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隣村記念會

思想과 일화

복원된 중앙학교 숙직실.학교 설립자 김성수, 중앙학교장 송진우, 교사 현상윤 등이 3·1운동 거사를 모의한 곳이다. 復元된 中央學校 宿直室.
學校 設立者 金性洙, 中央學校長 송진우, 敎師 玄相允 等이 3·1運動 擧事를 謀議한 곳이다.
안에서 總督府 彈壓 견디며 자주力量 마련

隣村의 獨立運動은 武力鬪爭과는 關係가 없다. 어디까지나 非暴力 運動에 限定된다. 그러기 때문에 隣村의 獨立運動은 抗日이나 反日鬪爭 보다는 實力培養에 그 方向과 力點을 두고 있다.

隣村의 獨立運動은 直接的인 運動과 間接的인 運動으로 나누어진다. 直接的인 運動은 中央學校를 中心으로 3·1運動을 準備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間接的인 運動은 敎育, 産業, 言論을 일으킴으로써 民族의 力量을 키우는 運動으로 나타난다.

中央學校 宿直室은 새로 지은 敎師 앞 運動場 東南 便에 있었다. 基當(幾堂) 현상윤(玄相允)李 1916年에 와세다大學 史學科를 卒業하고 隣村의 부름을 받고 中央學校 敎師로 赴任하게 된다. 金性洙, 송진우, 玄相允은 宿直室에서 寢食을 같이 하면서 學校일을 相議하고 民族의 將來를 設計했다.

1918年에 獨逸이 降伏으로 1次 大戰이 終了됨과 더불어 6月에 열린 베르사유 會談에서 美國의 윌슨 大統領은 民族自決主義를 들고 나온다. 이러한 提唱은 海外에서 獨立運動을 하던 우리 指導者들의 獨立에 對한 意識을 더욱 提高시켰고 國內에서도 日本의 武斷政治에 시달리던 國內 各界 指導者들의 獨立에 對한 熱望을 强하게 鼓吹했다.

인촌, 高下, 基當 等의 中央學校 팀도 이러한 雰圍氣에 젖어서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熟議에 熟議를 거듭하게 된다.

여러 機關別로 獨立運動에 對한 淑儀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實踐의 結實을 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그러한 意識과 熟議를 結集시켜 行動으로 옮기는 데 中央學校의 3人坊 팀이 決定的인 役割을 하게 된다. 天道敎, 基督敎, 東京留學生들, 學生團體 等이 서로가 만나게 하고 連結시켜 주고, 한데 모여서 合意를 導出케 하고 財政的으로 支援하는 데 中央學校 팀이 中心的 役割을 하고, 謀議場所도 主로 宿直室이나 社宅 또는 隣村의 家宅이었다.

이 무렵 東京에서 2·8運動을 主導하던 백관수는 송계백에게 2·8 獨立宣言書를 가지고 中央學校 宿直室로 인촌, 高下, 基當을 찾아가도록 한다. 이들은 崔南善을 불러 獨立宣言書를 읽어보도록 한다. 崔南善은 感激하여 獨立宣言書를 印刷할 수 있는 活字 褓따리를 내주고 송계백에게 東京으로 가져가게 한다. 이때 隣村은 송계백에게 넉넉한 旅費를 마련하여 준다.

