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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全世界를 連結하는 아티스트, 강익중|新東亞

그림으로 全世界를 連結하는 아티스트, 강익중

“公共美術은 明朗한 革命, 社會를 흔들어 깨우는 게 藝術家 任務”

  • 뉴욕=이남희│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irun@donga.com│

    入力 2010-08-23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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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x3인치’ 그림으로 巨大한 幸福의 世界를 創造한 美術家.
    • 素朴하고 親近한 日常의 이미지로 世界 平和와 統一을 말하는 運動家.
    • 藝術로 人生의 洞察을 傳하는 ‘萬年 少年’ 作家의 꿈과 希望.
    그림으로 전세계를 연결하는 아티스트, 강익중

    美國 뉴욕 첼시 25番街 첼시아트빌딩 20層 作業室에서 만난 강익중. 作業室 베란다에 서면 맨해튼 道心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익중(50)은 天眞하게 웃는다. ‘中年의 徵候’라곤 찾아보기 힘든 少年의 얼굴을 한 채. “號는 그냥이고요, 이름은 익中입니다.” 華麗한 治粧이 없는 말套는 담백하다. ‘代價(大家)’의 힘은 이토록 꾸밈없는 淳朴함에서 나오는가.

    그는 世界 곳곳에 作品을 남긴 ‘스타’ 設置美術家다. 美國 샌프란시스코 國際空港, 프린스턴視 公立圖書館, 뉴욕 퀸스 地下鐵 메인스트리트驛,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本部, 中國 상하이엑스포 韓國館(10月까지 設置)…. 발길 닿는 곳마다 그가 만든 超大型 造形物을 만날 수 있다. 그의 作品은 수많은 별이 모인 ‘巨大한 宇宙’다. 작은 캔버스 그림 數千 點을 모아 ‘또 하나의 世上’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진 서울 光化門 復元工事 가림幕 設置그림 ‘광화에 뜬 달’도 그가 創造한 宇宙다. 60×60cm의 달缸아리 그림 2616個로 構成된 이 作品은 높이가 27m, 幅이 41m에 達한다. 그가 每日 18時間, 6個月間 붓 代身 손으로 一一이 그려나간 그림은 옛 陶工의 魂이 느껴질 程度로 敬虔하다. 山勢와 都心의 風景을 아우르는 가림幕 앞을 지날 때마다, 그의 무시무시한 에너지와 想像力에 壓倒되곤 했다.

    “不幸은 散漫한 것”

    지난 7月, 大學院 工夫次 머물던 뉴욕에서 강익중을 만난 것은 幸運이었다. 인터뷰를 要請한 時點이, 運 좋게도 그가 서울 新聞로 흥국생명 빌딩 1層에 展示할 새 作品을 모두 그린 뒤였다. 그는 26年째 美國 뉴욕에 살고 있다.



    인터뷰는 9時間에 걸쳐 進行됐다. 그는 “이렇게 記者를 오래 만난 것 처음”이라고 했다. 뉴욕 차이나타운 內 公園과 隣近 作業室, 첼시 25番街 빌딩의 새 作業室로 場所를 옮기며 우리는 對話를 나눴다. “1年 365日 中 손님 만나는 날이 3~4日도 되지 않는다”는 ‘바른生活 사나이’가‘작은 逸脫’을 試圖한 셈이다.

    端整한 셔츠와 靑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이 그렇게 平凡할 수 없다. “點心 같이 드시겠어요?” 그가 記者를 처음 案內한 곳은 뉴욕 차이나타운의 한 베트남 샌드위치 가게. 소시지, 오이, 달걀에 獨特한 香의 高手가 들어간 3달러짜리 샌드위치는 푸짐하다. 높은 物價로 惡名 높은 뉴욕에서 奇跡처럼 싼 價格의 盛饌(盛饌)이다.

    “午前 9時 차이나타운 作業室에 나와 午後 7時까지 그림을 그려요. 點心 땐 여기에서 種種 샌드위치를 사 公園으로 가죠. 다른 中國食堂에선 3달러50센트에 밥과 국, 飯饌 4가지를 담은 도시락을 팔아요.”

