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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星·現代·SK 經營權 承繼로 본 北韓 後繼構圖의 未來|新東亞

三星·現代·SK 經營權 承繼로 본 北韓 後繼構圖의 未來

로열패밀리 權力鬪爭 向方과 過渡體制의 ‘變心’이 最大變數

  • 이승열│梨花女大 統一學硏究院 硏究委員 summer20@naver.com│ 황일도│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shamora@donga.com│

    入力 2010-09-17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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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可視化하고 있는 平壤의 後繼體制 構築作業은 果然 순조롭게 進行될 수 있을까.
    • 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有用한 바로미터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長子 相續이라는 大原則을 버리고 셋째와 다섯째를 後繼者로 擇했던 大韓民國 最高의 財閥 三星과 現代, 過渡體制를 겪은 SK의 事例가 그것이다.
    • 이들 企業 承繼의 裏面을 解剖해보면 權力 世襲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의 屬性과 力學關係, 金正恩 後繼體制의 未來를 가늠할 수 있는 變數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2010年의 늦여름, 사람들은 平壤을 注目했다. ‘9月 上旬’으로 豫定됐던 黨代表子 大會를 통해 北韓의 3代 世襲이 現實化될지 모른다는 豫測 때문이었다. 김정일의 셋째 아들 정은이 김일성과 김정일, 卽 萬景臺와 白頭의 血統을 잇는 3代 世襲의 主人公이라는 것이다. 勿論 北韓의 김정은 後繼體制 構築은 이제 始作일 뿐, 앞으로도 기나긴 過程이 남아 있다. 只今 當場에는 그 成功과 失敗를 豫斷하기가 쉽지 않지만, 關心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를 가늠하기 위한 가장 根本的인 質問은 하나로 要約된다. 왜 셋째 아들인가. 金正日에게는 성혜림에게서 낳은 長男 김정남과 고영희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김정철이 있다. 金正恩은 高永喜의 둘째 아들이라는 게 그間의 定說이었다. 더욱이 김정일 國防委員長이 後繼者로 決定되던 1970年代, 그는 三寸인 김영주나 繼母인 김성애, 異腹同生인 김평일 等과의 權力鬪爭 過程에서 ‘長子 承繼’라는 傳統的 原則의 德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論理로 보자면 金 委員長의 長男인 김정남 或은 高永喜의 첫아들인 김정철이 後繼者로서 더 妥當性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金正日은 막내아들을 自身의 後繼者로 選擇했다는 것일까.

    長男을 제친 3남의 後繼者 登極, 이는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朝鮮의 세 番째 王인 太宗은 自身의 셋째 아들인 忠寧大君(世宗)에게 安定的인 寶位를 물려주고자 緻密한 後繼戰略을 세웠다. 太宗 自身이 1,2次 ‘王子의 亂’을 통해 骨肉相爭의 피를 본 뒤 王位에 올랐으므로 自身의 아들에게는 이 같은 不幸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太宗은 1,2次 王子의 亂이 잘못된 世子(막내인 方席) 冊封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았다. 太祖 李成桂의 後繼者로 方席을 내세운 繼母 신덕王后의 外戚들과 王權보다 神權을 强化하려는 鄭道傳 等 開國功臣들의 陰謀 때문이라는 생각이었다.

    自身의 長子인 讓寧大君에게는 이러한 問題點이 모두 內在해 있었다. 讓寧大君 周邊에는 太宗의 夫人인 閔氏를 비롯해 外戚勢力인 민무구·민무질 兄弟가 있었고, 自身의 側近인 이숙번과 趙英茂 等이 이들과 剛한 政治的 紐帶關係를 맺고 있었다. 1404年 太宗은 讓寧大君을 世子로 冊封하고 바로 2年 뒤 健康을 理由로 線위(禪位)를 宣言한다. 宣威는 臣下들의 極烈한 反對에 부딪히면서 撤回되지만, 以後 繼續된 太宗의 線위 波動은 結局 太宗의 意中을 把握하지 못하고 讓寧大君의 卽位를 서둘렀던 민무구 兄弟의 죽음을 불러왔다.

    太宗은 1418年 長男인 世子를 廢位하고 三南人 忠寧大君을 世子로 冊封했다. 그리고 두 달 뒤 太宗의 線위를 통해 朝鮮의 네 番째 王인 世宗의 卽位式이 열린다. 그러나 이때의 卽位式은 世宗의 後繼 構圖의 完成이 아니라 始作이었다. 太宗은 世宗의 治世에 影響을 줄 수 있는 自身의 創業功臣 이숙번과 趙英茂 等을 쳐내고 忠寧大君의 外戚勢力까지 除去함으로써 强力한 王權을 아들 世宗에게 물려주는 데 成功한다.