隣村은 旣往 獨立運動을 벌이려면 全國 坊坊曲曲의 百姓들과 더불어 各界各層 指導者들을 全部 動員해서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天道敎의 손병희 以外에 民族의 代表者들로 朴泳孝, 兪吉濬, 尹致昊, 이상재, 한규설, 윤용구 等을 說得해서 합류시키기로 한다. 說得作業은 主로 高下와 六堂이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拒絶하고 만다. 이런 狀況에서 처음에 積極的이던 崔麟과 최남선마저 消極的인 姿勢를 取하면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때 隣村은 宗敎團體가 天道敎만 있는 게 아니고 基督敎도 있지 않느냐고 反問하면서 基當(幾堂)으로 하여금 基督敎界의 元老 指導者이자 五山學校 設立者인 南江(南崗) 이승훈(李昇薰)을 交涉토록 한다. 基當은 李昇薰과 同鄕인 金道泰를 만나 이승훈으로 하여금 이 運動에 參加하도록 眞摯하게 付託한다. 金道泰는 井州에 내려가 李承薰에게 이 事實을 알린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이 일으키자고 한 東京 留學生 側에서 2月 8日에 擧事했다는 連絡이 왔다. 焦燥와 不安 속에 있던 中 드디어 1919年 2月 11日 이승훈이 인촌 집으로 찾아오게 된다. 南崗도 이미 2·8獨立宣言을 알고 어린 學生들까지 獨立運動을 외치는데 國內에서 가만히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積極的으로 나설 것을 다짐한다. 南江은 基督敎界에는 監理敎派와 長老敎派가 있는데 이 두 派가 합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하며 自己가 앞장서겠다고 20代의 젊은이들을 안심시킨다. 이때 隣村은 活動資金으로 數千 원의 돈을 내놓았다.

基督敎 團體로만 擧沙하게 되었다는 消息을 들은 中央學校 宿直室 팀은 몸이 달았다. 于先 이렇게 되면 擧國的인 運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告하는 李昇薰을 찾아가 天道敎와 같이해야 한다고 說得하지만 別로 成果를 거두지 못한다. 多急해진 告하는 六堂 崔南善을 찾아가 事情을 알리자 六堂은 南江, 高下, 基黨과 같이 崔麟의 집을 찾아 간다. 여기서 迂餘曲折을 거쳐 비로소 基督敎와 天道敎가 聯合戰線을 펼치면서 具體的인 擧事計劃과 方法을 熟議하고 決定한다. 그리고 崔麟, 이승훈, 함태영 세 사람이 佛敎團體에도 參加할 것을 勸誘함으로써 韓龍雲과 白龍城이 合流하게 된다.

隣村이 이러한 謀議過程에서 처음부터 일이 제대로 實踐에 옮겨지지 않을까를 걱정하던 것을 이 모임에 參與한 이병헌의 記錄을 보면 如實히 알 수 있다. 當時 隣村이 이야기한 內容이 只今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백사(百事)에 幼時(有始)면 油種(有終)이니 初志를 貫徹하여 目的을 達成하려면 誠實 靜慮(精勵) 근면해야 하고 百折不屈의 一心으로 林事務의(臨事無疑)하며 물위審級(勿爲心急)하고 義理를 尊重하고 親友 間에 信義를 잃지 말아야 한다. - 이병헌 “내가 본 3·1運動의 日 斷面”

위의 글은 隣村의 平素 生活과 精神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日에는 始作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끝을 보려면 誠實하고 精誠을 기울여야 하고 百折不屈의 마음가짐으로 一旦 일에 着手하면 疑心하지 말고 일하는 사람끼리 信義를 生命처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隣村의 實踐에 對한 剛한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이 運動에 贊成과 더불어 參與한다고 말은 하여 놓고 나중에 消極的이고 回避的인 姿勢를 取하는 사람들에 對해서 焦燥하고 不安해하는 心情도 담겨져 있다. 여기서 隣村의 實踐意志가 얼마나 强한가를 알 수 있다. 隣村의 後續事業人 東亞日報, 京城紡織, 寶城專門 等에도 3·1精神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後날 京城紡織이 存廢의 危機에 處하게 될 때 隣村은 3·1精神을 생각해서라도 京城紡織은 門을 닫을 수 없다고 周圍 사람들을 激勵하게 된다. 中央學校는 3·1運動 後에도 繼續해서 獨立運動에 參與하게 되는데 예컨대 3月 5日에 서울驛前 廣場에서 展開된 第2次 學生運動에도 全校生이 參加하였고 1926年의 6·10 萬歲運動에서도 中央學校 5學年 學生들이 主導的 役割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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