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年 7月 27日 서울 中區 프레스센터에서 光復 70周年을 맞아 열린 ‘2015平和統一大會’에서 김동길 연세대 名譽敎授가 大會辭를 하고 있다. [뉴스1]
元老論客 김동길 연세대 史學科 名譽敎授가 4日 享年 94歲를 一期로 別世했다. 5日 遺族에 따르면 서울 西大門區 세브란스병원에 宿患으로 入院 中이던 金 敎授는 前날 午後 10時 30分쯤 숨을 거뒀다. 故人은 올해 2月 코로나19에 確診됐다가 回復했으나 3月부터 健康이 急激히 惡化된 것으로 알려졌다.
故人의 一生은 波瀾萬丈했다. 日帝强占期인 1928年 平安南道 孟山郡에서 태어난 그는 1945年 敎員 資格試驗에 通過해 敎師 生活을 하다가 이듬해 父母와 함께 越南했다. 서울에 터전을 마련한 故人은 연희대(現 연세대) 英文科를 卒業한 後 美國 인디애나 州 에반스빌臺 歷史學科에서 碩士, 보스턴대에서 링컨 硏究로 哲學博士 學位를 取得했다.
歸國 後 연세대 史學科 敎授로 在職하면서 社會諷刺 글을 發表해 이름을 알렸다. 1972年 10月 維新 以後에는 社會運動家 咸錫憲이 發行하던 ‘씨알의 소리’에 體制를 批判하는 글을 揭載했다. 이를 契機로 運動圈 學生들의 背後 操縱者로 몰려 1974年 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民靑學聯) 事件 後 起訴됐고, 懲役 15年을 宣告받아 解職됐다. 刑執行停止로 풀려난 後 隨筆과 新聞 칼럼을 쓰며 蟄居하던 故人은 1984年 政權의 宥和 政策으로 大學에 復職했다.
故人은 1991年 學生運動을 하던 中 警察에 毆打당해 숨진 명지대生 강경대 君을 貶下하는 듯한 發言을 해 論難의 對象이 되기도 했다. 西洋文化史 講義 途中 “그를 烈士라 부르지 말라”고 말했는데, 學生들이 校內 大字報를 통해 그를 批判하고 나섰다. 이에 金 敎授는 辭表를 내고 學校를 떠났다.
以後 故人은 政治權에 발을 담갔다. 1992年 鄭周永 現代그룹 會長이 創黨한 統一國民黨에 最高委員으로 合流했다. 그해 第14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서울 강남구甲에 出馬해 當選했다. 정주영 會長이 大選에서 敗北하고 물러난 以後인 1994年 박찬종 前 議員과 함께 新民黨을 創黨했고, 이듬해 김종필 前 國務總理가 創黨한 자유민주연합에 合流했다. 그러나 第15代 總選에서 公薦을 받지 못하자 脫黨하며 政界隱退를 宣言했다.
野人으로 돌아온 그는 2000年代부터 保守論客으로 活躍했다. 콧鬚髥과 나비넥타이가 트레이드마크인 政治評論家로 放送에 出演했고, ‘이게 뭡니까’라는 流行語를 남기기도 했다. 2008年부터는 自身의 홈페이지에 ‘自由의 把守꾼’이라는 題目으로 10年 동안 每日같이 칼럼을 썼다. 2018年부터는 ‘夕陽에 홀로 서서’라는 題目 아래 宗敎와 人生에 關한 글을 썼는데 지난해 12月 “自由는 決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健康上의 理由로 글쓰기를 中斷했다.
1月 20日 서울 西大門區 自宅에서 김동길 연세대 名譽敎授가 새해 人事次 訪問한 安哲秀 當時 國民宜當 大選候補와 對話를 나누고 있다. [國會寫眞取材團]
以外에도 지난해까지 유튜브 채널 ‘김동길TV’를 運營하고, 올해 初 安哲秀 當時 國民宜當 大選候補의 後援會長을 맡는 等 末年에도 信念에 따라 行動하는 모습을 보였다.
故人은 結婚하지 않고 平生 獨身으로 지냈다. 生前 誓約에 따라 遺族은 그의 屍身을 연세대 醫科大學에 寄贈했다. 세브란스病院 側에 따르면 故人의 屍身은 防腐處理 以後 解剖學 敎室에서 敎育用으로 使用될 豫定이다. 故人이 作故하기 前까지 살던 서울 西大門區 自宅은 누나인 김옥길 女史가 總長을 지낸 이화여대에 寄附한다. 葬禮는 故人이 누나를 기리기 위해 自宅 마당에 建立한 김옥길記念館에서 家族葬으로 치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