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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욱|記者 購讀|東亞日報
변영욱

변영욱 記者

동아일보 寫眞部

購讀 17

推薦

安寧하세요. 변영욱 記者입니다.

cut@donga.com

取材分野

2024-05-05~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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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一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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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受賞한 北韓 寫眞… 모자이크 處理가 늘고 있다[청계천 옆 寫眞館]

    ▶新聞에 실리는 寫眞을 新聞寫眞, 報道寫眞이라고 부르고 그 過程을 포토저널리즘(photojournalism)이라고 부른다. 北韓 新聞에도 當然히 寫眞이 실린다. 그런데 北韓 新聞에 실리는 寫眞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본다. 新聞寫眞이라는 表現은 可能할 것 같다. 報道寫眞이라는 表現과 포토저널리즘이라는 表現은 어떤가? 可能할까?선전선동사진, 프로파간다 寫眞, 弘報寫眞이라고 置簿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게 맞는 걸까? 新聞社 寫眞記者는 北韓에서 릴리즈하는 수많은 寫眞을 본다. 우리의 安保와 直結되는 南北問題를 理解할 수 있는 端初이기 때문에 有心히 보게 되며 必要하면 新聞이나 인터넷에 報道한다. 美國 言論도 마찬가지이다. 美國 AP通信이 平壤에 支局을 設置하고 運營하고 있지만 重要한 뉴스 現場은 지켜볼 수 없다. 그래서 김정은이 미사일이나 衛星 發射를 參觀하는 寫眞은 北韓 公務員들이 撮影한 寫眞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境遇, 美國 言論은 寫眞의 說明에 “이 寫眞은 獨立的인 言論이 아닌 官營 言論이 撮影한 것입니다”라는 但書를 붙여 讀者의 理解를 돕는다. ▶北韓이 提供하는 寫眞에서 最近 異常한 現象 하나가 反復되고 있다. ‘모자이크 寫眞’ 이다. 寫眞에 登場하는 特定 人物이나 素材를 포토샵으로 뿌옇게 處理한 채 提供하는 方式이다. 모자이크 處理된 寫眞이 昨年 2023年부터 間歇的으로 나타나고 있다. ‘쇼잉’을 즐기는 김정은과 그와 함께 寫眞에 登場하는 것이 榮光으로 看做되는 北韓 體制에서 異例的이다.▶ 우리나라의 基準에서 보면, 모자이크를 하는 境遇가 茶飯事이기 때문에 異常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1940年代 新聞부터 꾸준히 北韓 新聞을 살펴본 記者의 눈에는 아주 特異한 現象이다. 美國 AP通信의 立場에서도 北韓의 모자이크 寫眞은 특수한 形式의 寫眞이 分明하다. 合當한 理由에 對한 說明 없이 모자이크해서 提供한 寫眞을 AP通信은 全 世界로 傳達하지 않는다. 우리는 AP 通信이 아닌 北韓 노동신문의 PDF 파일에서 이미지를 잘라내서 提供하는 國內 言論을 통해서 提供 받을 뿐이다. ▶北韓은 2月 12日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新型 240mm 放射砲彈을 開發하고 性能 點檢을 위한 射擊 試驗을 進行했다고 밝혔다. 放射砲는 戰爭이 일어나면 第一 먼저 韓國 首都圈 打擊을 위한 武器 體系로 알려져 있는데, 朝鮮中央通信이 보여준 寫眞에는 포의 앞部分이 모자이크 處理되어 있다. 흥미로운 點은, 北韓 內部의 住民들과 幹部들이 볼 수 있는 勞動新聞 紙面에는 新型 放射砲의 寫眞을 바로 公開하지 않고 있다는 點이다. 日本과 연합뉴스 等을 통해 公開되는 朝鮮中央通信에만 寫眞을 公開했고, 그나마 포의 앞部分은 제대로 보이지 않게 處理했다. 對外用 퍼포먼스日 可能性이 있는 것이다. ▶國際 스포츠 大會 中繼 畵面에서 코카콜라 等의 商業 廣告를 뿌옇게 處理하거나, 韓國의 촛불示威 場面에서 光化門 높은 빌딩을 안보이도록 處理하는 것과 달리 2023年부터 1年째 發見되는 모자이크 寫眞의 共通點은 ‘軍事·武器 分野’ 寫眞이다. 北韓이 韓國과 日本, 美國 等을 攻擊할 수 있는 武器 體系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寫眞을 통해 보여주면서, 實務 開發者의 얼굴이나 實際 武器의 一部分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努力하고 있는 것이다. ▶北韓의 寫眞記者와 編輯者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時間이다. 寫眞은 危險한 道具이다. 政治的 目的을 위해서 活用될 수 있지만, 자칫 敵들에게 不必要한 情報를 提供할 수 있다. 미사일과 衛星 開發에 役割을 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줄 境遇, 美國의 制裁 對象이 될 수 있고, 武器의 디테일을 보여줄 境遇 電力을 露出시킬 수도 있다. 美帝國主義라는 口號板은 不必要하게 美國을 刺戟할 수도 있다. 韓國과만 對立을 해도 北韓 內部的으로는 充分하니 그 部分은 안 보이게 處理하자. ▶지난 10餘 個月 동안 北韓이 異例的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자이크 寫眞에 對해 살펴보았다. 잘 보여야 하는 時代이긴 하다. 北韓은 그 事實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서 最高指導者의 寫眞이 잘 나오도록 最大의 努力을 한다. 앞에서 言及한, 2024年 1月 10日 軍需工場 訪問 寫眞의 例를 들어보자. 寫眞記者가 볼 때 軍需工場의 內部는 非現實的으로 정갈하고, 照明 狀態는 一般的인 工場 現場 照明과는 差異가 있다. 特히, 트럭에 올라 運轉대를 잡고 있는 金正恩의 얼굴은 드라마에서 使用하는 스팟 照明 形式이 비추고 있었다. 잘 보여주기 위한 裝置가 考慮된 것이다. 工場인지, 쇼룸인지 어떤 表現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外部 世界가 觀察하는 것을 念頭에 두고 가릴 것은 確實하게 가리기 始作했다. 안 보여줌으로써 政治를 하는 北韓 寫眞. 우리는 그 現象을 뭐라 불러야 할까.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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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中·高卒 學歷 檢定考試 接受 始作