    그가 싸고 푸짐한 食堂에 精通한 건 가난한 無名 畫家 時節을 거쳤기 때문이다. 1987年 차이나타운에 조그만 스튜디오를 처음 얻었을 때 그의 關心事는 ‘어떻게 싸고 맛있는 飮食을 먹을까’였다. 그는 이때부터 마음에 드는 食堂을 寫眞으로 찍고 住所를 記錄했다. 그 資料로 만든 것이 바로 ‘굶주린 藝術家를 위한 레스토랑 가이드’(1996年)다. 먹고사는 實存(實存)의 問題를 유머러스하게 昇華한 그의 위트가 빛나는 冊이다.

    ‘잘나가는 作家’가 됐지만, 그의 日常은 20餘 年 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라는 質問에 그는 明快한 答辯을 내놓는다.

    “幸福은 單純하게 사는 데서 와요. 散漫한 건 不幸이고 苦痛이죠. 좋아하는 것에 穩全히 沒入할 때 사람은 幸福해져요.”

    姜世晃의 後裔

    그림으로 전세계를 연결하는 아티스트, 강익중

    서울 光化門 復元工事 가림幕 設置그림 ‘광화에 뜬 달’.

    그는 1960年生이다. 忠北 淸州에서 三兄弟 中 둘째로 태어났다. 藥師인 父親은 그가 태어날 무렵 큰 事業體를 引受했다. 父親의 事業 失敗와 再起, 移職은 그의 삶에 影響을 미쳤다. 畫家로서 그의 才能은 집안 來歷이기도 하다. 그는 朝鮮時代 畫家 豹菴 강세황(1712~1791)의 後孫이다.

    ▼ 藝術的 才能은 타고나는 것 같습니다.

    “家系의 影響도 있겠지만, 特히 어머니에게서 많은 影響을 받았어요. 形便이 어려웠던 時節 어머니는 틈틈이 세 아들의 옷을 지어, 우리 兄弟를 洞네에서 유난히 빛나는 아이들로 만드셨죠. 外家 쪽에도 才能을 發揮하는 親舊가 있어요.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號店’을 만든 이윤정 PD가 第 六寸 조카예요. 姨從四寸兄의 딸이죠.”

    ▼ 피는 못 속이는군요. 어린 時節 얘기를 더 들려주시죠.

    “初等學校 때 美術大會에 나갔다가 한 番도 賞을 못 탔어요. 어른이 그려준 것으로 誤解받아서요.(웃음) 中學生 땐 샘솟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해 자다가도 깨어나 그림을 그렸어요.”

    ▼ 아무리 才能이 뛰어나도 그림을 ‘業’으로 삼는 건, 집안에서 反對하지 않았나요?

    “父母님은 저를 자유롭게 키우셨어요. 反對는 없었어요. 오히려 집안 어른들의 稱讚이 제 進路 選擇에 影響을 미쳤어요. 初等學校 3學年 때인가. 曾祖할머니의 影幀 寫眞을 똑같이 그렸는데, 큰아버지께서 만나는 사람마다 제 그림을 보여주며 자랑하셨죠. 제가 畫家를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는 서울 이태원에서 初等學校를 다녔다. 德分에 어린 時節부터 이(異)文化에 對한 拒否感은 없었다. 한洞네에 사는 美國 親舊들과 공놀이를 하며 자연스럽게 英語를 接했다. 짝꿍의 어머니가 美軍部隊에서 家政婦 일을 한 德分에, 美國 親舊 집에 놀러갈 機會도 많았다.

    “大學 卒業 後 美國으로 떠나며 두려움은 없었어요. 낯선 文化를 經驗하고 즐기는 데 이미 익숙했으니까요.”

    장충고 在學 時節에는 國展을 準備하며 프로 畫家가 되기를 꿈꿨다. 入試 準備는 뒷전이었다. 한 달 半 동안 授業도 들어가지 않고, 그림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

    “當時 美術班을 이끌던 조용각 先生님(現 숙명여대 敎授)이 가장 記憶에 남는 스승이시죠. 先生님은 늘 우리에게 ‘10年 뒤를 봐라. 그것이 너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高等學生인 우리에게 畫家로서의 正體性을 심어주신 거죠.”

