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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卒業하면 權力層 ‘一等사윗감’|新東亞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卒業하면 權力層 ‘一等사윗감’

  • 鑄成하│東亞日報 國際部 記者 zsh75@donga.com│

    入力 2009-09-10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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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日成綜合大學은 名實相符한 北韓 最高大學이다. 김정일 北韓 國防委員長도 이 大學을 卒業했다. 北韓 住民들은‘김대’라고 略稱한다. 1946年 10月1日 開校한 김대는 그동안 7萬7000名假量의 卒業生을 輩出했다. 김대보다 한 달 앞서 1946年 9月1日 開校한 서울大는 27萬9521名의 卒業生을 輩出했다. 南韓은 SKY로 表現되는 3個 大學이 競爭 關係이지만, 北韓에서 金臺는 他 大學과의 比較가 不可할 程度로 獨步的인 位置를 차지한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일성綜合臺 前景. 왼쪽 建物이 22層의 社會科學部 建物이고 가운데 建物이 本貫이다.

    “야,어떤 새끼가 오늘 淸掃當番이야. 나와.”김일성종합대학의 寄宿舍 複道에서 한 上級生이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그 앞에 午前 講義를 마치고 點心 먹으러 寄宿舍에 내려왔던 新入生들이 머리를 푹 숙이고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접니다” 하고 기죽은 목소리로 그날 當番이 앞으로 나서는 瞬間 上級生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임마, 너 때문에 우리 學部 淸掃點數가 5點이나 깎였어.”

    한참 씩씩대면서 주먹을 휘두르던 그는 갑자기 “全部 複道에 엎드려” 하고 소리를 지른다. 校服을 입은 新入生들이 複道에 엎드리자 그는 “複道 끝까지 기어갔다 와. 淸掃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은 몸으로 淸掃하는 法을 배워야 해”라고 指示했다.

    侮蔑感을 속으로 삼키며 길이 約 80m나 되는 寄宿舍 複道를 기어가던 新入生들 中엔 나도 있었다. 그때가 大學 生活을 막 始作해 며칠 안 됐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갈까. 이런 生活을 果然 견딜 수 있을까.’ 入學 初期 그런 懷疑感이 每日같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끝내는 7年을 버티고 卒業證을 받았다.

    大學 生活을 回想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배고픔이고 두 番째는 下級生 時節에 시달린 暴行이다. 그러나 이런 暴力도 地方出身 寄宿舍生들에게만 限定된 것이었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대 構內 龍南山 위에 있는 김일성 銅像.

    最近 김대의 한 해 入學生은 1500~ 2000名. 이 中 平壤 出身 學生과 地方 出身 學生의 比率은 大略 半半이다. 地域割當制 때문이다. 高位幹部가 많이 居住하는 平壤의 人口는 北韓 全體의 10分의 1밖에 되지 않지만 김대 學生의 折半이 平壤 出身 學生이다. 그만큼 平壤 市民은 優待를 받는다.

    北韓에는 平壤을 除外하고 道, 特別市가 모두 11個 있다. 그러니 地方의 한 個 道에서는 한 해에 約 70名이 金臺에 入學하는 셈이다. 이 70名 中에서 折半 以上은 다시 道 所在地 幹部 子女 몫이기 때문에 實際 一般 地方 郡(郡)에서는 1年에 김대 入學生을 1~2名 排出하기도 힘들다.

    經歷別로는 高等中學校를 卒業하고 바로 大學에 온 ‘直通生’과 除隊軍人 比率이 半半 程度다. 社會職場을 다니다 大學에 온 一名 ‘現職生’도 少數 있다. 除隊軍人들은 社會科學部를 選好한다. 머리를 싸매고 工夫하지 않아도 되는데다 高位幹部가 되는 데는 社會科學 專攻이 有利하다. 實際 社會科學部 在學生의 70% 以上이 除隊軍人이며 直通生은 自然科學部에 많다. 女學生 比重은 約 20% .

    김대에선 나이 差異가 最大 10年씩 나는 學生들이 같은 學級에서 工夫한다. 直通生들은 除隊軍人을 ‘아무개 同志’라고 부른다. 하지만 뒤에선 除隊軍人을 통틀어 ‘第쌈이’라는 俗語로 부른다.

    北韓에서 公式的인 軍 服務 期間은 10年이지만 除隊軍人들은 普通 5~7年 軍 服務를 하고 大學에 온다. 高位幹部들이 自己 子息을 軍에 보내 일찍 勞動黨에 入黨시킨 뒤 年限이 다 차기 前에 大學으로 뽑아오기 때문이다. 除隊軍人·勞動黨員·김대 卒業生, 이 세 가지 資格은 北韓 最高의 權力階層에 堂堂하게 包含될 수 있는 徵標다.

    6寸까지 따지는 촐新成分調査

    金臺에 入學하려면 徹底한 出身成分 調査를 거쳐야 한다. 大略 6寸까지 따진다고 들었다.

