隣村은 어떤 사람인가
인촌 金性洙
1891年 10月11日 ~ 1955年 2月 18日
인촌 金性洙先生은 舊韓末로부터 6.25前後까지 우리 近代史에 있어서 가장 暗鬱했던 65年間의 歲月을 살다간 民族의 先覺者였고 겨레의 스승이었다.
隣村은 1891年 10月11日(음9월9일) 全羅道 高敞郡 부안면 인촌리에서 김경중의 4男으로 태어나 세살 때 큰아버지 金祺中의 養子로
出系(出系)했다. 本貫은 蔚山이고 朝鮮 仁宗때의 거유(巨儒) 河西 金麟厚의 13代 손이다. 6歲 때부터 漢學을 工夫하다가 1908年
日本 東京으로 건너가 1914年 와세다 大學 政經學部를 卒業했다.
歸國 後 1915年 中央學校를 引受해 民族敎育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1917年에는 京城職뉴株式會社를 引受, 經營하다가 1919年
10月에 京城紡織株式會社를 設立했다. 1920年 4月에는 동아일보를 創刊함으로써 30歲에 敎育 産業 言論을 통한 民族의 實力養成
과 國家發展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9年 12月 龜尾 先進國의 敎育文物을 視察하고 1年9個月 만에 歸國한 仁村先生은 1932年 보성전문학교를 引受함으로써 宿願
이었던 高等敎育機關 設立의 꿈을 이룩하였으며 解放後 1946年8月 보성전문학교를 基礎로 하여 고려대학교를 발족시킴으로써
民族史學의 터전을 다졌다.
解放後 愛國志士들이 한국민주당을 創黨하고 參與를 勸해 왔으나 처음에는 이를 拒絶했다. 그러나 1945年12月 古下 宋鎭禹 先生이
凶彈에 쓰러지자 周圍의 强請에 못이겨 한민당 首席總務(黨首)를 맡았다. 1951年5月 避難首都 釜山에서 第2代 副統領에
被選되었다. 그러나 李承晩 大統領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어 1年만에 辭任하고 말았다.
1953年 還都 以後 健康이 좋지 않았는데도 李承晩 獨裁에 對抗할 民主勢力의 大同團結을 위해 勞心焦思하다 1955年 2月18日
65歲를 一期로 逝去했다.
葬禮는 國民葬으로 치러졌고 葬地는 高麗大學校 構內 인촌東山이었으며 1962年 建國功勞勳章 服裝(複章)李 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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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金性洙 先生 다큐멘터리
日本에 짓눌렸던 그 險한 36年과
解放 뒤의 어지럽던 混亂의 때를
이 겨레의 懇切한 가슴팍이 되시고
이 겨레를 이끄는 스승이 되시고
이 겨레의 하고 싶은 말 도맡으셨던 입
또 이 겨레의 쉼없는 손발까지 되셨던 이여
이 겨레의 가장 가까운 님이시여
當身의 故鄕땅 여기 高敞에
當身의 그 모습 본따서 모시어 세우나니
이 겨레와 함께 그 사랑 永遠하소서
1983年 8月 高敞郡閔들이 인촌銅像을 建立하면서 드린 獻詩
(미당 서정주 지음)
人(仁)이란 하늘로부터 받은 天性(天性)이요, 그 城(性)을 盛大로 따르는 것이 人(仁)이며 淸虛(淸虛)로써 自首(自守)하고 飛躍(卑弱)
으로써 자지(自持)하는 것을 人(仁)이라 한다. 仁義禮智(仁義禮智)中 으뜸인 것은 그 때문이다. 隣村의 謙遜하고 관인대도한
度量과 어짐을 본 石材 徐丙五의 勸誘로 인촌
<仁村>이란 號를 使用했다.
仁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