同甲인 박헌영은 처음 販賣部의 書記 職責으로 入社했기 때문에 編輯局의 翰林과 마주칠 일이 別로 없었다. 12月 地方部 記者로 發令받고서 6個月쯤 더 勤務하는 동안에도 박헌영은 新聞 일보다는 다른 일에 더 바빠 보였다. 地方의 社會主義 演說會에 내려가 演說하곤 했다. 그는 1921年부터 責任祕書로 活動해온 考慮共産靑年會의 組織 事業과 그 機關紙 發刊 일에 분주했다. 新聞社의 社長 職務代理를 맡고 있던 辯護士 허헌(許憲)李 就職을 周旋해준 것이라는 所聞이 있었다. 허헌은 左右合作의 合法的 獨立運動團體로 1927年 出帆한 新幹會(新幹會)의 中央執行委員長을 맡았다. 그는 後날 김일성대學校 總長이 된다.

    南村과 北村 文化 差異

    淸溪川 北쪽에 새로 總督府가 들어선 것보다 더 큰 變化가 개川 以南에서 벌어지고 있다. 都城을 兩分하는 개川을 境界로 宮闕과 宗廟 社稷, 主要 官廳과 支配層의 住居地가 以北에 들어서고, 以南은 重下層民 生活空間 爲主로 編成되어온 五百年의 空間配置는 깨어졌다. 市勢(時勢)는 宛然히 淸溪川의 南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이 짧게는 지난 10年 길게는 20年間의 變化다. 北岳 아래 皇帝의 宮闕은 木覓山(木覓山·南山) 기슭 北斜面에서 내려다보아온 總督府와 憲兵司令部에 依해 掌握되고 解體된 지 오래다. 그 背後에는 南山 南쪽에서부터 漢江에 이르기까지 등을 돌리고 앉은 朝鮮駐屯軍司令部가 있다.

    1910年 庚戌(庚戌)年의 倂合 以來 日本帝國의 입김은 南山 기슭으로부터 내려와 本情(本町)과 황금정(黃金町) 거리를 形成하면서 차츰 北上하였다. 南村이 權勢와 財物 모든 面에서 北村을 壓倒하기에 이르렀다. 亡國 20年, 漢城은 이름과 함께 風景도 바뀌었다. 이제는 千南(川南)李 천북(川北)을 凌駕하는 모습이 되었다. 100곳을 넘어선 株式會社는 主로 황금정과 本情, 南大門通, 그리고 龍山(龍山) 一帶 漢江桶(漢江通)에 密集해 있다. 南村은 南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南山을 넘어 漢江邊까지 擴大되었다.

    한림은 무矯正(武橋町)을 따라 南側 川邊 길을 걸어 다옥정(茶玉町)을 지난다. 川邊 길가로 藥房과 病院, 물감집이 줄지어 있다. 이곳의 元來 이름은 다棟(茶洞)이었다. 1914年의 區劃劃定으로 朝鮮 傳來의 洞 이름은 折半 以上이 바뀌었다. 그때부터 洞(洞)과 鄭(町)李 北村과 南村으로 나뉘어 婚材하고 있다. 張差 1936年이 되면 全國의 모든 動(洞)과 리(里)는 情(町)으로 統一된다. 朝鮮 朝廷에는 茶道(茶道)와 次例(茶禮)를 主管하는 司饔院(司饔院)이 있었는데, 司饔院에 屬한 다방(茶房)李 이곳 다棟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茶房골이라 부른다. 그 茶房은 이름만 남기고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 代身 新式 茶房이 이곳저곳 들어서는 中이다. 多占(茶店) 或은 喫茶店(喫茶店)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流行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

    開港에서 倂合까지 35年을 거치는 동안 커피는 이미 朝鮮人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쓴맛 나는 西洋 湯藥, 잠을 쫓고 기운도 내는 量탕(洋湯)으로 불린 것도 옛말이다. 高宗(高宗)은 일찍이 러시아公使館(公使館)에 避해 있던 時節 커피에 入門하여 慶運宮(慶運宮)으로 옮긴 뒤에도 樂으로 삼았다 한다. 1902年 貞洞(貞洞)에 2層 灰色 甓돌로 세워진 손탁호텔의 1層 食堂 옆 茶室에서 高官들과 開化人士들은 일찍이 커피를 맛보았다. 朝鮮總督府 鐵道호텔이 門을 연 1914年 가을부터 朝鮮의 有名 人士들은 장곡천情(長谷川町)으로 몰려들었다. 鐵道호텔 或은 조선호텔 커피숍은 그때나 以後 只今까지 장안 最高의 名所다.

    皇帝가 하늘에 祭祀를 지내는 圜丘壇(?丘壇)을 헐고 獨逸風의 이 3層 호텔이 지어졌다. 高宗이 大韓帝國을 宣布하던 날 天神(天神)께 이를 告하고 王國의 命運이 길이 이어지기를 祈願하던 곳이다. 太宗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집터가 있었다 해서 작은공주골 或은 소공동(小公洞)으로 불려온 朝鮮호텔 周邊 마을은 이제 장곡천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러일戰爭 때 朝鮮駐屯軍司令官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살던 洞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세가와는 러일戰爭 勝利의 氣勢를 몰아 ‘乙巳條約’ 締結 때 兵力을 動員하여 코앞의 慶運宮을 包圍하고 恐怖 雰圍氣를 造成했다.