    올해 初·中·高卒 學歷 檢定考試에 應試하는 受驗生과 代理人들이 願書 接受 첫날인 13日 午前 서울 銅雀區 서울工業高等學校 體育館에 마련된 接受處에서 書類를 提出하고 있다. 서울市敎育廳은 16日까지 온라인으로, 19日까지 現場에서 檢定考試 願書를 接受한다. 試驗은 4月 6日 치러진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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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醫大 挑戰!”… 醫大 定員 擴大에 關心 몰린 入試說明會

    13日 午後 서울 瑞草區 瑞草메가스터디學院 醫藥學專門館에서 열린 ‘醫大 增員에 따른 入試 版圖 分析 說明會’에서 學生과 學父母들이 2025學年度 醫大 入試 戰略을 듣고 있다. 이달 6日 政府의 醫大 入學 定員 擴大 發表 後 醫大 進學에 對한 關心이 높아지면서 關聯 說明會에 受驗生과 學父母의 발길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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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발 散策’ 어때요?… 안양천에 黃土길 造成

    12日 午後 서울 永登浦區 안양천 一帶에 있는 黃土길에서 市民들이 맨발로 散策하고 있다. 영등포구는 健康을 위해 맨발로 걷는 市民이 늘자 最近 길이 600m 規模의 黃土길을 造成했다고 밝혔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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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로봇 젖소

    都心 골목에 로봇 젖소가 登場했습니다. 이 一帶가 朝鮮時代 最大 牧畜地였다는 걸 로봇 소는 알까요?―서울 성동구 聖水洞에서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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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激動의 時代, 얼굴이 記錄 되지 않은 時代[淸溪川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우선 지난週에 올렸던 百年寫眞 No. 46 ‘寫眞은 어디서 배우는 게 좋을까? 百年 前의 苦悶’의 포스팅에서 오프라인 授業 말고 ‘通信 授業’이라는 게 어떻게 可能한지 궁금하다고 말씀드렸는데 ‘江過酸’이라는 아이디로 接續하신 분께서 그 當時 通信은 郵便을 뜻한다는 意見을 주셨습니다. 電話는 電氣通信이라고 表現했을거라고 하시면서요. 맞는 說明인 것 같습니다. 感謝합니다. 이番 週에 고른 寫眞은 서울의 비, 서울의 봄 等 날씨 寫眞입니다. 100年 前 1週日 치 新聞에서 特別히 注目할 만한 寫眞이 없었던 한 週였습니다. 2月 8日子 新聞입니다.2월 10日子 新聞입니다.얼음이 녹은 漢江 나루터에서 봄을 맞아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漂母라는 表現이 낯설지 않으신가요? 漂母라는 表現을 옛날 新聞 DB에서 찾아보니, 1964年 1月 5日子 東亞日報에도 漂母라는 表現이 나옵니다. “三冬에 봄철 같은 날씨가 連日 繼續 三南地方에선 鐵아닌化身(花信)마저들려오고 漢江은 채 얼기도 前에 녹아내려 漂母(漂母)들이 밀려 나왔다”. 只今은 쓰지 않는 말이지만 脈絡으로 보면, 빨래하는 女人들을 指稱하고 있습니다. ▶正말 뉴스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日帝 治下라는 時代 狀況 때문에 寫眞을 실을 수 없었던 것인지 正確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날씨 寫眞 때문에 자리를 잡지 못한 누군가의 얼굴에 對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日帝 强占期. 新聞에서는 오늘날처럼 有名人의 얼굴이 別로 실리지 않았습니다. 日本의 官僚 政治人들 얼굴이나 民族 指導者의 얼굴이나 어느 쪽도 活動 모습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新聞이 有名人에 對해 다루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想像을 해봅니다. 于先 日帝라고 하는 現實 權力을 實際로 運營하던 日本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分明 그들이 願하는 이미지나 내러티브가 있었을텐데 新聞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1919年에 있었던 3.1運動의 影響으로 日本이 文化政策이라는 懷柔策을 選擇해서였을까요? 아니면 新聞社의 消極的 抵抗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고 우리 民族에게 意味 있는 人物들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只今의 우리 歷史가 記錄하고 記憶하는 民族指導者들이 1920年代에 分明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當時에 그들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昨年부터 제가 봤던 1923年度 新聞에서 그나마 기억나는 얼굴은 우리나라 最初의 飛行士 안창남과 地方의 財産을 팔고 서울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男性 程度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의 政治 指導者 等 國際的인 人物들의 얼굴 寫眞은 꽤 크게 실렸습니다. 어쩌면 이 部分은 當然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權力이 싫어하는 것을 보여주기엔 新聞社와 國民들의 힘이 弱했을 테니까요. 權力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같이 보여주지 않고 있는 新聞.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寫眞이 날씨와 風景 寫眞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그러고 보니 新聞 寫眞이라는 게 한 時代, 한 社會의 自畫像이자 正體性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植民時代라는 正體性, 獨裁時代라는 正體性, 民主社會라는 正體性 같은 거 말입니다. 只今 우리가 當然하게 보고 있는, 新聞 속 얼굴들이 時間이 지나면 이 時代에만 通用되는 方法이고 頻度日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實際로 1970年代 末까지만 해도 新聞 紙面에는 煉炭가스를 마시고 死亡한 市民들의 家族寫眞이나 住民登錄證 寫眞이 실렸습니다. 民主化와 個人의 프라이버시가 重要해지면서 이제는 歸省列車를 타러 가는 市民의 얼굴을 紙面에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政治人의 모습은 每日每日 新聞 紙面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0年 前에는 1週日 치 新聞을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었습니다. ▶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이 危險한 時代가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리고 只今 우리가 보고 있는 얼굴들은 우리 時代의 象徵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共有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설 名節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福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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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며…