    北韓에서 잘나가는 세 部類의 사람들을 ‘줄기’라는 말에 빗대는데 첫째가 ‘白頭山줄기’다. 김일성과 함께 抗日鬪爭을 했던 사람들의 後孫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들은 大槪 金臺를 卒業한다. 둘째로 잘나가는 줄기는 ‘낙동江줄기’로 6·25參戰者 家族이다. 이들 亦是 大多數가 幹部로 任命된다. 셋째 줄기는 ‘傭男山줄기’로 金 委員長의 母校인 김대 卒業生을 意味한다. 龍남산은 김대 構內에 있는 나지막한 山이다.

    김대는 現在 3個 單科大와 11個 學部로 構成돼 있다. 1999年까지는 社會科學部로는 經濟·歷史·哲學·法學·朝鮮語文·外國語文이 있었고, 自然科學部로는 數學·物理·化學·生物·地理·地質·原子力·自動化 順으로 모두 14個 學部가 있었다. 하지만 1999年 自動化學部가 컴퓨터科學大學으로, 法學部가 法律大學으로 바뀐 데 이어 2001年에는 朝鮮語文學部가 文學大學으로 바뀌었다. 除隊軍人 比率이 가장 높은 곳은 人氣 專攻인 經濟學部와 法學大學이다. 除隊軍人들이 가장 적은 學部는 어려운 外國語를 가르치는 外國語文學部와 複雜한 數學公式과 씨름해야 하는 數學部 等이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대 圖書館 內部.

    김대에선 學生들이 軍隊式으로 生活한다. 大學 全體가 한 個 連帶로 편제됐다. 聯隊長으爐는 屬望받는 除隊軍人 出身 大學生이 選拔된다. 南韓으로 치면 總學生會長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先發 方式이 다르다. 김대 聯隊長은 大學 黨委員會가 임명한다. 김대 勞動黨委員會나 靑年同盟 幹部들 中에 聯隊長 出身이 많다. 連帶 指揮部는 數十 名의 除隊軍人 大學生으로 構成된다.

    各 學部는 大隊 編制로 連帶 傘下에 모두 14個 大隊가 있다. 그리고 學年은 中隊, 學級은 小隊라고 한다. 以外 別途로 女子 連帶가 있다. 이는 男子들이 女學生들의 放課 後 生活을 統制할 수 없기 때문에 寄宿舍 生活統制用으로 臨時로 만든 編制다.

    平壤 出身 學生들은 自己 집에서 다닌다는 意味로 ‘自家生’이라고 한다. 김대에는 自家生과 地方 出身인 寄宿舍生이 半半이다.

    平壤 學生들은 집에서 通學하기 때문에 組織生活에 別로 얽매이지 않는다. 午前 8時까지 登校해 午前에 1時間半짜리 講義 3科目을 受講한 뒤 낮 1時에 도시락을 먹고 午後 日課에 參加한다. 김대의 午後 日課는 勞動黨 政策學習, 軍事訓鍊, 野外行事 等으로 構成되는데 한 番도 거르는 날이 없다. 自家生은 저녁食事 時間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寄宿舍生들은 그때부터 다시 軍隊와 같은 統制를 받게 된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대 正門. 위쪽 ‘김일성종합대학’ 글씨는 김정일國防委員長 作品이다.

    軍隊보다 고된 김일성대 寄宿舍生活

    寄宿舍生의 日課는 大略 이렇다.

    午前 5時30分 氣象口令이 떨어지면 밖에 大隊別로 모여 아침運動을 한다. 이어 2學年까지 低學年 學生들은 內部와 外部 淸掃를 한다. 淸掃 結果는 連帶 參謀들이 檢閱해 點數를 매긴다. 化粧室 便器는 손으로 닦아야 하며 水道꼭지도 甓돌가루를 硏磨劑로 써서 반짝반짝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침 먹는 것도 順坦치는 않다. 노래를 부르고 口號를 외치면서 節度 있게 行進하지 못하면 連帶 參謀들이 繼續 反復 훈련시킨다.

    저녁에는 밥을 먹고 淸掃를 하고 9時 半부터는 夜間 點檢을 받는다. 하루 點檢 中에 가장 힘든 것이 바로 夜間 點檢이다. 寄宿舍生들은 複道에 한 줄로 쭉 늘어서서 點呼를 받는다. 이어 大隊長부터 參謀까지 次例로 한마디씩 하고 들어가면 30~40分은 훌쩍 넘긴다. 點呼 時間에 졸다가 넘어지는 일도 種種 벌어진다.

    點呼가 끝나면 下級生들이 眞짜로 緊張하는 時間이 다가온다. 그날 淸掃에서 좋은 評價를 받지 못했을 때, 또는 大隊 參謀에게 承認받지 않고 外出한 事實이 있으면 같은 號室을 쓰는 學生 모두 緣坐制로 處罰받는다.