    혼마치(本町) 一帶를 中心으로 1920年代 初부터 日本人들이 세운 茶房은 南村 곳곳으로 擴散되었다. 그 流行은 朝鮮人 茶房으로 이어졌다. 1927年 映畫監督 이경손(李慶孫)李 관훈동(寬勳洞) 入口에 카카듀, 1年 뒤 昨年에는 俳優 복혜숙이 鍾路 2正목에 비너스를 開業했다. 요즘 第一 人氣 있는 茶房은 지난달 鍾路2正목에 開業한 멕시코다. 그 茶房이 開業한 11月3日에 全羅南道 光州에서는 學生들이 示威를 벌였다. 그 餘波가 只今 京城에 날로 擴散 中이다. 이제 커피는 特定 階層의 專有物이 아니다. 호텔 커피숍과 다방에서만 마시는 것도 아니다. 只今 朝鮮銀行(朝鮮銀行) 廣場 噴水臺 앞 本情 1正목에 建物이 올라가고 있는 미쓰코시(三越) 百貨店이 完工되는 來年이면 百貨店 안에 커피숍이 생길 것이라고 한다. 屋上에 노천카페가 들어선다는 所聞도 있다. ‘커피 끓이는 法’이라는 題目의 新聞記事가 2年 前에 있었다.

    가을도 다 되었고 겨울이 옵니다. 커피車 愛用의 季節입니다. 各 家庭에서는 커피車가 맛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여 主婦 되는 분들이 짜증을 내는 例가 많습니다. 커피도 카모, 자바 或은 하와이 等으로 種類가 많습니다. 이것이 더 맛날까 저것이 더 맛날까 하여 各 種類를 다 사들여서 만들어도 神通하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取扱 方法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커피라도 참맛이 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커피의 長點은 그 豐富하고 潤澤한 香氣에 있습니다. 한番 넣은 커피에 물을 갈아 넣어가면서 여러 番 우려먹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番番이 커피를 갈아 넣어야 합니다. 番番이 冷水를 새로 끓여서 써야 합니다. 牛乳를 넣어 먹는 境遇에는 반드시 더운 것을 넣어야 합니다. 最近에는 크림을 使用하는 것이 流行입니다. 獨特한 맛이 있어서 모두 좋아하게 됩니다. 美國에서는 블랙커피라 하여 밀크나 크림을 안 넣고 먹는 것이 流行하게 되어 各 나라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애프터 디너 커피라고 하여 모카커피만을 使用합니다. 커피는 興奮性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週刊 活動 詩에 使用하면 腦와 心臟의 作用을 强하게 하고 血液의 循環을 良好하게 하는 特效가 있습니다.

    다동이 다옥정으로 變했어도 다방골 사람들의 自負心은 如前하다. 여기서부터 광통교(廣通橋)를 지나 장통교(長通橋)를 넘어 水標橋(水標橋)에 이르는 개川 南쪽은 中村(中村)이라 불려온 地域이다. 北村처럼 벼슬아치 마을은 아니지만 南村과는 또 다른 雰圍氣다. 中村에는 專門技術을 保有한 中級 官吏나 市廛商人 같은 中인(中人)들이 모여 살았다. 알富者度 많다고들 한다. 저기 박태원(朴泰遠)의 집이 보인다. 물감 집을 끼고 앉은 藥局과 病院이 있는데, 朴泰遠의 父親은 藥局을 經營하고 叔父는 病院을 經營한다. 典型的인 서울 土박이 中인 집안이다. 朴泰遠은 올해 京城第一高普(京城第一高普)를 卒業하고 留學 가서 東京法政大學 豫科 1學年이다. 工夫가 재미없었는지 短篇小說 비슷한 글을 한 篇 보내와 新聞에 8日間 連載했다. 지난週에 마지막 回가 끝났다. 朴泰遠은 다음해 豫科 2學年을 中退하고 歸國해 文學에 專念하게 된다. 그는 留學 가기 前에 이광수(李光洙)로부터 小說 指導를 받았다. 朴泰遠의 글이 실린 新聞에는 李光洙의 長篇小說이 새해부터 連載된다는 알림記事가 났다. 揷畵는 山水畫家 이상범(李象範)李 그린다고 한다. 이상범은 올해 朝鮮美術展覽會에서 最高賞을 받았다. 賞 이름은 昌德宮賞이었다.

    다옥정이 끝나가는 길목, 광통교를 앞두고 카페가 보인다. 단골 文人 記者들과 가끔 들르는 집이다. 女給 하나코(花子)가 門을 열고 나온다. 우미관(優美館)에 가는 길인가. 광통교 건너 관철동(貫鐵洞)은 하나코의 낮 나들이 코스다. 그中에서도 우미관은 그女 生活의 가장 큰 樂이다. 그女는 4年 동안 이 2層 甓돌집에서 찰리 채플린의 ‘黃金狂時代’로부터 ‘파우스트’까지 龜尾의 名作 無聲映畫를 거의 빼놓지 않고 보았다. 요즘은 소리 나는 活動寫眞, 發聲映畫가 나와 그 재미가 끝간 데를 모른다.