    살얼음 낀 水面 아래 잉어들이 붉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游泳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다시 姿態를 뽐낼 準備를 하고 있는 걸까요?―부산 影島區에서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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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寫眞은 어디서 배우는 게 좋을까? 百 年 前의 苦悶 [淸溪川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 이番 週 고른 寫眞은 報道 寫眞이 아니고 廣告紙面입니다. 1924年 2月 2日子 東亞日報 2面 下段에 廣告가 여러 個 실렸습니다. 왼쪽부터 染色原料 資材販賣, 電氣治療원 紹介, 寫眞學院 廣告, 錦山人蔘組合 弘報, 圖謀例 호모 總販 等의 廣告입니다. 맨 오른쪽 圖謀例 호모總販은 고무신을 메인 이미지로 使用했네요. 檢索해보니 호모(護謨)는 고무를 뜻하는 프랑스語 ‘gomme’를 소리나는대로 使用하던 單語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年代 以後에 호모라는 表現 代身에 고무라는 原語 發音을 使用하기 始作했다는 說明도 檢索이 됩니다. 고무가 한글이 아니었다는 事實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러 廣告 中 百年寫眞을 통해 오늘 여러분과 共有하고 싶은 廣告는 寫眞學院 廣告입니다. 100年 前에 우리나라에서 寫眞이 어떻게 普及되고 있었는지, 寫眞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廣告입니다. 三脚臺 위에 設置되어 있을 大型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보기 爲해 暗幕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카메라맨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함께 廣告 文句가 길게 쓰여 있습니다. 寫眞術 屬性 敎授室지 通信 屬性實地과 通信과 共히 1個月間 屬性으로 養成하여 寫眞師 됨을 保證함. 新入 第 規則書 送證函. 元山部本情 朝鮮寫眞專門學院講習 中에는 寫眞機 無料貸付하는 特典이 있어 實習의 便利를 줌. 本願 卒業生으로 各地에서 單獨開業子 五十餘名人 데 모두 相當한 收益을 득하며 方今 講習生도 十餘 名이 있어 나날이 發展의 領域에 到達하오니 諸位는 躊躇치 말고 只今 速히 新入하여 晩時之歎이 없게 하심을 希望함.지금의 表現으로 하자면, “寫眞技術을 屬性으로 알려드립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屬性. 오프라인過程과 온라인 過程 모두 1個月間 養成하여 寫眞師가 되는 것을 保證합니다. 新入生에게는 매뉴얼북을 提供합니다. 朝鮮寫眞 專門學院.講習 期間 中에는 카메라를 無償으로 빌려드리는 特典이 있으니 實習은 便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본 學院을 卒業해서 寫眞館을 開業한 사람이 이미 50名이 넘는데 모두 高收益을 얻고 있습니다. 現在 受講生이 10餘 名 있으며 繼續 發展할 블루오션 市場이니 여러분께서는 躊躇하지 마시고 빨리 申請하셔서 나중에 後悔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程度가 될 것 같습니다. ▶아, 100年 前 서울에는 朝鮮寫眞專門學院이 있어서 寫眞館을 開業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敎育하고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寫眞學院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이라는 카메라와 익숙한 世代에게 短期屬性 過程으로 카메라 技術을 가르친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事業 모델이긴 합니다. 제가 社會生活을 始作했던 1990年代 中盤까지만 해도 서울 市內에서 寫眞學院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特히 軍隊 寫眞病으로 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屬性으로 寫眞을 가르친다는 學院이 서울 忠正路驛 있었던 記憶이 생생합니다. ▶저 廣告에서 제가 注目했던 點은 ‘通信과’라고 表現된 只今의 온라인 講義가 100年 前에도 있었다는 事實입니다. 講義室에 直接 오지 않고 寫眞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었는지, 게다가 電話로 授業을 했다면 通信 費用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可能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내친김에 1920年代 동아일보 紙面에 실린 ‘寫眞術’에 對한 記事를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記事가 있어 紹介하고 싶습니다. 1928年 9月 26日 記事입니다. 