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隣村記念會

思想과 일화

中央學院
中央學校와 보성전문에서 英才를 키우다

植民地 祖國의 獨立은 眞正한 敎育에서 出發한다는 것이 인촌 金性洙의 一貫된 信念이었다. 1914年 日本 留學을 마치고 돌아온 인촌 金性洙는 私立學校 敎育의 重要性을 切感했다.

그는 최남선(崔南善 1890-1957) 安在烘(安在鴻1892-1965) 等 日本 留學時節 만났던 親舊들과 함께 關聯 資料를 모아 1915年 봄 白山學校라는 이름의 私立學校 設立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첫 試圖는 朝鮮總督府에 依해 좌절당해야 했다.

그러던 次에 財政的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中央學校로부터 運營을 맡아달라는 依賴가 들어왔고 金性洙는 젊은이들에게 民族魂을 일깨우겠다는 信念에 따라 그 提案을 받아들였다. 그는 中央學校 引受를 지나친 冒險이라고 생각하는 父母를 說得하고 引受 費用을 얻어내 1915年4月 中央學校를 引受했다. 金性洙가 東京 留學時節부터 키워왔던 民族敎育의 꿈이 처음으로 實現된 것이다.

中央學校를 引受한 金性洙는 近代的인 經營方式을 導入, 學校 運營을 近代的 合理的으로 바꿔나갔다. 金性洙는 그곳에서 直接 英語와 經濟를 가르쳤으며 1917年엔 中央學校의 校長으로 就任했다. 그해 12月엔 서울 종로구 화동에서 종로구 季冬의 近代式 建物로 學校를 옮겼다.
金性洙의 努力에 힘입어 中央學校는 私學의 名門으로 成長해나갔다. 特히 韓國語 敎習이나 民族主義 敎育을 통해 民族 敎育의 搖籃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3·1運動에서 遂行했던 中央學校의 役割을 보면 잘 드러난다. 金性洙는 勿論이고 當時 中央學校 校長이었던 송진우(宋鎭禹 1894-1945) 等은 3·1運動의 準備 過程에서 至大한 役割을 했기 때문이다.

1918年 겨울부터 中央學校의 宿直室은 3·1運動의 準備 場所로 利用되기도 했다. 金性洙와 中央學校는 이처럼 幕後에서 3·1運動에 큰 功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1926年 順從의 國葬일에 있었던 6·10 萬歲運動度 中央學校 學生들의 主導로 이뤄진 것이었다. 金性洙는 中等敎育 못지않게 高等敎育의 重要性도 切感했다. 植民地라는 與件 때문에 有能한 젊은이들이 高等敎育을 抛棄하거나 外國으로 나가야 하는 現實을 지켜본 金性洙는 그것이야말로 民族의 損失이라고 생각했다. 金性洙는 1932年6月 財政難을 겪고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引受했다. 그는 유럽과 美國 有數의 大學을 둘러보고 그들의 先進的인 制度와 시스템을 보성전문학교에 導入하는 等 光復 때까지 보성전문학교에 깊은 愛情과 關心을 쏟았다.

金性洙의 努力으로 보성전문학교는 發展을 거듭했고 수많은 人材들을 輩出했다. 그러나 1938年 以後 日帝의 彈壓이 極에 達하면서 보성전문학교度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보성전문의 民族敎育에도 彈壓이 加해지면서 그 敎育이 職業敎育의 水準으로 制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金性洙와 보성전문학교의 敎授陣은 日帝의 創氏改名 强要에도 不拘하고 그들의 韓國 이름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것은 보성전문학교의 힘이었다. 金性洙와 보성전문학교는 日帝의 彈壓을 뚫고 民族 精神을 지켜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年엔 綜合大學 고려대학으로 發展, 只今까지 韓國의 民族大學으로서의 名聲을 드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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