    劇場은 언제나 滿員이었다. 1000名 程度가 앉을 수 있게 놓인 기다란 나무椅子, 이른바 胡떡집 걸床은 빈자리가 없는 날이 많다. 客席은 바로 옆에 붙은 便所에서 지린내가 풍겨오지만, 便所 바로 앞자리도 비는 적이 別로 없다. 別달리 놀 만한 곳이 없는 朝鮮人에게 映畫觀覽은 最大의 놀이가 되었다. 仁寺洞(仁寺洞)에 最新 3層 甓돌建物로 지은 朝鮮劇場(朝鮮劇場)은 便所가 複道 건너에 있어 事情이 훨씬 나았다. 우미관은 收益이 워낙 좋아 올해부터는 收益金 一部를 職員들에게 나눠줄 程度가 되었다. 東洋映畫會社의 劇作家 이서구(李瑞求)는 이달 初 新聞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翰林과 같이 1920年에 記者生活을 始作한 十年知己다. 新聞社를 두 番 옮기더니 올해 記者職을 접고 劇作家의 길을 가고 있다. 한림처럼 한 곳에 10年을 머무르는 記者는 別로 없다.

    暴發的 人氣 누리는 映畫館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創作舞踊劇 ‘京城1930’의 한 場面.

    몇 해 前만 하더라도 活動寫眞 常設館 數爻보다 配給業者의 數爻가 적었는지라 常設館에서는 配給業者에게 가서 叩頭百拜(叩頭百拜)를 하고 活動寫眞을 빌어다가 손님에게 구경을 시켰었다. 그러나 朝鮮이 어수룩하다는 所聞이 높아지자 그야말로 世界 各國의 有名한 活動寫眞會社에서는 거의 다 支社나 代理店을 두게 되니 이제는 常設館 數爻보다 配給業者의 數爻가 超過되어 버렸다.

    京城에 映畫館은 10個 가까이 된다. 劇場마다 競爭이 熾烈하게 붙어 樂隊와 自動車를 動員한 街頭廣告가 벌어지곤 한다. 南村으로 내려가면 本情통의 황금좌(黃金座)나 喜樂館(喜樂館), 甇訂正(櫻井町)의 臺鼎冠(大正館) 같은 日本 劇場이 많다. 完璧한 室內裝飾과 衛生施設을 자랑하는 臺定款은 便所가 아닌 제대로 된 化粧室은 勿論, 茶房과 吸煙室을 갖추고 있다. 우미관에는 너도나도 담배를 피워 물氣 때문에 中學生들까지도 어둠 속에서 슬쩍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그래도 하나코는 가까운 우미관을 찾는다. 그前에는 南村에 櫛比한 日本人 劇場을 다녔었다. 명치정(明治町)의 日本인 바에서 女給으로 일할 때였다. 가장 즐겨 찾은 곳이 가까운 중앙관(中央館)이었다. 단골인 龍山 朝鮮軍司令部의 將校를 따라 漢江通의 警龍館(京龍館)에도 더러 갔었다. 갈 때마다 놀라고 不便한 것은 자리案內人이었다. 에이프런을 두른 퉁명스러운 案內人은 方席을 팔려고 成火를 부린다. 늦가을부터 初봄까지는 火爐도 안긴다. 안 빌려도 그만이지만 方席 없이는 椅子가 딱딱하다. 딱딱거리는 待接 받기는 더욱 싫다. 먼 後날 日本人이 朝鮮을 떠난 後 한참 뒤에 중앙관은 中央劇場으로, 警龍官은 城南劇場으로 바뀌게 된다.

    어수선하고 지저분할지언정 우미관은 그런 面에서 不便이 덜하다. 朝鮮人 區域으로 카페를 옮기고 朝鮮人 단골손님을 따라와 본 뒤로 익숙해져 別 不便을 못 느낀다. 劇場에서 朝鮮人과 日本人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無聲映畫에서 主導的인 役割을 하는 變死(辯士)가 南村 地域에서는 日本人이고 北村에서는 朝鮮人이다보니 觀客들이 갈려져왔다. 이제는 日本말과 朝鮮말을 다 驅使하는 朝鮮人과 日本人이 늘어나고 있어 區分은 漸漸 意味를 잃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南北’李 統一될 것이다. 더구나 無聲映畫는 有聲映畫에 急速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綜合藝術人 待接을 받으며 長安의 名士로 君臨해온 變死는 어느새 斜陽길로 접어들고 있다.

    카페, 日常의 解放空間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20年代 新聞에 실린 라지 自轉車 廣告.

    카페는 이제 蓄音機, 라디오, 映畫와 더불어 生活 風俗의 하나로 追加되었다. 茶房에서는 車를 팔지만 술도 판다. 바(Bar)도 그러하다. 카페는 술이 于先이고 車는 뒷전이다. 카페의 兩大 要素는 술, 그리고 술을 마시게 만드는 雰圍氣다. 雰圍氣를 造成하는 두 主役은 音樂과 女人이다. 蓄音機를 타고 나오는 西歐의 最新 音樂, 朝鮮의 傳統衣裳에서 벗어나온 웨이트리스. 카페는 陋醜한 日常에서 解放의 空間이다.