    이런 處罰도 있다. 各 號室 門턱으로 물이 넘쳐 흘러들지 않을 程度의 높이, 卽 2~3㎝ 높이로 約 80m 길이의 複道에 洋동이로 물을 붓는다. 이 물을 밀대 等을 使用하지 말고 오직 손 걸레질로만 훔쳐내야 한다. 그리고 마른걸레로 물氣를 徹底히 없애야 한다. 이 淸掃를 하고 나면 새벽 1時가 넘는다.

    軍에서 鍛鍊된 除隊軍人조차 “大學이 어떻게 軍隊보다 더할 때가 있느냐”고 혀를 내두를 地境이다. 處罰淸掃보다 더 싫은 일도 있다. 寄宿舍는 上級生 號室과 下級生 號室이 서로 붙어있는데 房 칸막이가 合板이었다. 或如 處罰받지 않고 點檢이 끝나 號室에 들어오면 옆房에서 “야! 203號”하고 부르는 소리에 精神病에 걸릴 程度였다. 入學 初期에 뭣 모르고 “예”하고 對答하면 “方今 對答한 새끼 여기 오라”는 號令이 날아들었다. 기다리는 것은 “걸레 빨아오라” “물 떠오라”는 式의 심부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 203號”하고 부르면 서로 눈치를 보기 始作했다. 그러나 이것도 別로 賢明한 方法이 아니었다. 對答이 없으면 “方今 소리 났는데. 니들 다 죽었어”하면서 슬리퍼 질질 끌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漸次 適應한 뒤 우리는 부르는 소리가 나면 서로 눈짓으로 順番을 定해 對答하곤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떠한 抵抗도 할 수 없었다. 기껏 하는 反抗이 食水를 떠오라고 시키는 上級生에게 反抗의 表示로 化粧室 浴槽 물을 퍼서 가져다주는 程度. 그런데 이 方法도 곧 들통이 났다. 그 學生은 이가 몇 代 부러져 病院에 한 달 동안 入院한 뒤 집에 내려가 석 달 동안 治療받고 왔다. 毆打를 한 上級生들은 큰 處罰을 받지 않았다. 以後 上級生들은 우리가 물을 떠가면 꼭 먼저 마셔보게 했다.

    殺伐한 大學 過程을 견디면서 김대 學生들은 苦難과 逆境에 剛한 사람들로 鍛鍊돼간다. 幹部가 돼서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式의 處罰을 내려야 하는지 本能的으로 배운다고 할 수 있다.

    賂物로 學點을 사기도

    안타깝게도 김대에서 工夫의 重要性은 漸漸 떨어지고 있다. 나의 境遇 大學 卒業 때까지 모두 30個 科目을 배웠다. 이 中 點數가 나오는 科目은 24個. 나머지 6個는 合格, 不合格으로만 評價한다. 30個 科目 中 大學 全體 共通科目이 17個, 專攻科目은 13個 程度 된다. 김일성主義勞作, 김일성主義基本, 革命歷史, 主體哲學, 第2外國語 等이 共通科目이다. 祖國統一 및 南朝鮮問題, 美日帝國主義 朝鮮侵略社, 環境保護와 같은 異色科目도 共通科目에 包含된다.

    卒業試驗은 김일성主義勞作, 外國語, 專攻科目, 卒業論文이라는 4個 科目에 한해 치른다.

    1980年代까지는 大學에 工夫하는 雰圍氣가 그나마 좀 서 있었다. 大學 入學 初期에는 科目 卒業試驗에서 두 科目을 落第했다고 留級시키고 그 뒤에도 落第를 면치 못하자 퇴학당하는 學生도 보았다. 南韓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有名 집안의 子息인데도 그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1990年代 中盤 ‘苦難의 行軍’을 거치면서 大學에서 工夫 雰圍氣는 確然히 사라졌다.

    以前에는 敎授에게 賂物을 주고 좋은 學點을 받는다는 것은 想像도 못했지만 配給이 끊긴 敎授들 中에 賂物을 받는 사람들이 생기기 始作했다. 나도 그런 敎授에게 當해 여러모로 보아 分明 最優秀를 받았어야 할 科目에서 中間 成跡밖에 못 받았다. 勿論 賂物을 쓴 除隊軍人은 모두 最優秀 成績인 5點을 받았다.

    이것 때문에 當時 적잖게 憤怒했지만 이것이 돈 있는 사람이 點數도 잘 받는 社會 不條理에 對해 漸漸 더 意識化되는 契機가 됐다. 그 敎授에게 고마운 생각도 若干 있다. 그가 아니었으면 果然 나의 人生이 오늘에 이르렀을까.

    賂物 받는 敎授들이라고 어찌 心的 苦惱가 없으랴. 金臺에 있는 2600餘 名의 敎授는 나름 北韓의 最高 知性이라는 自負心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捕盜廳이라 어쩔 수 없었다. 敎授 體面에 장사도 할 수 없고 家族을 살릴 길은 良心을 파는 일뿐인 걸. 그럼에도 끝까지 自尊心을 지키는 敎授들도 있었다. 뼈만 앙상한 몸을 겨우 끌고 大學에 出勤하는 盧敎授들을 보면서 “先生님, 賂物을 받더라도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先生님은 굶어 돌아가시기엔 너무 아깝습니다”라고 속으로 외친 적도 있었다.