    김정일 委員長의 選擇이 세 아들 中 가장 充實한 아들을 選擇한 結果인지 或은 權力鬪爭에 가장 能한 아들을 選擇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料理師로 일했던 日本人 후지모토 겐지氏는 김정일이 自身과 얼굴과 體型이 닮은 김정은을 第一 마음에 들어한다고 證言한 바 있다. 분명한 것은 金正恩의 揀擇이 決코 偶然일 理 없고, 徹底하게 構成된 脚本이 있었으리라는 點이다. 問題는 ‘果然 어떤 脚本이냐’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顯微鏡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于先 長子 相續이라는 大原則을 버리고 셋째와 다섯째를 後繼者로 擇했던 大韓民國 最高의 財閥 三星家(家)와 現代家(家)가 있다.

    이들이 後繼者를 選擇하는 過程을 들여다보면, 金正恩의 後繼者 選擇 過程 亦是 김정일 委員長 혼자만의 決定이 아니라 北韓 體制의 未來를 둘러싼 로열패밀리들의 熾烈한 權力鬪爭의 産物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類推해낼 수 있다. 여기에 故(故) 최종현 會長 以後 손길승 體制를 넘어 崔泰源 會長으로 經營權 移讓을 이뤘던 SK의 境遇는, 果然 김정은 體制가 現在 云謂되는 이른바 張成澤 過渡體制를 넘어 順航할 수 있을지 가늠할 바로미터가 된다. 이름하여 ‘韓國 大企業의 經營權 承繼過程으로 類推해 본 北韓 權力承繼의 方程式’이다.

    쫓겨난 ‘王世子’의 運命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삼성그룹 故 이병철 會長의 長男인 이맹희氏.

    三星家에서 이맹희氏는 果然 어떤 存在였는가. 大韓民國 最高의 財閥인 이병철 會長의 長男인 이맹희氏가 삼성그룹의 後繼者 選定過程에서 셋째 아들인 李健熙 會長에게 밀려난 後 벌어진 一連의 일들은 쫓겨난 ‘王世子’의 運命이 어떤지 보여주는 좋은 事例다. 三星을 一時的으로나마 넘겨받았던 이맹희氏는, 1966年 國民的 公憤을 일으켰던 三星의 사카린 密輸事件-이른바 ‘韓肥 事件’-을 契機로 後繼者 자리를 넘겨준 後 會社에서뿐 아니라 家門에서도 내쳐지는 身世가 됐다. 長男이지만 아버지 이병철 會長의 生日行事에도 參席할 수 없는 沒落이었다.

    그 過程에서 가장 크게 作用한 것은 創業功臣들의 反撥이었다. 이맹희氏가 經營權을 물려받은 直後부터 불거진 이러한 反撥은, 經營權을 暫時 맡아 그룹의 一時的인 危機를 잘 넘겨달라는 이병철 會長의 뜻을 이맹희氏가 잘못 읽었던 게 原因이었다. 그룹을 自身의 體制로 無理하게 再編하려 했던 것이 禍根이 된 셈이다. 當時 이병철 會長이 長男에게 물려준 經營權은 代理經營을 통해 後繼者로서의 可能性을 打診하기 위한 過程이었을 뿐 絶對的인 大權을 附與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暫時 잊고 있었다. 結局 ‘韓肥 事件’으로 因해 長男과 次男이 失脚하면서 三南人 이건희氏가 삼성그룹의 後繼者로 새롭게 登場했다.

    셋째 아들의 後繼者 登場이 안고 있는 構造的인 脆弱性은 이병철 會長에게 苦悶을 안겨주었다. 이병철 會長은 무엇보다 이맹희氏가 自身의 事後에 ‘삼성그룹의 長男’이라는 名分을 들고 다시 돌아올 可能性에 무척 神經을 썼다. 이 때문에 自身이 살아 있는 동안 長男의 後繼者 컴백 可能性을 源泉的으로 除去할 必要가 있었고, 이를 위해 그를 社會的으로 完全히 隔離해 再起 不能 狀態로 만드는 計劃까지 세웠다. 以後 이맹희氏는 山間僻地와 美國, 日本 等을 떠돌며 三星과는 全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流浪生活을 해야 했다.

    2001年 5月1日, 김정일 委員長의 長男 김정남이 아들과 두 名의 女性을 帶同하고 도미니카共和國의 假짜 旅券을 所持한 채 日本 나리타 空港으로 入國하려다 逮捕됐다는 消息이 全世界에 打電됐다. TV를 통해 公開된 김정남은 뚱뚱한 風采에 倨慢한 表情을 지은 모습이었다.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었다”고 入國 事由를 밝힌 그는 67時間 만에 日本에서 追放되어 中國 베이징 空港에 내렸고, 以後 北韓에 들어가지 못한 채 中國, 러시아, 홍콩, 마카오 等을 旅行하며 浪人 生活을 해야만 했다. 이 事件으로 그는 金 委員長의 눈 밖에 나 後繼者 자리에서 멀어졌다는 게 大體的인 解釋이다.

    그러나 果然 그게 全部였을까. 日本 密入國 事件이 그를 後繼者 身分에서 밀어낸 決定的인 契機였을까. 이는 但只 對外的인 名分이었을 뿐 이미 김정남은 後繼者의 자리에서 멀어져 있었다고 보는 게 훨씬 說得力 있다.