    카페에 具備된 술의 種類는 豐盛하다. 위스키와 칵테일, 그리고 日本株, 朝鮮 淸州. 아카다마(赤玉) 葡萄酒도 具色을 맞추고 있다. 租稅(租稅) 全體에서 주세(酒稅)가 차지하는 比重은 1909年 1.4%이던 것이 1919年 8.2%로 크게 늘었다. 다시 10年 만인 1929年에는 28.7%가 되었다. 술 製造에 稅金을 매기는 酒稅法이 公布된 1909年에 20萬원 線이던 酒稅 總額은 1926年에 100萬원을 넘어섰다. 술은 地勢(地稅)를 追越하고 租稅 比重 1位로 올라섰다. 요 10年 사이 생겨난 製造業體 中에 釀造業體 數가 1位다. 酒類 生産額은 全體 工産物 生産額의 15%에 이르렀다. 술은 1920年代의 朝鮮 經濟를 循環시키는 血液과도 같이 보였다.

    免許를 받은 釀造場만이 술을 鑄造하도록 한 酒稅令이 施行된 1916年에 50萬石(石)에 못 미치던 濁酒(濁酒) 生産量은 이미 1920年에 100萬石을 突破했다. 燒酒(燒酒)는 1916年 8萬石 規模였다가 1925年에 20萬石을 突破했다. 1926年을 起點으로 濁酒의 增加勢가 꺾이는 反面 日本술은 釀造와 輸入 모두 늘어 每年 10%씩 持續的인 增加勢를 보이고 있다. 燒酒도 朝鮮 燒酒는 濁酒와 마찬가지로 차츰 氣勢가 꺾여드는데 日本 燒酒는 늘고 있다.

    朝鮮의 飮酒量은 해마다 增加하는 同時에 一般의 記號聖徒 漸次 向上하여 濁酒보다 藥酒로, 藥酒보다 一周와 麥酒로 所謂 文化生活을 하여가는 盤面으로 在來 朝鮮품은 漸漸 衰退하여가는 傾向이 있다.

    1929年 1月 말의 記事다. 大單位 燒酒 製造社인 大選(大鮮)釀造株式會社가 올해 大日本酒類(大日本酒類)株式會社의 釜山(釜山)工場으로 세워졌다. 미쓰이(三井)物産이 委託 販賣한다. 平南 龍岡에서 5年 前에 門을 연 鎭川(眞泉)釀造會社는 小規模임에도 進路(眞露)라는 商標의 國産 燒酒를 내세우고 日本 巨大資本들 사이에서 꾸준히 成長하고 있다.

    1919年 3月1日의 萬歲運動 以來로 朝鮮社會에는 많은 種類의 運動이 있었다. 社會運動 勞動運動 藝術運動 少年運動 文盲退治運動 物産奬勵運動…. 이제 禁酒運動이 그 班列에 올라 있다. 美國에서는 10年째 禁酒法(禁酒法)이 施行되고 있다. 第1次 世界大戰 以後 食糧을 節約하고 作業能率을 向上한다는 趣旨였다. 재즈의 時代, 激動의 20年代, 별난 1920年代. 다양한 名稱으로 불리는 이 時期는 禁酒法으로 인하여 無法의 10年이라는 이름이 또 하나 追加되었다. 이 特徵的인 十年을 접는 段階에서 美國은 大恐慌을 맞았다. 두 달 前 뉴욕 株式去來所의 株價는 大暴落했다. 日本과 朝鮮의 株式市場도 그 影響을 받았다. 地球村 時代다. 酒類의 製造 販賣 運搬 및 輸出을 못하게 하는 禁酒法은 월스트리트의 崩壞와 더불어 事實上 消滅했다. 大恐慌의 始作과 함께 술은 陰地에서 기어 나와 美國人의 日常으로 堂堂히 復歸했다. 술의 벗은 亦是 恐怖와 不安이다.

    玄鎭健의 小說 題目대로 朝鮮은 술 勸하는 社會임이 분명했다. 玄鎭健은 일찍이 1921年에 그렇게 診斷했다. 小說에서 主人公은 새벽 2時에 漫醉하여 歸家한다. 누가 이렇게 술을 勸했느냐 안타까워하는 夫人에게 그는 말한다. 朝鮮社會가 술을 勸한다. 1921年 文壇에 登壇하고 新聞社와 雜誌社에 記者로 就職해 失業者는 아니었지만 玄鎭健은 많은 술을 마셨다.

    술에 依支해 사는 사람이 많았다. 知識人이라는 사람들이 그 한 部類였다. 마땅히 할 일도 갈 곳도 없는 이 새로운 階層은 浮浪者(浮浪者)라 불리는 온갖 種類의 건들거리는 有閑階級(有閑階級)들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고 카페를 出入했다. 요즘 所謂 知識人은 朝鮮 歷史上 처음 나타나는 새로운 階層이다. 士大夫도 아니고 선비와 또 다르다. 벼슬은 勿論 없고 건사할 農土나 事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듣고 본 新知識은 그런대로 넘쳐나나 그것을 풀어낼 자리는 없다. 就業이 안 되니 職場이 없고 돈이 없다. 있는 것은 時間이다. 그 넘치는 時間에 空想과 所望과 不滿과 憤怒를 담아 보낸다. 그 結果로 每日 남아나는 것은 絶望과 悔恨이다. 그렇게 비 被害 처마 밑으로 모여드는 제비들처럼 植民地 朝鮮의 인텔리들은 없는 돈에 카페를 避難處로 삼았다. 茶房이 낮의 休憩所라면 카페는 밤의 慰安所다. 커피 한 盞 시켜놓고 茶房에 우두커니 半나절을 버티고 앉은 者를 壁畫(壁畵)라고 부르는 新造語가 생겨났다. 知識人에 對한 印象을 말하라면 사람들은 어느새 無氣力, 懶怠, 窮乏, 그리고 進退維谷(進退維谷)이라는 單語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20年代 ‘카페’를 描寫한 當時 동아일보 連載小說 揷畵.