    工夫하는 雰圍氣는 除隊軍人들이 다 흐려놓곤 한다. 入學試驗도 除隊軍人들끼리 따로 친다. 相對評價人 셈이다. 이렇게 入學한 除隊軍人들은 最高의 秀才인 直通生들을 工夫로는 絶對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賂物을 들고 敎授들을 찾아다닐 생각을 하는 것이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2008年 김대에서 開催됐던 大花宮 遺跡 展示會.

    金臺에 오는 除隊軍人치고 一般部隊에서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정일 國防委員長의 親衛隊라고 할 수 있는 扈衛局 出身이 相當히 많았다. 이들은 試驗도 形式上으로만 치고 入學한다.

    平素 自己가 어리석어 原子力學部에 왔다고 늘 푸념하던 한 扈衛局 出身 除隊軍人의 事例다. 그가 扈衛局에서 除隊하기 前 한 幹部가 大學과 學部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해 除隊할 사람 中에 職級이 높은 軍人부터 自己가 志望하는 學部에 表示를 한다. 10年 동안 바깥世界와 徹底히 隔離당한 채 軍服務를 해온 이 除隊軍人은 原子力學府라는 이름에 ‘必’이 꽂혔다. 原子力學部는 新生 學部라 10年 前 그가 軍에 入隊할 때까지만 해도 없던 學部였다. 새로 생긴 것이니 뭔가 멋있겠다고 생각하고 志望해 大學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卒業生들은 放射線을 쪼일 確率이 높은 職種에만 配置됐다. 그는 工夫에 별다른 興趣度 없었다. 그래도 그는 賂物을 쓰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點數로 大學을 卒業했고 卒業하기 前 高位 幹部의 딸을 만나 專攻과는 無關한 分野의 幹部로 任命됐다.

    大學을 卒業하고 좋은 곳에 配置받을 때 가장 重要한 것은 經歷과 뒤를 봐줄 수 있는 權力이다. 點數는 參考事項일 뿐이다.

    平壤 出身도 그러하지만, 特히 地方 出身 除隊軍人들은 卒業할 때가 다가오면 女子 찾기에 온 힘을 다 기울인다. 平壤의 權勢 있는 집 女子를 얻으면 運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便 權力 있는 집안도 除隊軍人에 黨員이면서 金臺를 卒業한, 이를테면 經歷이 出衆한 사위를 選好한다. 昇進할 資格을 充分히 갖추면 口舌에 휘말리지 않고도 充分히 뒤를 봐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後날 自己가 물러나도 사위 德을 볼 수 있다. 김대의 除隊軍人들은 누가 더 權勢 있는 집 딸을 얻는지 競爭이라도 하듯이 선보러 다닌다. 그리고 大槪 卒業하기 前에는 程度의 差異는 있지만 큰 意味에서 볼 때 權勢家의 사위라는 目標에 到達한다.

    金臺에 工夫하는 雰圍氣가 서지 않았다고 해서 김대 卒業生의 能力을 過小評價하면 안 된다. 어쨌든 그들은 여러 檢證을 거쳐 最高로 認定돼 選拔됐다. 除隊軍人들度 工夫實力은 떨어져도(그중에는 正말 熱心히 工夫하는 除隊軍人들度 있다) 軍이라는 울타리에서 熾烈한 競爭을 거쳐 推薦狀을 받은 사람들이다. 學業 成績이 한 人間의 能力을 代辯하는 唯一한 徵標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술 담배 하다가 退學당하기도

    直通生 選拔 시스템도 나름 괜찮다. 北韓에는 學院이 없다. 머리는 別로 좋지 않지만 高額 課外 시스템을 통해 成績을 높일 수 있는 機會가 없다. 平等한 條件下에서 競爭하다보니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골라지는 것은 當然한 일이다.

    김대의 規律은 매우 嚴格하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다 摘發되면 運이 나쁜 境遇 退學까지 當한다. 그렇지만 筆者가 김대 在學할 때는 술 담배와 無關한 學生은 거의 없었다. 元來 北韓 男性의 吸煙率은 世界的 水準이다. 90% 以上이 아닐까 생각한다.

    술과 담배 하는 學生을 摘發하기 위해 連帶 參謀들이 糾察隊 腕章을 달고 大學 構內는 勿論 大學 周邊까지 샅샅이 搜索하곤 했다. 그래서 下級生 때는 大學에서 20分이나 걸어 나가 가슴에 단 大學 배지를 뗀 뒤 담배를 피웠다. 그 程度 걸어 나가지 않으면 糾察隊의 團束區域에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침食事를 한 뒤에는 時間이 없어 그렇게 멀리 나갈 순 없다. 이때는 化粧室이 뽀얀 煙氣로 차는데 化粧室에서 담배를 피우는 學生은 들켜도 누가 敢히 뭐라고 하기 힘든 上級生들이었다.