    김정남은 김정일 委員長이 아버지에게서 權力을 물려받았던 當時의 先例에 따라 1990年부터 ‘皇太子’로서 後繼受業을 着實하게 받아왔다. 金 委員長이 그를 黨 會議室로 데려가 가운데 자리를 가리키며 “네가 커서 큰소리칠 자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 김정남은 1990年 朝鮮컴퓨터센터(KCC) 設立을 主導하는 等 IT 및 軍事 分野에서 主要 職責을 맡았고, 金 委員長의 指示에 따라 脫北者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베이징에 祕密據點을 마련해놓고 脫北者들의 强制送還을 總括하기도 했다.

    先代 側近그룹의 힘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8月 김정일 國防委員長의 4泊5日 訪中 行路.

    그랬던 그가 後繼者 地位에서 멀어진 決定的인 理由는 繼母인 고영희와의 權力鬪爭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過去 김정일 委員長이 承繼 過程에서 벌어진 繼母 김성애와의 權力鬪爭에서 勝利했던 것과 對照的이다. 김정남은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1971年 5月10日에 태어났지만, 父母의 同居가 極祕였던 까닭에 따지고 보면 私生兒였다. 김일성 主席이 김정남의 存在를 알게 된 것은 4年 後인 1975年 무렵으로, 이를 몰랐던 金 主席은 1973年 아들을 김영숙과 結婚시킨 바 있다.

    靑年 김정일의 公式 結婚은 隱遁生活을 하고 있던 성혜림에게 커다란 精神的 衝擊을 안겼다. 神經衰弱에 걸린 성혜림은 以後 治療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主로 살게 되었고, 기쁨組 出身으로 알려진 高永喜가 김정일의 세 番째 夫人으로 登場하게 된다. 김정철과 金正恩의 生母로 알려져 있는 바로 그 女人이다. 김정남에게 繼母인 高永喜와 동생인 鄭澈, 정은의 登場은 後繼者 地位를 흔들 수 있는 크나큰 威脅이었다. 김정일에게 繼母 김성애와 金平一, 김영일의 存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980~89年 스위스에서 留學生活을 한 김정남은 歸國 後에 病中에 있는 自身의 어머니를 버리고 繼母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게 不滿이 많았던 것으로 傳해진다. 高永喜와 두 아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버지의 無關心을 더욱 못 견뎌 했다고도 한다. 이때 김정남의 地位를 흔드는 決定的 事件이 터졌다. 1996年 김정남의 姨母인 성혜랑이 西方으로 亡命한 것이었다. 성혜림의 모스크바 生活과 언니 성혜랑의 亡命은 김정남의 立地를 極端的으로 좁게 만들었다. 高永喜는 私生兒라는 出生의 祕密을 간직한 正南보다 自身의 아들인 鄭澈에게 後繼者의 正統性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現實化하기 위해 拍車를 加하게 된다.

    이때부터 高永喜는 于先 金 委員長의 最側近이던 김용순 對南擔當 祕書와 積極的으로 連帶했고, 2002年 8月부터는 人民軍 將兵들을 對象으로 고영희에 對한 個人 偶像化 作業이 始作됐다. 高永喜를 偶像化하는 것은 單純히 그女를 치켜세우는 게 아니라 그女가 낳은 아들 김정철을 後繼者로 밀어 올리기 위한 緻密한 事前 整地作業이었다. 탄탄하게 進行되던 김정철 後繼體制 構築은, 그러나 2004年 6月 乳房癌을 앓던 高永喜의 죽음과 “後繼者 論議를 中斷하라”는 2005年 김정일 委員長의 指示로 事實上 水面 아래로 潛伏하게 된다.

    김정남이 日本 나리타 空港에서 逮捕된 事件은 고영희에게 김정남의 後繼者 地位를 빼앗을 名分을 준 機會였다. 高永喜가 死亡한 以後에는 間或 平壤을 드나들고 있지만, 密入國 事件 以後 그가 外國生活을 主로 하는 것에는 큰 變化가 없다. 아직은 本國에서 傳해지는 巨額의 用돈으로 豪華生活을 이어가고 있는 듯하지만, 金 委員長이 死亡한 後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身世로 轉落할 公算이 커 보인다.

    셋째에게 權力을 넘겨준 옛 後繼者의 運命. 삼성家의 長男 이맹희의 말로와 김정일의 長男 정남이 걸어가는 길은 이렇듯 닮은 대목이 많다. ‘授業 中인 後繼者’라는 過渡期的인 位置에서 선대(先代)의 功臣그룹이나 側近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벌어진 脫落이라는 點에서도 大同小異하다. 이러한 構圖는 後繼者 選定의 가장 큰 몫을 當然히 선대 指導者가 쥐고 있지만, 그 構築過程에서 側近그룹이 發揮할 수 있는 影響力도 매우 重要하다는 事實을 보여준다. 後繼者 資質을 檢證하는 過程에서 빚어진 先代 側近들과의 紛亂은 곧 父親의 不信으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좀 더 積極的으로 解釋하자면 後繼構築作業은 선대 權力 엘리트 그룹의 共同追認 或은 協助 속에서만 可能하다는 뜻도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實際로는 權力 엘리트가 모두 參與하는 集團作業人 셈이고, 長男이라는 名分이나 個人的인 能力은 오히려 副次的이라는 뜻이다. 權力 周邊人物들의 利害關係를 總體的으로 再定義하는 權力承繼라는 過程에서, 不滿을 품은 現在 權力 엘리트들의 抵抗은 後繼者 地位 自體를 흔들기에 充分한 힘을 갖는다는 뜻이다.