그때로부터 35年 前에 撮影된 서울 市內 全體 모습의 寫眞이 發見되었다는 消息을 傳하는 記事입니다. 韓半島에 寫眞이 導入된 時期를 1888年頃으로 摘示하고 있습니다. 漢城旬報 1884年 3月 14日子 記事에 따르면 우리나라 最初의 寫眞館은 김용원 氏가 開設한 撮影國이라는 相互의 寫眞館이 있었습니다. [最初로寫眞박힌 京城市街全圖 ? 城郭이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 있고 草家와 洋屋집은 別로 없다“조선에 寫眞術이 들어오기는 大槪 四十年 前, 1888年 京仁 듯 하다는데 輸入되던 當時에는 一般의 好奇心을 자아내는 한便으로 無識한 사람들은 寫眞을 박히면 生面을 뺏어 간다하여, ‘렌즈’를 보면 逃亡하는 사람도 있었다. 當時에는 許可를 받지 아니하면 風景寫眞度 마음대로 박지 못하였으므로 鏡城 市街의 寫眞도 部分的으로 박은 것은 있으나 全體 鏡城 市內의 寫眞을 볼 수 없었는데 京城府 府使編纂界에서는 最近에 某 日本人의 집으로부터 當時에 祕密裏에 박아 두었던 京城 戰警 寫眞을 求해 保管 中인데, 寫眞은 왜성대(倭城臺) 附近에서 박은 것인 듯하다하며 아직 城郭(城郭)李 튼튼히 남아 있고 只今과 같은 洋屋도 보이지 않아 聯隊는 大略 35年 前으로 京城을 寫眞으로 박은 것은 이것이 最初인 듯하다 한다(사진은 35年 前의 大京城)▶ 女性을 對象으로 寫眞技術을 가르치는 講座에 對한 記事도 있습니다. 1926年 4月 27日 記事입니다. 原文을 제가 現在의 表現으로 조금 바꾸었습니다. 한番 읽어보시죠. 化學원 안에 女子 寫眞部 設立 ? 이는 女子에게 適當한 職業市內 안국동(安國洞) 근화女學校(槿花女學校)에서는 時代 要求에 依하여 朝鮮에서는 처음으로 女子寫眞과(女子寫眞科)를 同巧 안에 特設하고 地名의 技術者를 招聘하여 普通 學校 6學年 卒業 程度의 學生 50名을 募集하여 3個月 동안 가르친 뒤에 特히 硏究科를 두어 普通科로 하여금 더욱 忠實히 가르치기로 되어 한창 準備 中이라는데 오는 5月 10日까지 一般의 入學願書를 받고 이튿날인 11日부터 開學하리라는 바 이는 적어도 現在의 朝鮮 女子들이 부르짓는 男女平等과 女性의 權利를 어느 程度까지 擴張함에는 女性의 經濟的 能力이 必要한 以上 그 能力을 얻고자 함에는 무엇보다 實際 專門 知識이 必要하다는 意味에서 차츰 朝鮮에서도 職業 夫人들이 생기는 만큼, 職業 찾는 女性들도 많음으로 그에 應하여 무엇보다 女子에게는 合當한 寫眞術을 擇하여 一般에게 주고자 그와 같이 設置하게 된 것이라더라.▶아래 記事도 興味롭습니다. 서울市內 寫眞作家들의 모임에서 봄을 맞아 初步者들에게 寫眞 講習을 한다는 內容입니다. 1929年 2月 9日子 동아일보 記事입니다. 寫眞師協會講習市內 京城寫眞士協會(京城寫眞師協會)에서는 新春事業으로 見習生을 위하여 寫眞 講習院(講習院)을 設置하고 오는 移越末日부터 市內 관철동 朝鮮寫眞館(朝鮮寫眞?)에서 寫眞術을 가르친다는바 講師는 신락균(申樂均)理緩筋(李完根)氏 等 吳氏라더라.여기서 登場하는 신낙균 氏는 나중에 동아일보 寫眞記者가 되어 손기정 日章旗 抹消 事件 當時 寫眞部長의 役割을 하게 됩니다. ▶ 박주석 敎授가 執筆한 “韓國史眞사”(문학동네, 2021)에 整理된 신낙균의 一代記를 暫時 紹介해 드리겠습니다. 1899年 無關 種2품이었던 父親 신택희 共의 次男으로 出生. 父親이 乙巳條約 締結로 官職을 그만두고 京畿 安城으로 落鄕.仁川公立商業學校에서 商業 實務 敎育을 받았으나 適性이 맞지 않아 中途에 抛棄하고 落鄕, 結婚 後 서울로 자리를 옮겨 ‘京城官立工業學校 染織과’를 1918年에 卒業. 이 過程에서 寫眞化學 卽, 現象과 人和를 精密하게 習得. 1919年 3.1萬歲 運動 以後 安城에서 벌어진 3.29萬歲運動 事件에 加擔해 手配 狀態가 됨. 逃避 途中 아마추어 寫眞家이던 妹夫 정욱진으로부터 寫眞術을 接함. 1922年 日本으로 留學. 東京正則學校에서 1年間 英語 專攻, 以後 東洋大學校 文化學科에 再入學하여 2年間 文化史와 理論 工夫. 1926年 東京寫眞專門學校 入學. 1927年 卒業 後 6年 만에 歸國. 그의 나이 28歲에 朝鮮중앙기독교청년회學校(YMCA) 招聘 寫眞과 敎授로 就任. 當時 YMCA는 英語科, 日語科, 木工과, 鐵工과, 機械科, 染織과, 寫眞과 等의 實務敎育을 하고 있었음. 1926年 京城寫眞士協會 結成. 1934年 東亞日報 入社. 1933年 新設한 동아일보 寫眞部(當時 寫眞과)에 1934年 入社. 初代 課長 최복순에 이어 2代 寫眞課長으로 就任. 1936年 ‘東亞日報 日章旗 抹消 事件’ 主導로 日帝에 逮捕. 寫眞記者 서영호에게 日章旗 抹消를 直接 指示하고, 寫眞 製版 過程에서 銅板에 靑酸加里를 뿌려 日章旗를 完全히 削除하도록 함. 백운선, 서영호 等 寫眞部 後輩 記者들과 함께 拘束. 寫眞修正의 發案者로 알려진 運動部 記者 이길용, 火가 이상범, 社會部長 현진건, 記者 장용서, 雜誌部長 최승만 等도 拘束. 1937年 9月 東亞日報 退社. 安城과 仁川 等地에서 就職 및 事業. 1955年 水原北中學校 化學과 公民 敎師로 勤務 中 校庭에서 腦溢血로 死亡▶오늘은 100年 前 서울에서 寫眞技術을 가르치고 배우려던 熱情과 비즈니스에 對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寫眞技術에 關한 또 다른 歷史가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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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 名節 앞두고 旅券 發給 急增