    밤이면 寄宿舍 正門에 糾察隊가 지켜 서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學生이 없는지 團束한다. 같은 號室 同僚 中에 生日을 맞은 사람이 있으면 號室 學生들이 大槪 밖에 나가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하지만 形便이 如意치 않으면 寄宿舍 號室에서 生日을 祝賀해줄 때도 있다. 이때는 團束이 좀 緩和되는 밤 12時가 넘기를 기다렸다가 窓門과 出入門을 毯요로 가리고 불빛이 絶對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 아예 불을 켜지 않고 生日 파티를 하는 境遇도 많다. 이런 狀況에서 목소리도 最大限 낮추어야 한다. 糾察隊가 새벽 2~3時까지 寄宿舍를 無作爲로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糾察隊에 團束되는 境遇 賂物로 最大限 빨리 事態를 撫摩해야 한다. 담배 피우다 걸리면 普通 담배 1堡壘를 賂物로 주었다. 糾察隊員들이 齷齪같이 巡察하는 理由도 무슨 使命感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런 賂物에 재미가 들었기 때문이다.

    김대 學生들이 授業엔 빠져도 이것만은 재미있어서 無條件 參加한다는 會議가 있다. 바로 두세 달에 한 番씩 全校生이 體育館에 모여서 進行하는 思想鬪爭會議다. 이 會議는 退學 危機에 몰린 學生들이 마지막 審判을 받는 자리다. 싸움질, 도둑질, 吸煙, 長期 無斷缺席, 妊娠 等 事由도 가지各色이다.

    思想鬪爭會議의 自我批判 舞臺에 올라가라는 通知를 받으면 折半 以上의 學生이 도망쳐버린다. 그냥 退學당하겠다는 뜻이다. 그래도 批判 舞臺에 올라오는 學生들은 마지막 希望의 끈을 안고 있는 境遇다. 全校生 앞에서 自我批判만 잘하면 退學을 면할 수도 있다고 幹部들이 說得하는 것이다. 勿論 10名 中 한 3名은 退學을 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批判을 잘했어도 퇴학당하는 學生도 많다. 北韓에서 公開 銃殺할 때 利用하는 方法과 恰似하다. 死刑囚에게 群衆 앞에서 自我批判만 잘하면 그냥 監獄行이라고 回游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死刑囚는 群衆 앞에서 熱心히 自我批判을 한다. 다 끝나면 “저런 놈을 容恕할 수 있습니까” 하고 群衆에게 물은 뒤 死刑囚가 미처 反抗할 사이 없이 눈과 입을 막고 處刑한다.

    記憶에 남는 史上鬪爭會議 場面 中에 이런 일도 있었다. 脂肪 除隊軍人이었는데 除隊한 뒤 故鄕에 가자마자 父母가 定해준 女性과 約婚式을 올렸다. 山골에서 10年 軍服務를 하다보면 모든 女子가 다 예뻐 보인다. 그런데 이 除隊軍人이 運 좋게 金臺에 入學하면서 問題가 생겼다. 平壤에서 살다보니 눈이 높아진 것이다. 親舊들이 돈 많고 權勢 있고 예쁜 女性들에게 장가드는 것을 본 이 除隊軍人은 自然히 故鄕에 두고 온 約婚女가 싫어졌다. 그래서 放學에 내려갔다가 破婚을 宣布하고 올라왔다.

    破婚 後 退學危機에 몰린 김대 學生

    火가 난 이 女性이 大學 黨委員會에 아무개가 아무 理由 없이 自身을 버리려 한다고 便紙를 보냈다. 그 便紙 때문에 이 除隊軍人은 自我批判을 해야 했다. 批判이 다 끝나자 主席團에서 거불거불 졸던 總長이 눈을 뜨더니 잠에 醉한 소리로 말했다.

    “동무, 그래서 살겠다는 거요. 안 살겠다는 거요.”

    “살겠습니다.”

    “그런 작은 목소리에 무슨 決心이 깃들어 있다고 그래.”

    그러자 除隊軍人이 “살겠습니다”하고 크게 소리쳤다.

    體育館 安易 키득키득 웃는 소리로 修羅場이 됐다.

    “어이. 靑年同盟 祕書. 저 동무가 저렇게 굳게 決意했으니깐 한番 지켜보자고.”

    이렇게 돼서 그 除隊軍人은 退學을 避할 수 있었다. 그가 正말 約束을 지켰는지는 알 수 없다. 一旦 會議만 벗어나면 以後 約婚女와 조용히 合意해 갈라져도 問題를 일으키지만 않으면 괜찮다. 北韓이란 社會에선 示範 케이스(本보기)에 걸린다는 것이 正말 무서운 일이다.