    勿論 이러한 原理는 現在 進行되고 있는 김정은으로의 後繼構築 過程에도 얼마든지 適用될 수 있다. 只今 北韓 權力의 核心을 構成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無視 못할 持分을 갖는다는 뜻이다. 特히 長男이라는 名分을 바탕으로 언제든 復歸하려 試圖하지 않겠느냐는 先代의 憂慮가 이맹희氏에게 附與했던 苛酷한 運命은 김정남의 未來 亦是 어두울 수밖에 없음을 剛하게 示唆하는 部分이다. 쫓겨난 王世子의 運命인 셈이다.

    ‘王子의 亂’과 尤庵角 事件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2001年 3月 鄭周永 現代그룹 名譽會長의 葬禮式에서 入棺式을 지켜보고 있는 현대가 三兄弟. 왼쪽부터 정몽구 現代車 會長, 정몽헌 현대아산 理事會 會長, 정몽준 議員.

    2000年 벌어진 현대그룹의 이른바 ‘1,2次 王子의 亂’은 鄭周永 名譽會長의 後繼構想을 둘러싸고 둘째 아들 鄭夢九(MK) 會長과 다섯째 아들 정몽헌(MH) 會長이 벌인 숨 가쁜 對決의 場(場)이었다. 現代家(家) 王子의 亂의 核心人物은 斷然 MH다. 家門의 實質的인 長子인 鄭夢九 會長에 비해 承繼 正統性이 不足했던 MH가, 아버지의 側近이던 이익치 현대증권 會長, 김윤규 현대건설 社長, 김재수 構造調整本部長 等의 파워엘리트와 함께 父親의 宿願인 對北事業을 承繼해 現代의 嫡統 後繼者로 經營權을 承繼하려 했던 것이 그 骨子였다. 周知하다시피 結局 鄭周永 名譽會長은 MH의 손을 들어주고, 이른바 1次 王子의 亂은 MH의 一方的 勝利로 끝이 난다.

    事實 現代價의 基本的인 後繼構圖는 그룹을 5個 小그룹으로 나누고 이 中 MK는 自動車 그룹을, MJ는 重工業 그룹을, MH는 電子, 建設, 金融 및 서비스 그룹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MH는 兄과 동생에게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라는 世界 어디에 내놔도 부럽지 않은 企業들이 돌아간 데 비해 自身에게 주어진 몫이 초라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鄭周永 名譽會長의 對北事業을 繼續 推進하려면 相對的으로 不實했던 電子, 建設, 金融으로는 餘力이 充分치 않다고 判斷했다. 더욱이 1次 王子의 亂에서 傷處를 입었던 MK는 이를 契機로 自動車 小그룹 分離作業에 더욱 拍車를 加했다.

    1次 王子의 亂으로 그룹의 柳一韓 會長으로 登極하는 데 成功한 MH는 한발 나아가 그룹의 後繼構圖를 아예 새로 짜기 始作했다. 허울뿐인 現代그룹 會長보다는 현대자동차라는 優良 系列社를 確保해 實質的인 파워를 거머쥐려는 計劃이었다. 結局 MH의 2次 王子의 亂은 현대자동차 그룹의 經營權을 確保하려는 試圖가 核心이었고, 이를 위해 그는 父親을 前面에 내세워 系列社에 對한 持分整理를 主導했다. 鄭周永 名譽會長의 全面 登場은 最大 受惠者인 MH가 最大 被害者인 MK의 反撥을 沮止할 수 있었던 事實上 唯一한 힘이었다. MH의 마지막 勝負手는 현대건설의 流動性 危機를 그룹 次元으로 擴大해 鄭周永 名譽會長과 MH 自身, MK ‘3父子의 同伴退陣’을 꾀하는 카드였다.

    그러나 3父子 同伴退陣은 自動車 그룹을 뺏기지 않으려는 MK의 强力한 反撥에 부딪혔고, MH 自身 또한 지킬 수 없는 約束이었다. 結局 이때의 計劃이 鄭周永 名譽會長만 외롭게 退陣하는 ‘現代版 高齡腸’으로 마무리되면서 現代그룹은 元來의 後繼構圖臺로 分割됐고, 以後 對北事業에서 再起를 試圖했던 MH는 對北送金 搜査過程에서 自殺이라는 極端的인 選擇을 하게 된다. 結局 現代價의 後繼構圖를 둘러싼 一連의 흐름은 MH의 죽음과 이익치, 김윤규 等 側近그룹의 退陣으로 事實上 마무리된다.