    大學을 卒業하고 日本에서 留學하고 돌아오는 靑春은 해가 갈수록 늘어간다. 그러나 이들을 받아줄 곳은 不足하다. 總督府와 傘下機關의 朝鮮人 數는 制限되어 있고 그럴듯한 會社는 日本人 爲主로 構成돼 있다. 그 틈서리에 요행히 들어앉아 한 자리 차지하는 朝鮮人은 몇 안 된다. 新聞社는 3月이 다가오면 于先 두 가지 記事와 論說을 準備한다. 3·1萬歲運動 몇 周年이라는 點을 檢閱을 通過할 수 있게끔 要領껏 알리는 것이 그 하나고, 大學 卒業生들의 就業難에 對한 對策 없는 걱정이 또 하나다. 論說半(論說班)은 올해도 例年과 비슷한 社說을 써냈다.

    이番 봄에는 專門學校 以上의 卒業生이 內外를 통 털어 300餘 名에 達하리라 한다. 眞實한 일꾼 뛰어난 靑年을 緊急히 要求하여야할 오늘의 朝鮮에서는 三百의 卒業生이 오히려 不足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事實로 말하면 最近 몇 年間 問題가 되어오는 것은 不過 몇 百 名 되는 專門卒業生을 어떻게 處置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職業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問題이다. 얼마나 큰 矛盾된 現象이냐. 2000萬 名이 活動하는 朝鮮社會에서 몇 百 名의 新進을 受容할 수 없다는 것은 首肯할 수 없는 怪常한 일이다.

    한림은 十年 前 麥酒라고 하는 怪常한 液體를 처음 입에 댄 瞬間, 西洋式 보리 濁酒구나, 생각했다. 단골 카페에서는 삿포로麥酒가 人氣다. 삿포로麥酒는 植民地 朝鮮에서 기린맥주와 死活을 건 販促戰을 벌이고 있다.

    하나코의 故鄕은 삿포로에 있다. 하나코가 일을 罷하는 時間은 새벽 1時나 2時는 基本이다. 손님이 있으면 3時까지 갈 때도 있다. 그래도 여긴 藥果다. 우미관 入口 鍾路 2正木에서 일할 때는 새벽 4時까지도 손님들이 북적댔다. 本情(本町)과 명치정(明治町)의 日本人 카페들은 1時면 끝내고 손님을 받지 않는다. 밤새워 노는 이른바 ‘午前族(午前族)’들은 本情 쪽에서 이리로 遠征을 오기도 한다. 女給 20~30名을 두고 있는 그 카페에는 日本人 女給과 朝鮮人 女給이 고루 있다. 기모노 차림에 日本 이름에 日本말을 쓴다고 다 日本女人은 아니다. 푸르고 붉은 燈불 아래 暴發的인 재즈가 소용돌이치는 카페는 鍾路 一帶에만도 여러 곳이 생겨났다. 南村 一帶에는 數十 군데나 된다. 女給은 數百 名인데 빠르게 늘고 있다.

    치우고 淸掃하고 나면 네다섯 時가 거의 되어야 자리에 눕게 된다. 곧 잠이 들지도 않는다. 興奮되었던 神經科 흩어진 마음자리가 가라앉지 않아 이불 속에서 뒤척대는 때가 많다. 쓸쓸한 잠자리에 외로운 꿈을 깨고 새벽을 맞을 때면 구름처럼 가슴에 떠오른 말 못할 歎息은 남이 곧이듣지 않을 설움이다. 한림의 紹介를 받은 記者가 하나코의 얘기를 듣고 쓴 異色 職業女性에 關한 記事에는 하나코의 말이 그렇게 表現되어 나왔다. ‘웨이트레스’或은 ‘女給’으로 불리는 이 職業을 부러워한다는 女子들도 있다지만 이 같은 苦生이 없다. 여기서 먹고 자는 것뿐, 月給은 없고 손님들이 주는 팁을 모아 每月 30~40원이 된다. 하나코 周邊 女人들은 大槪 빚을 지고 있다. 한물간 女俳優들도 더러 있다.

    올해 봄 當局의 集計로는 京城에 登錄된 妓生(妓生)은 日本人 463名, 朝鮮人 571名이다. 妓生집은 日本人 經營이 84곳, 朝鮮人 經營이 54곳이다. 朝鮮人 妓生은 漢城券番(漢城券番) 所屬이 壓倒的 多數였고, 日本人의 境遇 혼마치(本町)와 新마치(新町)에 密集해 있다.