    大學 生活 中에는 全校生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누구나 參加하기 싫어하지만 반드시 參加해야 하는 競演도 있다. 그게 바로 ‘問答式 學習競演’이라는 것이다. 放學을 해서 집에 갈 때 大學에선 A4 用紙로 數十 張이 되는 問題集을 筆寫하게 한다. 집에 가서 다 외우라는 것이다. 問題集에는 金 富者의 勞作 解說, 所謂 德性(德性) 硏究 等이 담겨 있다.

    放學이 끝나면 全校生은 사흘 동안 問答式 競演을 한다. 이 競演은 學部別 토너먼트 方式으로 進行돼 優勝學部를 가린다. 두 個 學部 學生 數千名이 한자리에 모여 제비뽑기로 大會에 나올 相對 學部 學生들을 뽑아내 任意의 問題를 提示한다. 10餘 名의 學生을 評價해 學部의 成跡을 決定한다. 탈락하면 學部 全體에는 非常이 걸린다. 그리고 뽑혀 나갔지만 對答을 잘하지 못한 學生은 公共의 敵이 되고 엄청난 시달림을 받는다. 對答을 잘해야 할 뿐 아니라 質問者로 뽑히면 質問도 巧妙하게 해야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問題로 提示된 ‘김정일이 大學時節 비가 옴에도 不拘하고 다른 學生들과 建設場에서 함께 일했다’는 內容의 逸話를 한 學生이 쭉 이야기한 뒤 相對 學部에서 質問者가 제비뽑기로 選拔됐다. 갑자기 數千 名 앞에 나서게 된 그 學生은 唐慌한 나머지 “그런데 그날 正말 비가 왔습니까”하는 어처구니없는 質問을 하고 말았다. 多幸히 退學은 當하지 않았지만 大學 卒業 내내 그 일로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學部의 한 女學生은 點數를 깎아먹고 大同江에 나가 自殺을 企圖하기도 했다.

    各 學部는 좋은 成跡을 받기 위해 放學이 끝나는 날보다 사흘 일찍 地方學生들을 올라오게 만든 뒤 問題들을 暗記시킨다. 勿論 이는 反則이지만 일찍 學生들을 부르지 않는 學部가 없다. 그런 熱誠도 보이지 않았다가 탈락하면 學部 幹部들이 批判을 받기 때문이다. 한 달밖에 안 되는 放學이 이 때문에 또 短縮된다. 苦難의 行軍 時期에는 먼 地方의 學生들, 實例로 양강도 惠山이나 咸鏡北道 裸地 等에 사는 學生들은 4~5日씩 汽車를 타고 가야 했다. 停電으로 汽車가 隨時로 멈춰 섰기 때문이다. 집에 오가는 길에 열흘 넘게 虛費하고 競演 때문에 또 3日 短縮되니 放學은 한 달이지만 집에는 보름도 있지 못하는 境遇도 많았다.

    學部 간 熾烈한 競爭이 벌어지는 또 하나의 行事는 校內 體育大會다. 김일성 生日 等에 體育大會가 벌어지는데 이때 하이라이트는 蹴球競技다. 蹴球는 自然科學部보다는 除隊軍人이 大多數인 社會科學部에서 늘 優勝을 차지했는데 特히 經濟學部가 强하다. 恒常 優勝 門턱에서 挫折된 哲學部가 한番은 大學 內 體育團人 龍南山體育團 축구팀을 통째로 입학시킨 일도 있었다. 特採 入學이 一定部分 認定되기 때문에 이런 일도 可能한 것이다. 傭男山體六段은 4·25體育團, 平壤體育團 等 北韓 有名 體育團 中에 序列 6位로 評價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 팀을 이루어 발을 맞춰온 프로選手들도 結局 經濟學部에 敗北했다. 經濟學部에는 隱退한 有名 國家 代表選手가 많다.

    2000年代에 들어서면서 敎育課程안을 社會科學部는 4年, 自然科學部는 5年 안에 無條件 끝내라는 指針이 떨어졌다. 예전보다 2年 程度 빨리 卒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2年에는 大學을 卒業하고 반드시 軍服務를 해야 한다는 指示도 떨어졌다. 以前에는 金臺를 나오면 軍에 나가지 않아도 됐고 나가는 境遇에도 少尉로 任官했지만 이때부터 大學을 卒業하고 ‘下級兵士’로 軍服務를 始作해야 했다. 軍服務는 大學 期間을 勘案해 4~5年만 하면 됐다.