    지난 6月 한 國內 言論은 “2009年 4月末 김정남이 ‘어린놈이 날 죽이려 한다’는 말과 함께 마카오에서 싱가포르로 避身하는 事件이 있었다”고 報道한 바 있다. 國家安全保衛部가 저질렀다는 이른바 ‘尤庵角 襲擊 事件’이다. 이 무렵 김정남은 姑母夫인 장성택 勞動黨 行政府長에게 도움을 請했을 뿐 아니라, 以後 海外言論과의 인터뷰에서 意圖的으로 “後繼에 關心이 없다, 조용히 살겠다”는 趣旨의 말을 反復했다.

    記事가 事實이라면 궁금症은 하나로 모인다. 왜 金正恩이 김정남을 죽이려 했다는 것일까. 實質的인 長男인 김정남이 自身의 後繼構圖에 如前히 威脅的인 勢力이기 때문에 그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意圖였을까. 그러한 蓋然性도 無視할 수는 없지만 조금 다른 次元에서 들여다볼 必要가 있다.

    정은은 누구의 아들인가

    같은 6月 ‘中央선데이’는 김정남을 인터뷰하는 過程에서 “김정은이 高永喜의 아들이 아니라 고영희 死亡 以後 김정일의 네 番째 夫人 役割을 하고 있는 김옥의 아들”이라는 疑惑을 提起한 바 있다. 김정남 知人의 말을 本人에게 確認하는 次元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김정남이 金正恩의 出生의 祕密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뜻이라는 點에서 흥미로운 報道였다. 앞서의 ‘尤庵角 事件’이 事實이라면 그 原因으로 類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인 셈이다.

    김정일 委員長의 네 番째 夫人으로 불리는 김옥은 平壤音樂舞踊大學을 卒業한 後 1980年代 初 기쁨組로 拔擢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以後 金 委員長 執務室의 打字手가 되었고 內緣의 關係로 發展했다. 所聞의 骨子는 김옥이 1984年 男子 아이를 出産했는데 이 아이가 바로 正恩이라는 것이다(북한 當局은 最近 金正恩의 出生年度를 1982年으로 主張하고 있는 것으로 傳한다). 김정남에 이어 또다시 私生兒를 낳은 김정일이 정은을 婦人인 高永喜의 아들로 入籍시켰고, 北韓 內에서도 이러한 事實을 아는 사람이 張成澤과 그의 妻 김경희 等 極少數뿐이라는 이야기다.

    事實上 確認이 不可能하긴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김옥이 金 委員長의 네 番째 夫人 役割을 하면서 權力의 中心部에 들어서는 時期와 金正恩이 後繼者로 浮上하는 時期가 比較的 正確하게 一致한다는 點에서 쉽게 넘기기 어렵다. 一種의 情況證據人 셈이다. 김옥은 高永喜가 죽은 2004年 6月 以後 金 委員長과 同居에 들어가 海外巡訪에도 同行하는 等 事實上 퍼스트레이디 役割을 하고 있다. 以後 로열패밀리로서 權力의 中心에 確固히 자리 잡은 것은 2008年 8月 金 委員長이 腦卒中으로 쓰러진 後로 알려져 있다. 病床을 掌握해 金 委員長의 意思를 外部에 傳達하고 外賓을 接見하는 等 張成澤 夫婦와 함께 김정일 權力의 核心으로 浮上했다는 것이다.

    工巧롭게도 김옥이 權力의 核心으로 登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9年 1月 金正恩이 後繼者 指名을 받았다는 消息이 흘러나오기 始作했다. 지난 8月 金 委員長의 갑작스러운 中國 訪問에 金正恩이 祕密裏에 同行했고 김옥 또한 頂上會談場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報道가 연이어 나왔다. 그림으로만 보자면 김정은은 아버지, 生母와 함께 할아버지인 김일성 主席의 革命遺跡地를 訪問하는 狀況이 演出된 셈이다.

    이와 함께 2009年 4月 김정일 委員長의 統治資金을 비롯해 勞動黨의 財政을 管掌하는 財政經理部張에 김효가 昇進 任命됐다는 消息도 눈여겨봐야 한다. 財政經理部 副部長을 지낸 金孝는 部長으로 昇進하면서 12期 代議員에도 選出됐다. 김효는 다름 아닌 김옥의 아버지다. 정은의 後繼者 內政 以後 金 委員長의 統治資金과 黨의 財政을 管理하는 核心補職에 父親이 拔擢될 만큼 김옥의 影響力이 커졌음을 示唆한다.

    ‘王妃의 난’?