    29日 午後 서울 鍾路區 鍾路區廳에서 職員이 發給된 旅券을 整理하고 있다. 겨울放學과 설 連休 等으로 海外旅行 需要가 增加함에 따라 最近 市民들의 旅券 發給 申請이 늘고 있다.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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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지워지지 않기를…

    누군가 눈 위에 그려놓은 마음. 伴侶犬도 그 따뜻한 ‘返戾’의 마음을 느꼈는지 밟지 않고 避해 가려나 봅니다. ―京畿 광명시 광명동에서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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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사람들은 언제부터 圖章을 使用했을까?[청계천 옆 寫眞館]

    ▶서울歷史博物館長(최병구)은 29日 2023年 서울未來遺産 記錄 事業의 結果를 묶은 調査報告書 『서울의 印章舖』를 發刊했다고 밝혔다. 서울未來遺産記錄 事業은 2020年부터 近現代 市民들의 生活史를 主題別로 整理하는 作業이다. 이番에 發刊된 『서울의 印章舖』는 네 番째 作業이며 그 前에 發刊된 報告書는 ?낙원떡집 ?서울의 대장間 ?서울의 이용원이었다. 서울驛沙鉢물館에서 作成한 報道資料와 參考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되, 東亞日報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寫眞을 追加해 近現代史의 한 斷面을 ‘圖章 가게’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印章舖는 말 그대로 印章을 製作하는 가게이다. 只今은 ‘컴퓨터 圖章’이라고 불리는 機械 조각 印章이 登場했지만 그 前에는 사람이 直接 手作業으로 깍아서 圖章을 만들었었는데 그 作業을 했던 가게에 對한 記錄이다. ▶朝鮮時代 韓國의 印章은 크게 璽寶(璽寶), 관인(官印), 死因(私印)으로 區分된다. 個人이 使用하던 人丈人 死因(私印)은 書畫(書?)의 樂觀(落款)이나 書籍의 藏書印(藏書印) 程度에 그쳤다.인장이 普遍的으로 使用된 것은 日帝强占期 以後의 일이다. 朝鮮總督府가 朝鮮에서 日本人의 經濟活動을 合法的으로 保護하고, 朝鮮人들의 經濟活動을 統制하기 위한 手段으로 1914年에 「人間證明規則」을 頒布하며 强制 導入됐다. 國家次元에서 印鑑 使用을 强制하면서 印鑑 圖章을 만드는 가게도 成業하게 된 것이다. ▶ 1974年에는 「國家技術資格法」의 施行으로 引張工藝機能社(1級· 級·技能士補)資格試驗 制度가 導入됐다. 하지만 凝視 需要 減少로 인해 2004年에 廢止됐다. 2000年代 들어 컴퓨터 印章 製作과 署名 去來價 一般化되고, 公認認證書 導入 等을 거치며 印章業은 줄곧 斜陽産業의 길을 걷고 있다. 한便, 2000年代 以後 印章은 文化商品으로서의 價値를 擴張하고 있다. ‘胎줄 圖章’이나 ‘水制 圖章’이라 불리는 캘리그래피 디자인 한글 印章이 代表的이다.▶ 이番 서울역사박물관의 調査 結果, 서울에서 1950年代부터 活動해 온 오래된 印章舖 5곳과 印章 名將들이 새삼 照明을 받았다. 朴人當(博印堂), 거인당(巨印堂), 玉璽當(玉璽堂),餘原電人幇(如原篆印房), 인예랑(印藝廊) 等 5곳이다. ▶報告書는 서울 印章舖의 特性으로 첫째, 都市化 過程에서 손재주 있는 地方 사람이 서울에 定着하면서 擇한 業種 中에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6.25 戰爭이 끝나고 生計 手段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였는데 이 中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社長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業種이 印章業이었던 것이다. 冊床만 있으면 創業할 수 있는 業種이기 때문이다. 이番에 調査한 서울의 引上抛 5곳 모두 1950年代 以後 上京한 志望民이 運營한다는 共通點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漢字를 工夫했고 손재주를 武器로 서울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印章舖 하는 사람들은 5·16 以後에 다 地方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會社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近方이 다 會社였어요. 옛날에는 官公署에서 文書를 處理하는 데 使用하는 印章이 300~400種에 달했어요. 그래서 技術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印章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印刷 技術者보다 印章 技術者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年生, 거인당) 인터뷰.▶서울 印章舖의 두 番째 特性으로는 類似 業種과 空間을 共有한다는 點이다. 서울의 높은 賃貸料를 堪當하며 내 店鋪를 마련하기 어려운 狀況에서 印章舖는 다른 業種과 空間을 共有하는 方式을 積極的으로 活用해왔다. 引張 作業에는 넓은 空間이 必要하지 않기 때문에 可能했는 데 印章業에서는 이를 ‘겹살이’라 부른다. 特히 類似 業種인 印刷所, 文具店 等의 한쪽 空間을 利用해 營業하는 境遇가 많았다. 都心에 있는 大型 文具店이나 창신동과 인현동의 印刷所에는 ‘人帳簿’가 있었다.“1964년에 乙支路5街에 있는 印刷 가게 門 앞에 冊床 하나 빌려서 獨立을 했어요.”박호영(남, 1938年生, 朴人當) 인터뷰“가게에 冊床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貰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彫刻社加한 5~6名 있었어요. 그래서 1970年代부터는 圖章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재료만 取扱했죠.“ 박순옥(남, 1930年生, 靈光인재사) 인터뷰▶서울 印章舖의 세 番째 特徵은 都市 發展에 따라 浮沈을 겪었다는 點이다. 서울은 1960年代부터 1980年代까지 30年 동안 壓縮成長을 했다. 1970年代 江南開發이 本格化하기 以前 서울의 主要 施設과 企業體는 四大門 안쪽 地域에 密集했다.당연히 그 時期 서울의 印章舖는 代表的인 商店街인 鍾路와 충무로 一帶에 자리했다. 以後歐露工團, 汝矣島 開發 等 굵직한 都市 開發을 쫓아 印章舖度 移動해 營業을 이어갔다.“내가 印章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棟 58番地였어요. 거기서 先生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工團 韓日銀行 바로 옆에 있다가 軍隊 갔다 와서 1977年에 대일사를 開業했어요. 거기서 2年 있다가 汝矣島 국민은행 本店이 있는 中央빌딩으로 옮겼죠. 1980年에 汝矣島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年生, 韓國人場協會 會長) 인터뷰 1960年代 後半부터 서울에서는 現代式 高層 建物과 넓은 道路를 建設하고,주차장과 公園을 만들어 都心을 現代化·高度化하는 ‘都心再開發’ 事業이 展開됐다.이에 따라 都心의 底層 苦蜜 建物의 商家를 賃借한 印章舖들은 都心再開發과 함께잦은 移轉을 하며 浮沈을 겪었다.“지금 영풍문고 짓기 前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中 하나를 保證金 50萬 원에 얻었어요. 空間은 한 坪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車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年 半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保證金 50萬 원에 위로비 150萬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萬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年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年生, 朴人當) 인터뷰▶ 서울歷史博物館 최병구 館長은 “印章은 우리나라와 日本, 臺灣 等 東아시아 一部 國家의 특수한 文化임에도 不拘하고, 獨創性과 藝術性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印章의 戰勝 斷絶이 憂慮되는 狀況이다. 이番 調査를 통해 印章 細工 技術과 道具를 現場 調査 方式으로 생생하게 記錄해냈다는 點에서 앞으로 貴重한 資料가 될 것으로 期待한다.”라고 傳했다. 『 서 울 의 人 腸 抛 』 兆 사 步 故 서 는 서 울 驛 사 박 물 管 누 리 집(http://museum.seoul.go.kr)에서 閱覽할 수 있다. 購入은 서울冊房(https://store.seoul.go.kr) 또는 서울歷史博物館 내 記念品店에서 可能하다. (價格 14,000원, 問議 02-739-7033).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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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肺종이팩 다오, 새 化粧紙 줄게