    김대 學生들은 在學 期間 各種 行事와 努力動員에 參加하는 일도 많다. 年中 無條件 해야 하는 努力動員은 農村支援이다. 봄에 한 달, 가을에 20日 程度 黃海道나 平安南道 農村에 가서 모내기와 收穫을 도와주어야 한다. 平壤 學生들은 일이 힘들다고 農村動員을 싫어하지만 寄宿舍生들은 規律生活에서 조금이나마 解放될 수 있기에 오히려 반긴다. 돈 있는 平壤 學生들은 後方 支援이라는 名色下에 빠져서 집에서 노는 境遇가 많다. 國家의 保障이 微弱하기 때문에 學級이 먹을 수 있는 食資材를 自體로 調達해 解決해야 하는데 이런 名目으로 빠지는 것이다. 돈 없는 學生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大學 2學年 때는 6個月間의 교도生活이 기다리고 있다. 平壤고사포병司令部에 나가 軍服을 입고 對空砲 陣地를 지키는 일이다. 半 年 동안 軍人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TV畵面에서 자주 보는 各種 퍼레이드를 準備하느라 動員되는 때가 많다. 1990年代에는 大學生들이 軍 閱兵式에만 動員됐는데 2000年부터 集團體操까지 參加하게 됐다. 2000年 訪北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前 美 國務部 長官이 參觀했던 아리랑集團體操의 前身 ‘百戰百勝 朝鮮勞動黨’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閱兵式과 集團體操는 1年 넘게 準備한다. 午前에 工夫하고 午後에 땡볕 속에서 練習하는 日課가 半 年 넘게 이어지고 授業에서 完全히 빠지는 期間도 석 달이 넘는다. 當然히 工夫할 雰圍氣가 서지 않는다. 特히 빠진 授業은 補充授業을 하는데 대충 며칠 동안 몇 달値를 다 補充한다. 以外 各種 建設場에도 動員될 때가 많다.

    虛飢와의 싸움

    앞에서 말했듯이 寄宿舍生으로서 大學 生活 中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다. 寄宿舍 學生 食事量은 김일성 死亡 前後로 確然하게 갈렸다. 苦難의 行軍이 들이닥치자 김대라고 例外는 아니었다. 밥 量이 너무 적어 寄宿舍生들은 늘 ‘밥을 먹고 나서야 배고픈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밥 먹기 前에는 위가 텅텅 비어 感覺조차 없다는 말이다.

    休日에 同僚들이 다 外出하면서 남겨둔 食券으로 食堂에서 14人分을 비닐封紙에 담아와 둘이 한 끼에 다 먹을 程度로 밥 量이 적었다.

    寄宿舍에선 大隊 學生 幹部와 一般 學生의 밥 量이 差異가 난다. 大隊 幹部들은 學部가 줄을 서서 밥을 먹는 것을 統制한 뒤 第一 마지막에 밥을 먹는데 食堂 아줌마들이 幹部들에게는 밥을 一般 學生의 2倍 以上 꾹꾹 눌러 담는다. 하지만 一般 學生들은 큰 不平을 하지 않는다. 北韓에서 이런 特權 意識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런 環境에서 배우고 社會에 나가 幹部가 되는 김대 學生들은 卒業 뒤에도 特權을 當然하게 여긴다.

    苦難의 行軍 時期에 김대 學生들도 周邊 農場에 벼 뿌리를 캐러 나간 일이 있다. 벼 뿌리를 代用食糧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實際로 벼 뿌리를 먹은 일은 없다. 加工方法이 未洽해 다 썩혀버린 것이다. 地方 大學에선 칡뿌리를 먹은 學生도 많다. 칡뿌리는 몇 番 먹으면 이가 꺼멓게 變하는데 아무리 齒솔질해도 잘 벗겨지지 않는다.

    大學 때 가장 猖披했던 일은 午前 11時만 되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같은 冊床에 女學生과 함께 앉기도 하는데 꼬르륵 소리는 神經을 쓰면 쓸수록 더 나는 것 같았다.

    苦難의 行軍이 始作된 뒤 大學 周邊의 個人집들은 먹고살기 위해 飮食을 만들어 大學生을 相對로 장사를 했다. 飮食이래야 옥수수국수, 頭部, 쉼떡(象牙떡), 술 等이 고작이다. 大學生들은 외상, 低糖 文化에 빠르게 適應해갔다.

    敎授들이 배고파 講義를 못할 地境이 되고 學生들 中에도 營養失調 患者들이 續出했다. 김대는 傘下에 農場과 水産組合, 炭鑛 等 副業基地를 갖고 있다. 김대 全體 敎職員은 5600名假量인데 이 中 敎授가 2600名이고 나머지 3000名 大多數가 農場 및 水産, 炭鑛 等에서 일한다. 하지만 이런 農場들도 苦難의 行軍時期에 自體 農場員들을 먹여 살리기 힘든 形便이 돼 大學에 別 도움이 못됐다.

    김대의 어려운 形便이 金 委員長에게 報告됐다. 그러자 그는 김대 所屬 外貨벌이 會社를 만들라는 特別指示를 下達했다. 그리고 그 會社에 많은 特惠를 주었다. 그 外貨벌이 會社가 벌어오는 糧穀으로 1990年代 末부터 大學의 食糧事情은 많이 安定됐다. 배부를 程度는 아니지만 밥 量도 조금씩 늘어났다.