    娼妓(娼妓), 卽 賣春婦는 日本人 488名, 朝鮮人 422名이다. 이는 公娼(公娼)에 登錄된 公式人員만을 集計한 것이다. 지난 1年間 朝鮮人 娼妓를 찾은 遊興客이 大略 朝鮮人 4萬7000名, 日本人 9000名 善이고 支拂한 金額은 朝鮮人 13萬8000원, 日本人 2萬5000원假量이었다. 日本人 娼妓를 찾은 日本人은 13萬7000名, 朝鮮人 4000名이었고 支拂한 金額은 日本人 127萬원, 朝鮮人 2萬7000원假量이었다. 娼妓 1人當 年間 平均收入을 計算하면 朝鮮人 娼妓가 400원, 日本人 娼妓가 3000원 線으로 큰 差異가 있다. 娼妓들은 쌍림동(雙林洞)과 묵정동(墨井洞) 언저리를 日本式 地名으로 고친 新마치(新町)의 遊廓(遊廓)에 雇用되어 있다. 東쪽은 朝鮮人, 西쪽은 日本人 遊廓村이다. 施設과 運營體系, 料金에서 差異가 크다.

    카페는 妓生집으로 分類되지 않고 카페 女給은 妓生으로도 娼妓로도 分類되지 않았다. 朝鮮은 日本이나 中國과 달리 오래前부터 賣春制度를 認定하지 않아왔다. 朝鮮社會의 指導理念은 儒敎(儒敎)였고 士大夫를 爲始한 社會指導層은 處身의 嚴正함을 生活信條로 定했다. 社會指導層은 男子였고 身分에 따라 妻(妻) 外에 첩(妾)을 1~2名 둘 수 있게 制度를 定했다. 그러면서 妓生에게도 節槪와 志操를 要求했다. 朝鮮은 儒敎의 本山인 中國보다 儒敎理念에 더 透徹했다. 中國에서 性理學(性理學)은 儒敎의 숱한 分派 中 하나에 不過했으나 朝鮮에서 性理學은 곧 儒敎理念 그 自體였다. 朝鮮時代에 妓生은 술자리에서 시중드는 것이 本業이었지만 그 名分의 한便에 賣春은 附隨的인 行爲로서 暗默的으로 容認되었다. 暗默的 現實이 主로 朝鮮의 現實이었다.

    카페 女給은 술을 팔고, 雰圍氣를 팔고, 境遇에 따라서는 戀愛도 팔았다. 戀愛를 파는 것이 아니라 眞짜 戀愛를 하는 것이라고 主張하는 境遇도 있었다. 春香傳의 이몽룡처럼 카페 利用客의 折半 以上이 學生이었다. 그中에는 大學生이 되기 以前에 婚姻한 境遇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朝鮮時代의 遺物인 早婚(早婚)의 끝자락과 近代文明의 膳物인 自由戀愛의 첫머리에 걸쳐 있었다. 그것이 1920年代에 20代를 보내는 靑春들의 運命的 苦惱 中 하나였다. 어떤 學生들은 職場 經歷 10年인 한림보다 돈을 더 잘 쓴다. 新聞社 廣告部에서 接受하는 廣告의 相當部分이 約 廣告인데, 가장 많은 것이 胃腸藥과 性病藥이다. 新마치(新町) 遊廓의 娼妓 277名을 對象으로 檢査를 해보았더니 34%가 性病에 걸려 있었는데, 競技도 衛生課長이 豫防 新藥을 開發해 投藥한 結果 26%臺로 떨어져서 모든 遊廓에 이 花柳病 豫防藥을 普及하기로 한 것이 올 2月이었다. 全國에 20곳 前後의 公娼 遊廓이 盛業 中이다. 6月에는 鍾路警察署가 工廠과 關係없는 管內 妓生 309名을 健康檢診했는데 7%가 性病 疑心者로 分類되었다. 2%는 妊娠 中이었다.

    鏡城의 新都心, 南村

    카페를 지나 光敎 앞 네거리 製菓店 앞에 섰다. 왼便으로 광통교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鍾路 2정목(鍾路二町目) 네거리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南大門1정목(南大門一町目)의 始作이다. 北村과 南村을 境界지어온 都城의 正中央이다.

    電車가 鐘閣 쪽으로 올라간다. 南大門 方面에서 오는 路線이다. 普信閣(普信閣)李 금세라도 주저앉을 듯, 마치 廢家(廢家)의 形象을 하고 기울어 있다. 그 壅塞한 單層 기와 木造 옆으로 우람한 3層 鐵筋 콘크리트 建物이 서 있다. 한일은행(韓一銀行) 빌딩이다.