    성혜림이 고영희로 인해 相當한 精神的 苦痛을 받은 것처럼 고영희 亦是 김옥의 登場으로 인해 不安感에 시달렸다. 김옥은 高永喜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金 委員長의 海外訪問에 同行하는 等 至近距離에서 補佐했다. 정은이 實際로 김옥의 아들이라면, 김정남이 事實上 後繼構圖에서 멀어진 以後 高永喜의 아들인 정철과 김옥의 아들인 鄭은 사이의 後繼競爭이 極度로 熾烈했으리라는 것은 充分히 가늠해볼 수 있다. 굳이 이름 짓자면 ‘王妃의 난’인 셈이다. 그리고 그 絶頂은 2003年 무렵이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2003年 6月 金 委員長의 두터운 信任을 받으며 對南 政策의 司令塔 役割을 했던 勞動黨 祕書 김용순이 疑問의 交通事故로 死亡한다. 김용순은 김정일의 最側近이자 高永喜의 最側近이었다. 1998年 美國으로 亡命한 高永喜의 동생 고영숙은 自身의 언니가 정철의 後繼 可能性을 김용순과 積極的으로 相議했을 程度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證言하고 있다.

    김용순의 死亡 直後인 2003年 9月 고영희 亦是 交通事故로 머리를 크게 다치는 重傷을 입는다. 乳房癌이 再發해 治療를 받고 있던 高永喜는 이 事故로 인해 健康이 急速히 惡化되어 2004年 結局 死亡했다. 흥미로운 것은 最近 北韓 內部에서 當時의 交通事故가 김옥이 護衛司令部 警備운수부 라인을 隱密히 動員해 고영희 乘用車의 브레이크 라이닝을 破壞해 暗殺을 試圖한 陰謀였음이 새롭게 밝혀졌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點이다. 金 委員長의 追加 調査 指示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事實이 그대로 묻혀버렸다는 것.

    王妃의 亂의 또 다른 軸은 고영희 側의 反擊이었다. 2003年 7月 金 委員長의 妹弟인 장성택 當時 黨 組織指導部 第1部部長이 金 委員長의 慈江道 現地視察 以後 公式席上에서 사라졌다. 以後 그는 黨 中央위 檢閱에서 宗派行爲와 權力濫用 行爲로 家宅軟禁당했고, 地方에 流配돼 1970年代 以後 두 番째로 ‘革命化’ 處分을 받았다. 當時 張成澤의 落馬를 主導했던 人物은 亦是 組織指導部 第1副部長이었던 리제강으로, 그의 政治的 라이벌이자 高永喜의 最側近이었다.

    張成澤은 한때 김정남의 强力한 後援者였으며, 정남이 後繼者 地位에서 멀어진 後에는 고영희-리제강과 敵對的 關係였던 것으로 傳해진다. 다시 말해 高永喜와 리제강에게 張成澤은 正鐵路의 後繼構圖 構築에 가장 큰 威脅이 될 人物이었다. 거꾸로 정은의 後繼者 地位가 確定되고 장성택이 그 後見人으로 자리매김한 以後인 지난 6月 리제강이 交通事故로 死亡한 것은 偶然치고는 너무 공교롭다.

    生前의 高永喜는 성혜랑의 亡命과 日本 密入國 事件 以後 正南을 밀어내고 鄭澈을 中心으로 後繼構圖를 새롭게 짜려고 試圖했다. 結局 正南을 밀어내는 데는 成功했지만 새로 登場한 김옥과의 權力鬪爭에서는 敗北했다. ‘高永喜의 난’이 ‘김옥의 난’에 依해 制壓당한 셈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海外에서 떠돌고 있는 正南보다는 國內에 머물러 있는 鄭澈의 運命이 훨씬 위태로워 보인다. 父親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미 權力의 核心에서 벗어난 그는 이미 ‘곁가지’ 身世다. 그의 未來 慰勞 四面楚歌에 몰려 極端的인 選擇을 해야 했던 정몽헌 會長의 運命이 겹쳐 보인다면 過한 생각일까.

    過度權力의 淑明

    2003年 9月22日 최태원 SK㈜ 會長이 保釋으로 釋放됐다. 系列社 保有株式을 맞交換하는 過程에서 醉한 不當利得과 系列社 粉飾會計, 系列社 株式 裏面契約 等의 嫌疑를 받고 拘束된 지 7個月 만이었다. 崔 會長의 釋放은 그가 故 최종현 SK그룹 會長의 長男으로서 다시 經營 前面에 나설 수 있는 1次的인 環境이 造成됐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當時 SK에는 過渡體制였던 손길승 會長 體制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98年 최종현 會長이 他界한 後 SK는 專門經營人인 손길승氏가 그룹 會長職에 올라 ‘오너와 專門經營人 투톱 體制’라는 獨特한 方式으로 運營됐다. 이른바 ‘過渡的 經營權’이라는 槪念이 登場한 게 이 무렵이었다. 가장 큰 理由는 崔 會長이 아들의 後繼에 對해 별다른 準備를 하지 못한 狀態에서 갑자기 世上을 떠난 데서 찾을 수 있다. 選對 會長의 갑작스러운 유고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後繼體制 사이에서 崔泰源 會長이 그룹 全體를 맡을 力量을 갖출 때까지 이를 後援하고 管理할 過度權力이 必要했던 것이다.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2001年 11月15日 SK C&C 데이터센터 竣工式에서 SK 最高任員陣이 竣工 버튼을 누르고 있다. 왼쪽부터 SK C&C 변재국 社長, SK㈜ 崔泰源 會長, 손길승 會長, SK建設 문우행 社長.