    25日 서울 永登浦區 新吉5棟 住民센터에서 廢종이팩을 返納한 住民이 두루마리 化粧紙를 받아 가고 있다. 영등포구는 再活用 活性化를 위해 廢乾電池 20個를 모아 오면 새 乾電池 2個로, 牛乳팩 等을 헹궈서 乾燥해 가져오면 3kg當 두루마리 化粧紙 1個로 交換해주는 事業을 한다고 밝혔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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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유는 나를 봤으면 좋겠고, 그는 다른 곳을 보았으면…권력이 나를 본다는 것[淸溪川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 오늘은 두 張의 人物 寫眞을 準備했습니다. 于先 女性 두 名이 카메라를 向해 환하게 웃고 있는 寫眞입니다. 題目은 ‘社會奉仕하는 두 女子’입니다.기사를 읽어보니 幼兒死亡率이 높은 朝鮮의 狀況을 걱정해 美國 監理敎가 派遣한 美國人 女醫師 ‘로船腹’(왼쪽)氏와 朝鮮人 産婆 ‘阪神狂’氏가 無料 診療 奉仕를 이어가고 있다는 스토리입니다.다음 寫眞을 보겠습니다. 콧鬚髥의 白人 男性이 카메라를 凝視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題目을 보니 ‘英國 內閣 組織의 大名을 受諾한 勞動黨 樹齡 맥도날드氏’입니다. 英國 런던 발 記事인데, 勞動黨 總裁 濫製 맥도날드氏가 次期 英國 內閣의 首長이 되었다는 뉴스입니다. ▶優先, 寫眞 속 모델들이 모두 正面을 바라보고 있지만 느낌이 完全히 다릅니다. 한 張은 奉仕의 따뜻한 溫度가 傳達되는 反面, 男性의 寫眞은 지난주 韓半島를 强打했던 寒波만큼 서늘한 느낌을 줍니다. 當時 카메라 技術로도 充分히 웃는 모습을 撮影할 수 있었지만 차가운 表情으로 포즈를 醉했었네요. 저 男性이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좀 따뜻했을까요?▶100년이 지난 요즈음 出勤하는 地下鐵驛에는 4月에 치러지는 國會議員 選擧에 나갈 豫備候補들이 名銜을 들고 市民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빠듯한 出勤 時間이라 一旦 名銜을 건성으로 받은 後 地下鐵 플랫폼에서 列車를 기다리며 들여다보게 됩니다. 候補者들 視線의 方向이 어떤가요? 여러분을 正面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아니면 虛空이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나요? ▶正面을 바라보는 寫眞은 强한 感情을 傳達합니다. 웃음도 차가운 表情도 모두 正面일 境遇 强하게 腦裏에 남습니다. 몇 年 前 시리아 爆擊으로 傷處를 입었던 어린아이가 앰블란스 椅子에 앉아 茫然自失한 表情으로 正面을 보고 있는 寫眞이 地球人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프리카 救護 團體의 포스터에 登場하는 어린아이들도 우리의 눈을 正面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입니다. 國會議員에 나오려는 候補들은 거의 正面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新人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感情을 건드리는 正面 샷은 때로는 보는 사람을 거북하게 하기도 합니다. 特히 廣告에서 視線을 끌기 때문에 效果가 있다는 ‘3B’(Beauty, Baby, Beast ? 美人, 아기, 愛玩動物)가 아닐 境遇 보는 사람이 不便할 可能性이 높습니다. 新聞에 실리는 人物 寫眞 中에서 正面을 바로 보는 寫眞은 할 얘기가 分明한 인터뷰 對象者이거나 本人이 만든 製品을 廣告하거나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政治人이나 權力者가 正面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 人事를 하러 世上에 나왔거나 아니면 權威를 强調하기 위한 裝置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낯설고 나이 많은 男性이 우리를 바라본다면 때로는 威脅을 느끼기도 할 겁니다. 그래서 茶筅 議員이나 認知度가 높은 人物들의 境遇, 名銜이나 포스터 속에서 理想鄕을 바라보듯이 視線 處理를 하는 境遇도 있습니다. 이때는 카메라 밖을 바라봅니다. ▶꼭 正面을 보는 寫眞을 名銜이나 포스터에 使用해야 할 境遇 或은, 그리고 本人이 3B의 要素가 주는 魅力과 멀다고 느낄 境遇 어떻게 해야할까요? 最小限 2024年 大韓民國에서는 웃어야 할 것 같습니다. 100年 前 英國 勞動黨 黨首 같은 無表情한 表情은 選擧 必敗의 要素가 되기 十常이니까요. 아무래도 只今은 有權者 優勢 市場 아니겠습니까?▶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至極히 個人的인 생각입니다. 老鍊한 政治人들은 新聞에 실리는 寫眞이 찍힐 때도 視線 處理를 잘합니다. 얼굴은 正面이지만 妙하게 눈은 讀者를 正面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잘 보면, 카메라를 凝視하는 視線이 아닙니다. 어쩌다 카메라를 본다고 하더라도 正面에 있는 司會者를 보거나 누군가와 疏通하는 視線이지 카메라 記者들을 向해 포즈를 取하는 視線이 아닌 境遇가 大部分입니다. 勿論, 正面을 凝視하는 寫眞은 보는 사람에게 ‘나는 숨기는 게 없다, 正直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준다는 主張도 있습니다. 1960年度 美國 大統領 討論會에서 케네디는 닉슨에 비해 카메라를 直接的으로 凝視하는 時間이 훨씬 길었고 젊은 外貌와 함께 視聽者들에게 强烈한 印象을 줌으로써 勝利했다는 古典的 證據도 있습니다. 하지만 理論과 實際는 差異가 있을 수 있습니다. 時代도 다르고 文化 背景이 다르다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지난週 한동훈 國民의힘 非對委員長과 김경율 非對委員 寫眞을 보면서 저는 語塞함을 느꼈습니다. 當時 寫眞에 붙은 說明은 이랬습니다. “한동훈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이 17日 午前 서울 麻浦區 케이터틀에서 열린 國民의힘 서울市黨 新年人事會에서 김경율 非對委員과 함께 주먹을 쥐고 있다”. 팔을 든 채 正面을 凝視하고 있는 두 名의 中年 男性들. 두 사람의 視線은 뭔가를 剛하게 말하고 있을 때의 視線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向한 두 팔은 全黨大會에서 黨代表로 選出되었을 때처럼 勝利의 瞬間에 어울립니다. 一般的인 行事 寫眞과는 距離가 있어 좀 더 로우키(low key)로 設定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100年 前 新聞에서 讀者를 바라보던 세 사람의 視線을 主題로 只今의 政治 寫眞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댓글로 意見을 確認하고 싶습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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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눈고양이