    鐘閣과 銀行 옆으로 光敎(廣橋)에 이르기까지 大路邊에는 藥品會社, 洋服店, 布木店, 金銀房이 줄지어 있다. 光敎 南쪽에서 南大門1정목이 始作된다. 모퉁이의 漢城銀行(漢城銀行)을 始作으로 광通關(廣通館)을 비롯한 유럽風의 最新 建物들이 堵列해 있다. 그리고 南쪽으로 다시 네거리. 南大門通(南大門通)과 황금정(黃金町)李 마주치는 地點이다. 황금정1정목 네거리를 건너서 南쪽 코너에 日本生命(日本生命)빌딩이 보인다. 그 뒤로는 昨年에 完工된 5層짜리 京城電氣株式會社가 本格的인 事務用 빌딩의 몸채를 誇示하고 있다. 그 아래 南쪽으로 명치정(明治町)이 열린다. 황금정1정목 十字로(十字路)에 마주 보고 선 日本生命과 殖産銀行(殖産銀行) 建物은 마치 南村의 關門을 지키는 守門將처럼 버티고 섰다. 南村은 그렇게 變했다. 새로운 都市 鏡城의 새로운 都心으로 탈바꿈했다. 日本的이고 西歐的이고 資本主義的인, 모던 京城의 다운타운으로 變貌한 것이다.

    漢城 第1의 다리였던 光敎는 最近 20年 동안에 일어난 이 모든 變化를 지켜보며 납작 엎드려 있다. 朝鮮 五百年間 鐘閣과 함께 서울의 中心點이자 生活의 中心이었던 광통교는 높게 四方을 에워싸는 樣式 建物들 사이에서 漸次 낮게 쪼그라들었다. 다리 한 켠으로 깔린 電車線을 따라 電車가 往復한다. 鐘閣에서 南大門을 連結하는 이 電車路線은 1899年 單線(單線)으로 運行을 始作해 1910年 伏線(複線)이 깔렸다. 이 最初의 複線 軌道 區間이 開通된 8月26日은 韓日倂合條約이 調印된 뒤 恐怖를 사흘 앞두고 있던 날이었다.

    새로운 思想, 새로운 世代

    王朝는 壽命을 다했지만 戰車 通行은 活氣를 띠었다. 複線化로 上下行線이 分離 運行됨으로써 運行 回數와 乘客은 크게 늘었다. 漢城 時代에 開通된 電車는 京城 時代에 大衆交通의 根幹이 되었다. 가마가 없는 身分이라고 해서 걸어가는 時代가 아니다. 돈이 없어 人力車를 못 탄다고 밸이 꼴릴 것도 없다. 5錢짜리 電車 앞에 萬人은 平等하다. 新聞 한 張 값이다. 五百年의 身分制가 깨어진 民衆의 時代를 맞아 광통교는 數十 名이 터질 듯이 올라타는 戰車, 그것도 가장 通行量이 많은 路線의 電車를 짊어지는 全國 唯一의 다리가 되었다. 그래서 鐵筋과 콘크리트로 덧대 다리의 너비를 擴張했다.

    한림은 匡矯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길을 건넜다. 광통교의 南쪽 거리는 오랫동안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었다. 이 一帶는 또한 個人이 販賣를 目的으로 펴낸 冊子, 卽 坊刻本(坊刻本)의 去來가 이루어지는 中心地이기도 했다. 漢城銀行 앞을 지나 三角情(三角町)으로 접어든다. 南山에서 흘러내리는 세 갈래 물길이 비스듬히 合水하는 角度 때문에 西쪽은 넓고 東쪽 下流로 갈수록 좁아지는 三角形 地形이다. 그 꼭지點 언저리에 푸른色이 도는 기와의 2層 집 한 채가 우뚝 서 있다. 최남선(崔南善)李 運營하는 動名詞(東明社)와 朝鮮光文會(朝鮮光文會)가 들어 있는 建物이다.

    動名詞는 崔南善이 3·1運動으로 投獄됐다 出監한 1922年에 沈滯에 빠진 新文館(新文館)을 解散하면서 그 後身으로 發足한 出版社다. 高句麗의 始祖 東明聖王(東明聖王)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여기서 最初의 週間 雜誌 ‘同名(東明)’을 創刊했다. 崔南善은 17歲 때인 1907年 이 附近 상리동(上犁洞) 집에 처음 新文館을 創立했다. 日本 와세다(早稻田)大學을 中退하고서 印刷施設과 技術者를 救해 歸國하여 벌인 일이다. 最初의 雜誌 ‘소년(少年)’을 創刊한 것이 그 다음해다. 그 創刊號 머리에 ‘害(海)에게서 少年(少年)에게’를 發表했다. 朝鮮 傳來의 窓가의 形式을 버리고 西歐와 日本의 近代 詩(詩)의 모습을 갖춘 作品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少年은 새로운 思想을 가진 새로운 世代를 의미했다.

    신대한(新大韓)의 少年(少年)으로 깨달은 사람이 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 혼자 어깨에 진 무거운 짐을 堪當하도록 교도(敎導)하자.

    少年 創刊辭는 이러한 句節을 담고 있다. 新文館은 1910年 朝鮮光文會가 設立되면서 父親 所有의 이 집으로 옮겨와 함께 둥지를 틀었다.

    1層의 新文館은 以後 15年 동안 ‘붉은 저고리’‘아이들보이’‘靑春(靑春)’으로 이어지는 숱한 雜誌와 單行本을 發行했다. 2層의 朝鮮光文會는 憂國之士 50餘 名이 結成한 古典 刊行所이자 그들이 모이는 舍廊房이기도 했다. 3·1運動이 計劃된 據點 中의 하나이기도 했다. 崔南善은 여기서 己未獨立宣言書를 構想하고 宣言書를 써서 文選하고 組版했다.