    최종현 會長은 그 後援者로 손길승을 選擇했고, 以後 孫 會長은 主要 系列社 社長團 모임인 ‘수펙스(SUPEX) 追求協議會’ 議長을 맡으면서 그룹 全體의 經營과 對外關係 業務를 擔當했다. 최태원 SK㈜ 會長은 그룹의 核心 系列社 代表理事를 맡아 主로 그룹의 안살림을 챙기는 그림이었다. 卽 崔 會長이 그룹 內에서 自身의 經營體制를 確固히 하는 동안 손 會長은 그의 後援者로서 對外的 環境을 造成했다. 孫 會長이 그룹 會長職을 맡으면서 當時 38歲로 어렸던 崔 會長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1~2年假量만 會長職을 遂行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權力構造의 特徵을 고스란히 反映한다.

    그러나 미처 豫想치 못했던 여러 對內外 與件은 孫 會長 體制를 延長시켰다. 1~2年이라던 過渡體制는 崔泰源 會長이 保釋으로 풀려난 時點까지 5年 넘게 이어졌고, 粉飾會計 問題로 傷處를 입은 崔 會長을 代身해 相當期間 繼續될 것이라는 觀測까지 나왔다. 果然 손길승 會長이 그間의 公言대로 崔泰源 會長에게 그룹 經營權을 順順히 넘길 것인지를 두고 갖가지 所聞이 꼬리를 물었다. 孫 會長 亦是 粉飾會計 問題로 有罪判決을 받았음에도 會長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게 疑惑의 震源이었다. 財界에서는 “崔 會長이 保釋으로 釋放됐으니 SK는 當分間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을 것”이라거나 “崔 會長이 없는 틈을 타서 밀고 들어온 손길승 會長 系譜와 崔泰源 會長 系譜 間의 熾烈한 힘겨루기가 豫想된다”는 이야기가 云謂됐다.

    갖가지 所聞과 달리 SK그룹은 結局 崔泰源 會長 1人體制로 이내 자리를 잡게 되지만, 이 또한 豫想하기 어려웠던 外部變數 때문이었다. 孫 會長 中心의 過度經營 體制가 쉽게 물러난 重要한 背景에는 大選資金 提供 等의 問題로 孫 會長이 더 以上 그룹 會長職을 維持할 名分이 없어졌다는 點이 決定的으로 作用했다. 大選 當時 後繼 授業 中이었던 崔 會長은 그룹 經營 前面에 나설 狀況이 아니었기 때문에 政治權 問題에서 比較的 자유로웠다는 點이 一種의 免罪符 機能을 한 셈이었다.

    急作스러운 訪中의 理由

    다시 平壤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8月25日 저녁 이뤄진 김정일 委員長의 갑작스러운 訪中은 26日 午前 지린市의 金日成 母校 訪問을 첫 日程으로 始作해 30日 무단장의 김일성 抗日遺跡地 訪問으로 마무리됐다. 후진타오 主席과는 베이징이 아닌 창춘에서 頂上會談을 했고, 經濟視察에 大部分의 時間을 보냈던 過去와 달리 이番에는 김일성 革命遺跡地 探訪에 功을 들였다. 앞서 말했듯 金正恩이 同行했을 것이라는 觀測이 많았고, 이를 통해 金 委員長은 萬景臺와 白頭의 血統이 3代 世襲의 確固한 正統性이라는 事實을 北韓의 權力 엘리트들에게 確固히 인식시켰다.

    지난 4月 이미 中國을 다녀온 김정일 委員長이 지미 카터 前 美 大統領을 北韓에 불러놓은 狀態에서 電擊的으로 다시 中國을 찾은 것은 分明 異例的이었다. 급작스러운 訪問의 理由로 가장 먼저 擧論되는 것은 經濟 問題다. 中國에 經濟的 支援을 要請하기 위한 것이라는 分析이지만, 金正恩의 同行이 事實이라면 後繼問題가 더욱 重要한 事案이었다고 결론지어도 無妨할 듯하다. 特히 後繼者 問題를 中國까지 가져갔다는 것은 本人의 健康 때문에 이 問題를 早期에 마무리 지을 必要를 느꼈다는 이야기가 된다. 後繼 公式化가 豫想보다 앞당겨질 境遇 일어날 수 있는 權力 內部의 不協和音을 最少化하기 위해 中國의 確固한 支持가 必要했을 것이라는 分析이다.