    1980年 그는 홍익대 美大에 入學했다. 浪漫과 自由를 즐기기엔 嚴酷한 時節이었다. 끓어오르던 創作 欲求는 사라지고 슬럼프가 닥쳤다. 授業에 빠지고 아웃사이더가 됐다.

    “當時 雰圍氣가…. 제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環境이 아니었어요. 大學이란 곳이 싫었어요. 그래도 재밌는 건, 弘大 80學番 中 現在 우리 畫壇에서 頭角을 나타내는 親舊가 많다는 거예요. 최정화, 문봉선, 이주헌, 고낙범, 박불똥, 권용식…. 當時 優秀한 親舊들이 한꺼번에 모인 걸 보며 ‘내가 最高가 아니구나’ 失望했던 것도 같아요.”

    그는 1984年 1月 뉴욕으로 갔다. 韓國에서 美大 出身에게 딱 맞는 일자리를 찾기란 어려웠다. 世界 各國에서 온 젊은 藝術家들과 겨뤄보고픈 欲望도 있었다. 그는 브루클린과 맨해튼에 캠퍼스를 둔 프랫(Pratt) 인스티튜트에 入學했다. 일과 工夫를 竝行하는 고단한 삶. 하지만 大學院은 그에게 새로운 意欲을 불어넣었다.

    그림으로 전세계를 연결하는 아티스트, 강익중

    藝術家의 길을 抛棄하고 成功한 事業家로 變身한 夫人 이희옥氏와 아들 記號軍.

    “첫 授業 時間에 擔當 敎授가 ‘익中, 즐길 만한가?(Ik-Joong, Are you enjoying?)’하고 묻는데 新鮮한 衝擊을 받았어요. 韓國에서는 그림을 그린다는 게 ‘苦悶의 過程’이었기 때문이죠. 美國에서의 그림은 좋아해서 沒頭하며 만들어지는 것이었어요.”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그림 그릴 時間이 不足하다는 點.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밤에는 食料品店에서 野菜를 다듬고, 아침엔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았다. 옷가게 店員과 1달러짜리 時計 露店商으로도 일했다. 地下鐵을 타고 일터와 學校를 오가는 때가 唯一한 自由時間이었다. 어떻게 하면 地下鐵 안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오랜 窮理 끝에 나온 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3×3인치’ 그림이다. 그는 地下鐵을 畫室 삼아 작은 캔버스에 사람들의 모습과 英語 單語, 日常의 이미지를 그렸다.

    辯護士, 事業家로 變身한 아내

    그의 20代에서 夫人 이희옥(美國名 마거릿 리·49)氏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3年 美國 웨스턴 워싱턴州立大(美術 專攻) 3學年이던 李氏가 弘大에 交換學生으로 오며,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둘은 ‘UFO 클럽’을 만들어 時間을 보냈다. 엉뚱한 想像을 즐기는 두 사람의 獨特한 데이트 方式이었다.

    ▼ 夫人의 첫印象은 어땠습니까.

    “작고 예뻤어요. 착하고요.”

    ▼ 夫人 때문에 美國에 가길 決心했나요?

    “本格的으로 사귀기 始作한 건 美國에서 再會한 後였어요. 1985年 結婚式을 올렸죠. 丈人어른께서 저를 본 뒤 ‘밥 잘 먹는 게 마음에 든다. 어서 婚姻하라’고 말씀하셨어요.”

    ▼ 夫人이 先生님 때문에 美術을 抛棄하셨다고요.

    “두 사람이 모두 美術에 매달리긴 어려운 狀況이었어요. 아내가 讓步한 거죠. 저를 위해 犧牲한 아내는 제가 하루 終日 그림을 그리고 지쳐 돌아올 때 가장 좋아했어요. 美術도, 事業도 200%의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게 아내의 持論이죠.”

    李氏는 꿈을 抛棄했지만, 適性에 맞는 또 다른 일을 찾았다. 李氏는 現在 美國 不動産 開發會社 YWA의 共同파트너이자 辯護士로 일하고 있다. 最近 금호종금과 함께 컨소시엄을 構成해 맨해튼 AIG 빌딩을 買入한 主人公이기도 하다.