    2001年頃 金 委員長의 指示로 고기겹빵(햄버거) 工場이 平壤에 세워졌다. 여기서 生産된 고기겹빵이 金代와 김책공업종합대학, 金日成高級黨學校 在學生들에게 優先的으로 供給됐다. 特히 注目할 點은 自家生들에게도 點心을 싸오지 않게 하고 고기겹빵을 供給했던 것. 고기겹빵이 크기는 작아도 場마당에서 비싼 價格에 去來됐기 때문에 寄宿舍生들은 이 빵을 모아두었다가 場마당에서 팔고 代身 싸고 量이 많은 飮食과 바꾸어 먹었다.

    狂牛病 危險 소고기를 먹다

    고기겹빵에 들어가는 쇠고기는 어디서 調達했을까. 2001年 유럽에서 狂牛病이 돌았다. 獨逸에서만 狂牛病에 걸린 소가 16마리 發見됐다. 獨逸은 30個月 以上 소 40萬마리를 屠畜했다. 그런데 北韓이 이 쇠고기를 가져가겠다는 意向을 밝혀 모두 2萬7000t의 冷凍쇠고기가 北韓에 들어갔다. 이 쇠고기는 모두 고기겹빵에 들어갔다. 結局 金臺를 包含해 北韓의 秀才들과 特權層들이 다 먹어치운 셈이다.

    當時 北韓이 獨逸産 쇠고기를 어디에 消費했는지는 獨逸 政府나 韓國 政府도 아직까지 把握하지 못한 狀態다. 그 쇠고기를 누가 먹었는지가 이 글을 통해 最初로 公開되는 셈이다.

    우스운 일은 지난해 南韓에서 狂牛病 論難으로 因한 촛불示威가 벌어지자 北韓 側이 “南朝鮮 人民들의 生命을 팔아먹는 親美 賣國奴”라면서 南韓 政府 非難에 熱을 올리고 示威를 積極 督勵한 點이다.

    김대 안에는 祕密 讀書會 비슷한 것도 存在했다. 禁止된 書籍들이 다양한 方法으로 돌아다니면서 김대생들에게 外部 世界를 알려주었다. 나에게 가장 큰 衝擊을 준 冊은 ‘美國開館’이라는 圖書. 500쪽 넘는 두꺼운 冊으로 美國에 對한 各種 資料가 다 담겨 있었다. 美國 食糧生産이 한 해 6億t 가까이 되지만 農事에 從事하는 人口는 全體 人口의 2.5%밖에 안 되며 農業 比重도 全體 GDP의 4%度 안 된다는 대목을 읽고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2000萬 人口의 折半 가까이 農業에 매달리고도 한 해 200萬t 좀 넘게 生産하던 當時 形便에선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니 想像도 잘 안 됐다. 그 冊을 基礎로 南韓의 經濟力이 어느 程度일지 熱心히 計算하던 記憶도 있다.

    김일성대에서 읽은 ‘國富論’

    只今 생각해도 ‘美國開館’에 실린 資料는 相當히 正確했다. 그 冊이 누구를 對象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北韓에서 그런 正確한 外部 資料를 읽을 수 있는 階層이 存在한다는 것을 意味한다. 經濟學部 學部長 程度는 그런 資料를 接하지 않을까 推定해본다.

    以外 애덤 스미스의 ‘國富論’, 또 題目은 기억나지 않지만 西獨 中心의 歷史를 獨逸 統一 때까지 西洋의 視角에서 分析한 圖書 等도 記憶에 남는다. 그때 우리는 밤잠을 자지 않고 그런 冊의 重要部分을 筆寫해 돌려보았다.

    金臺에도 反政府的 思考方式을 가진 學生이 적지 않게 存在한다. 그에 對해서는 동아일보 紙面(6月3日子)에 ‘10餘 年 前 그날, 父子世襲에 憤怒했던 김일성대 學友들에게’라는 題目으로 長文의 記事를 적었기에 이 글에서는 省略 한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鑄成하

    東亞日報 國際部 記者

    김일성綜合臺 卒業

    北韓軍 豫備役軍官

    2002年 韓國 入國

    2003年 東亞日報 入社


    김대 卒業生은 特別 管理를 받는다. 卒業해 3年 동안 每年 2回씩 前 卒業生들의 適應實態를 調査한다. 本人이 直接 職場을 찾는 南韓과는 달리 北韓에선 大學 卒業生의 職業을 國家가 定해준다. 김대 卒業生들이 平壤에만 차 넘치지 않도록 地方에 强制로 내려보낸다. 卒業 뒤 같은 大學 博士院(大學院)으로 進學하는 사람도 나라에서 定해준다. 김대의 博士院 規模는 300名 안팎에 不過하다. 博士院을 卒業하면 거의 例外 없이 大學敎授가 되기 때문에 大多數 學生은 博士院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다. 北韓에선 敎授가 別로 人氣 없는 職業이다.

    卒業 뒤 내 同窓들은 全國 各地에 뿔뿔이 흩어졌다. 個中에는 高位幹部가 된 사람도, 外國에 나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甚至於 나처럼 서울에 온 사람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純粹한 젊음과 熱情을 發散하며 한때 어깨를 함께하고 希望을 노래하는 김대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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