    自身의 健康에 不安感을 느끼는 金 委員長과 앞으로도 相當한 時間이 必要한 金正恩 唯一指導體制의 構築, 金 委員長으로서는 自身이 後代 承繼의 全 過程을 지켜주지 못한 채 死亡하는 境遇를 假定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自然히 發生할 權力空白을 막으려면 過渡體制가 不可避하다. 首領에서 後繼者로 直接 이어지던 北韓의 權力承繼가 一旦 過渡體制로 넘어갔다 다시 後繼者에게 이어지는 3段階 過程을 거쳐야 하는 셈이다. 北韓으로서도 初有의 權力 實驗이다.

    삼성·현대·SK 경영권 승계로 본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

    2002年 10月28日 京畿 龍仁市 닭고기 加工業體 마니커를 訪問한 北 經濟視察團의 장성택 當時 黨 組織指導部 第1部部長이 닭고기 加工에 對한 說明을 注意 깊게 듣고 있다.

    이러한 理由로 國防委員會 委員이었던 장성택 勞動黨 行政府長의 副委員長 昇進은 큰 注目을 받았다. 金正恩 後繼의 可視化 以後 權力의 實質的인 2人者로 인정받아온 그가 後繼體制의 後援者이자 過渡體制의 리더라는 位相을 對內外에 誇示한 一種의 이벤트였다. 黨代表子 大會를 앞두고 그의 側近들이 黨 要職에 任命되는지 與否가 焦眉의 關心事로 떠오른 것 亦是 이 때문이었다.

    張成澤을 中心으로 하는 過度權力의 登場은 김정일 委員長 死後 革命偉業의 完成과 金正恩 後繼體制의 完結이라는 對外的 名分을 갖고 있다. 그러나 問題는 한番 登場한 過度權力이 果然 金正恩 後繼體制 完結이라는 애初의 目標에 머물 것인지에 對한 疑問이다. 北韓 權力體制의 特性上 過度權力의 首長인 張成澤은 金正恩이 守令의 자리에 올라서는 瞬間 가장 먼저 除去해야 할 政敵(政敵)李 되고 만다. 앞서 살펴본 SK의 境遇는 그 가장 的確한 實例다. 더욱이 平壤은 이미 김정일 後繼 構築의 最大 功臣이었던 三寸 김영주가 金 委員長의 實權 掌握 以後 어떻게 除去됐는지 똑똑히 지켜본 바 있다. 權力의 生理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張成澤은 果然 自身의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게 될까.

    最大의 伏兵

    장성택이 主導하는 過度權力은 一定部分 北韓 體制의 變化를 試圖할 것이라는 觀測이 支配的이다. 金正恩으로의 權力移讓을 最大限 늦춰가며 中國과 손을 잡고 北韓을 새로운 改革·開放의 張으로 끌고 갈 可能性도 占쳐진다. 中國 亦是 北韓 內部 政治에 對한 介入을 露骨化할 수 있다. 北韓이 核을 가진 채 過去의 受領體制로 復歸하는 것보다는 張成澤 體制를 통해 中國式 社會主義 모델을 받아들이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判斷하게 된다면, 一種의 暗默的 合意가 만들어질 蓋然性은 充分하다. 勿論 이 境遇 金正恩은 張成澤과 軍部 等 北韓의 파워엘리트 사이의 權力鬪爭 속에서 犧牲羊으로 轉落할 可能性도 있다.

    SK의 境遇에서 確認할 수 있듯, 過度權力이 애初의 目標 以上을 욕심내는 것은 리더 한 사람의 變心 때문이 아니다. 過渡體制 안에서 힘과 利益을 共有했던 核心그룹의 멤버들이 ‘世上이 바뀌는 瞬間’ 닥쳐올 權力喪失이나 以後 自身이 놓이게 될 處地에 對해 恐怖感을 느끼는 瞬間 새로운 葛藤이 胚胎되는 것이다. 어쩌면 過渡體制의 리더 個人은 先代와의 約束을 지킨 美談의 主人公으로 남을지 모르지만 周邊 人物들의 境遇는 이야기가 全혀 다르다. 正統性을 가진 새 權力이 過渡體制의 構成員들을 全面的으로 包容할 可能性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張成澤 個人의 性格이나 姻戚이라는 因緣만 놓고 順調로운 3段階 權力移讓을 점치기 쉽지 않은 理由다.

    앞서 말했듯 손길승 會長의 過度權力이 崔泰源 會長 體制로 쉽게 移讓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大選資金이라는 政治的 事件에 휘말리면서 더 以上 그룹을 이끌어갈 名分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平壤의 境遇는 企業이 아니라 國家權力, 그것도 地球上에서 가장 强力한 絶對權力에 關한 問題다. 單純히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목숨 그 自體를 겨누는 싸움이다. 果然 張成澤은, 或은 그의 周邊 人物들은, 金正恩 後繼體制가 完成되어가는 어느 瞬間 生命의 不安까지 무릅쓰고 權力을 내놓을 수 있을까. 물러서지 않기 위해 悽絶한 鬪爭을 覺悟하는 것이 훨씬 合理的인 行動 아닐까. 아직 젊은 後繼者 金正恩의 未來 或은 北韓의 순조로운 權力 世襲을 威脅하는 가장 큰 伏兵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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