    요 며칠 寒波 德에 ‘눈고양이’가 長壽하고 있네요. 오늘부터 추위가 누그러진다는데, 來日 또 볼 수 있을까요? ―서울 城東區 한양대 앞에서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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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三 드시고 힘내세요”

    22日 午前 서울 中區의 傳統文化 複合空間人 ‘韓國의 집’에서 KGC人蔘公社 正官庄 모델들이 ‘힘내라는 말 代身 正官庄’ 行事를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鄭館長은 28日까지 購買 金額帶別로 ‘에브리타임 필름’ ‘靑果세트’ ‘長壽율지’ ‘韓牛세트’ 等을 提供하는 이벤트를 進行한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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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主人)님은 먼 곳에

    橫斷步道 옆 電報대에 主人 잃은 銅錢 紙匣이 걸려 있습니다. 信號燈이 여러 番 바뀌는데도 主人은 오질 않네요.―서울 성동구 聖水洞에서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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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내린 탑골 公園, 風景인가 抵抗인가[청계천 옆 寫眞館]

    ▶100年 前 新聞에 실린 寫眞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百年寫眞]입니다. 1924年 1月 20日子 동아일보 紙面에 실린 寫眞을 紹介합니다. 거북 模樣의 받침돌 위에 碑石이 크게 서 있고 그 뒤로 樓閣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風景입니다. 서울 鍾路에 있는 탑골 公園입니다. ▶ 100年 前 서울에 눈이 내리자 寫眞記者가 탑골 公園에 가서 寫眞을 찍어 온 模樣입니다. 關聯된 記事는 別途로 없습니다. 가볍게 찍은 스케치 寫眞인가 봅니다. 說明은 아주 簡潔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雪景- 어제 塔골公園에서▶100년 前이나 只今이나 寫眞記者들은 눈이 내리면 周邊 風景 좋은 곳을 찾아가 寫眞을 찍습니다. 於此彼 그 時代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펑펑 내리는 눈을 보았을 텐데 굳이 寫眞을 찍어 紙面에 揭載합니다. 或是 못 본 讀者들을 위한 配慮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운 風景이 펼쳐진 時間을 記錄하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요? 寫眞記者들이 눈 스케치를 가는 場所는 다양합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大體로 會社 近處에서 寫眞을 찍습니다. 아주 잠깐 내리다 말 可能性이 높으니까요. 江原道에 暴雪이 내린다는 豫報가 있으면 미리 자작나무 숲이나 大關嶺을 찾아가 기다립니다. 봄을 앞두고 눈이 내린다면 冬柏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보기도 합니다.▶저도 얼마 前 눈이 내린 다음 날 서울 南山에 다녀왔습니다. 정작 눈이 내리는 時間에는 寫眞이 別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比較的 큰 눈이 서울에 내리더라도 風景 寫眞은 눈이 完全히 그친 後에 제대로 찍을 수 있습니다. 南山 循環路와 서울 타워를 오르내리며 風景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왜 南山을 擇했을까요? 여러 가지 理由가 있겠지만 서울의 象徵 같은 곳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어 雪景을 즐기는 市民들도 같이 寫眞에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風景은 쓸쓸해 보이고 리얼리티도 떨어지기 때문에 人跡이 있을 만한 곳을 選擇합니다. 景福宮이나 德壽宮도 雪景 스케치에 잘 어울리는데 그런 곳들 亦是 고풍스런 建物들이 많기도 하고 觀覽客도 寫眞에 包含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눈風景에 어울리는 곳이 古宮이나 公園이라면, 暴雪로 서울 市民들에게 不便이 招來된다면 江邊北路 出勤길이나 江南大路 退勤길이 寫眞의 素材가 됩니다. 엉금엉금 눈을 뚫고 出退勤해야 하는 하루가 그날의 뉴스 포인트이기 때문일 겁니다. 勿論 寫眞의 撮影 場所는 流行이 있습니다. 只今은 當然하게 新聞과 放送 카메라가 자주 비추는 곳이 예전에는 그다지 자주 다뤄지지 않던 場所일 수도 있고, 反對로 예전에는 자주 登場했던 場所가 只今은 뜸한 境遇도 있습니다. 