    崔南善은 週刊誌에 이어 日刊紙를 創刊했다. 新聞은 讀者反應이 좋았으나 經營難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崔南善은 新聞에서 손을 뗀 뒤 朝鮮歷史硏究에 專念했고 昨年 朝鮮史編修會(朝鮮史編修會)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崔南善은 ‘朝鮮歷史’를 막 脫稿한 참이었다. 日本人의 神社(神社)가 이미 全國 여기저기에 들어섰다. 그 銃 本山이라 할 조선신궁(朝鮮神宮)李 1925年 가을 南山 中턱에 자리 잡고 漢江에서 北岳까지 京城 全域을 굽어본 지 벌써 滿 4年이 더 지났다. 崔南善은 李成桂(李成桂)에 依해 죽임을 當한 高麗의 名匠이자 宰相인 崔瑩(崔瑩)의 20代孫이다.

    한림이 찾는 사람

    장통교(長通橋)에 이르렀다. 10m 남짓하던 개울 幅은 南山에서 내려오는 至賤이 合流함으로써 20m 以上으로 넓어진다. 한림은 다리를 지나 장교정(長橋町)으로 접어들었다. 目的地에 다가왔다. 개울 건너 관철동과 함께 이곳은 長通房이라 하여 朝鮮 내내 都城 안 商業의 中心地였다. 또 中人과 市廛商人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中央과 地方 官廳의 連絡事務를 맡아보던 京主人(京主人)들의 本據地이기도 했다. 장통교 北쪽 관철동은 두 開化思想家 유홍기(劉鴻基)와 오경석(吳慶錫)이 살던 곳이다. 吳慶錫은 朴趾源(朴趾源)의 孫子 박규수(朴珪壽)를 說得해 丙子修好條約을 締結해 開港하도록 誘導했고 開化派를 養成했다. 유홍기는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甲申政變의 主役들을 指導했다. 吳慶錫의 아들 吳世昌(吳世昌)은 유홍기의 指導를 받고 1919年 3·1運動에 崔南善과 함께 나섰다.

    將校다리는 올여름 큰비로 물이 불어나 가운데가 流失되었다. 光化門통 附近 청계천을 覆蓋하느라 工事場에 널려 있던 널빤지들이 7月11日 降水量 126㎜에 達하는 비에 휩쓸려 내려가며 장통교 다리를 막았다. 다음 날 다리 가운데 橋脚이 水壓을 못 이기고 무너졌다. 그 다리 기둥엔 ‘辛未改造’(辛未改造)와 ‘己亥改造’(己亥改造)라고 새겨져 있다. 朝鮮王朝 어느 年間에 두 次例 修理가 있었다는 뜻이다. 汎濫한 개川 邊에서 두 名이 溺死했다. 청계천 覆蓋工事場 附近에서 물길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자 上流인 通의(通義) 昌城(昌成) 遞夫(體府)棟 一帶 200餘 號가 沈水됐다. 무너진 집 두 채가 떠내려가면서 금교(禁橋) 다리에 걸려 沈水被害는 더욱 커졌다. 금교는 遞夫, 通의, 敵船(積善), 내자(內資)동을 끼고 있는 네거리, 백운동천 위에 걸친 돌다리다. 國王 護衛와 首都 防衛를 맡는 禁衛營(禁衛營) 앞에 있다 해서 衿川(禁川)敎 或은 金靑(禁淸)校라 불렸다. 무지개形 橋脚과 獨特한 도깨비 文樣이 印象的인, 都城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한림은 장교정 큰길에서 南쪽 구리개(銅峴) 方向으로 暫時 내려가다 오른便 洞네 길로 접어들었다. 구리개는 이제 황금정(黃金町) 2正木으로 더 잘 불린다. 몇 걸음 못미처 커다란 솟을大門 하나가 마주 선다. 大門 左右로 펼쳐진 담牆은 그 길이와 높이가 여느 韓屋 집과는 比較가 안 될 程度로 길고 높다. 담 너머로 보이는 지붕들과 굴뚝들의 품새가 代가(大家)임을 斟酌게 한다. 장교정 63樊紙라는 말만 듣고 왔지만 이처럼 洞네의 한 블록을 다 차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림은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가 오늘 낮 그의 짧은 散策의 最終 目的地다. 그는 이 집의 主人을 만나러 왔다. 두 길 높이의 大門 위 잿빛 기와가 暗灰色 하늘의 어스름 빛을 받아 빗물에 번뜩였다.



    ●東亞日報

    ●朝鮮王朝實錄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서울六百年社 第4卷,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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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설, 九雲夢度, 文學동네, 2010

    ●최학주, 나의 할아버지 六堂 崔南善, 羅南, 2011

    ●프레드릭 루이스 알렌, 박진빈 驛, 원더풀 아메리카, 2006

    ●獨立記念館, 韓國獨立運動의 歷史 37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情報化 데이터베이스

    ●두산 百科事典

    ●統計廳, 國家統計포털

    ●氣象廳, 氣象月報

    박윤석

    東洋 三國의 近代를 探究하는 硏究者. 서울大學校 東洋史學科를 卒業하고 동아일보에서 記者로 20年 일했다. 建國大學校 言論情報大學院에서 韓國近代와 近代新聞에 對해 講義했다. 서울에서 食口들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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