제가 寫眞記者를 처음 始作했던 1990年代 末. 추운 날씨에 出勤하는 市民들의 表情을 스케치하기 위해서 寫眞記者들이 모였던 곳은 서울 地下鐵 1號線 대방역에서 汝矣島로 넘어가는 다리였습니다. 그 撮影 포인트가 只今은 서울 光化門 四거리로 바뀌었습니다. 特別히 理由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의교를 걸어서 出勤하는 市民이 急激히 줄어 ‘그림이 안되는’ 風景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寫眞記者들이 새로운 로케이션을 찾았을 可能性이 있습니다. ▶ 100年 前 탑골 公園 雪景 寫眞은 여러분이 보시기에 너무나 平凡한 寫眞일 겁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只今 基準으로는 理解할 수 없는 水準이지만 當時에는 뭔가 理由가 있었을 겁니다. 于先 時間的인 促迫함이 理由가 아닐까 싶습니다. 新聞 編輯을 總括하는 部長이, 너무 답답하고 속 터지는 뉴스만 가득한 社會面에, 가슴이 시원한 寫眞이라도 한 張 넣자고 갑자기 決定했던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取材 指示를 받은 寫眞記者가 마감時間에 臨迫해 撮影했던 것은 아닐까요? 두 番째 理由로 想像할 만한 點은, 只今이야 탑골 公園이 老人들의 休息處 또는 老人 問題의 象徵처럼 認識되지만 100年 前 新聞을 만들던 사람들 立場에서는 특별한 場所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탑골 公園은 高麗時代에는 興福寺라는 절이, 朝鮮王朝 때에는 世祖가 建立한 圓覺寺가 있던 곳을 1897年에 大韓帝國 最初의 近代公園으로 造成한 곳입니다. 많은 文化公演行事와 集會 場所로 活用되었다는 記錄이 있습니다. 서울의 中心, 近代化의 可能性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寫眞이 찍히기 5年 남짓 前인 1919年 3月 1日. 이곳 탑골 公園에서 한 男性이 獨立宣言書를 朗讀한 뒤, 5千名의 市民들과 學生들이 獨立을 외쳤었다고 합니다. 3.1萬歲運動의 發祥地인 것입니다. 單純한 雪景이 아니라 時代와 歷史의 正體性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서울에 갑자기 눈이 내린 17日 午後에 100年 前 저 寫眞 속 탑골 公園에 가봤습니다. 鬼斧 위의 碑石과 樓閣이 그대로 보입니다. 神奇했습니다. 다만 碑石 周邊에 樓閣이 하나 더 생겨 寫眞으로는 같은 模樣은 아니었습니다. ▶문득, 韓國 戰爭의 砲火를 잘 견뎌내 준 文化財와 그 옆 아름드리나무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多幸히 탑골 公園은 하늘에서 쏟아졌던 戰爭의 砲彈에서 벗어났었나 봅니다.탑골 公園이라는 이름이 그 때나 只今이나 똑같다는 것도 神奇했습니다. 元來 파고다 公園을 1990年代에 탑골 公園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常識과는 좀 다른 資料입니다.오늘은 100年 前 서울의 象徵 中 한 곳이었던 탑골 公園의 雪景 寫眞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댓글에서 確認하고 싶습니다.?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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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맞으며… 無料 給食 기다리는 老人들

    17日 午後 서울 地域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鍾路區 탑골公園 隣近에서 無料 給食을 받으려는 老人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이날 京畿 포천시와 講院 鐵原郡, 華川郡에는 大雪注意報가 내려졌다. 氣象廳은 江原 嶺東 地域에 18日 午後부터 19日까지 最高 15cm 以上 눈이 내릴 것으로 豫報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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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지만 剛한 消火器로 電氣車 火災 豫防해요”

    15日 서울 영등포구 堂山公園 公營駐車場의 電氣車 充電所 앞에서 永登浦區 關係者가 이곳에 備置된 消火器를 들어 보였다. 영등포구는 電氣車 充電施設 26곳에 消火器 48臺를 配置해 迅速하게 車輛 火災에 對應하겠다고 밝혔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202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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