    李氏의 成功 뒤에는 熾烈한 努力이 숨어 있다. 낮에는 會社에 가고, 밤에는 브루클린 로스쿨을 다니며 辯護士 資格證을 땄다. 4年間 새벽 2~3時까지 工夫하는 日常이 이어졌다. 苦生 끝에 李氏는 두둑한 配布와 協商能力을 認定받아 末端社員으로 入社한 會社에서 파트너 자리까지 올랐다.

    “아내가 처음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만나면, 相對便에서 祕書라고 錯覺한대요. 150cm가 若干 넘는 작은 키의 東洋人 女性이니까요. 하지만 아내는 첫 만남에서 相對便의 虛를 찌른다고 합니다. ‘5分 스피치’로 機先을 制壓하는 거죠.”

    事實 李氏의 집안에도 有名한 人物이 있다. 1940~50年代 朝鮮 最高의 주먹으로 통하던 시라소니(本名 이성순)가 그의 작은할아버지다. 姜世晃과 시라소니의 後裔가 只今 ‘맨해튼을 움직이는 셀러브리티’가 된 것이다.

    그림으로 전세계를 연결하는 아티스트, 강익중

    ‘달缸아리’그림이 강익중의 作業室 壁面을 裝飾하고 있다. 그는 “달缸아리의 魅力은 純粹함과 堂堂함에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初等學校에 다니는 아들을 하나 두었다. 이름은 記號(12)다. 두 사람의 才能을 물려받은 記號는 學校에서 各種 美術賞을 휩쓸고 있다. 記號를 등·下校시키고 食事를 챙겨주는 건 이제 강익중의 몫이다. 그가 아들에게 强調하는 삶의 指針은 무엇일까.

    “언젠가 어린이 英才 캠프에서 引率 敎師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침에 모여 다 함께 외치는 口號가 있었는데, 그 말이 眞理例요. ‘그림엔 正答이 없다. 내 그림이 正答이다.’ 世上은 自己의 窓門으로 世上을 보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잖아요. 저는 아들을 稱讚하고, 激勵하면서 ‘自己다움’을 찾게 해주고 싶어요.”

    “機會와 誘惑을 分揀하라”

    暫時 對話를 멈추고 인터뷰 場所를 옮겼다. 차이나타운 바워리 스트리트에 位置한 그의 作業室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70歲 넘은 中國人 老人이 操縱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作業室로 올라갔다. 이곳을 가득 채운 것은 ‘3×3인치’로 자른 數十萬 醬의 木版과 물감, 크레파스…. 한쪽 房에서는 南美 出身 사내 2名이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강익중이 ‘巨大한 宇宙’를 創造하는 崇高한 勞動의 空間이다.

    ▼ 사람이 操縱하는 엘리베이터는 처음 타봅니다.

    “저 할아버지는 36年째 이 建物 엘리베이터에서 勤務하셨죠. ‘광화에 뜬 달’을 完成해 韓國에 보낼 땐, 좁은 엘리베이터 空間 때문에 數十 番을 오르내렸어요.”

    ▼ 두 男子 분은 어시스트인가요?

    “木板 자르는 일만 專擔하는 분들이에요. 그림에만 專念하기 위해서 저분들을 雇傭했어요. 作業할 땐 제가 電話도 잘 받지 못해요. 컴퓨터 앞에 하루 15分 以上 앉아 있기 어려워요.”

    ▼ 1980年代 後半, 3인치 캔버스 代身 木板을 使用하기 始作한 건 아버지 때문이라고요?

    “糖尿로 視力을 잃은 아버지를 위해, 木版에 그림을 그리고 小品을 붙이기 始作했어요. 觸覺을 느낄 수 있는 美術의 試圖였죠. 事實 ‘광화에 뜬 달’도, ‘버스를 타고 光化門 앞을 지나는 어머니가 보셨으면’ 하고 만들었어요. 어머니에 對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았죠.”

    고된 삶 속에서 誕生한 그의 作品들은 1990年代 初·中盤 美國에서 名聲을 얻기 始作했다. 特히 1994年은 그에게 紀念碑的인 해다. 그는 이 무렵 샌프란시스코 國際空港의 메인홀을 裝飾할 壁畫를 製作했다. 높이 3.2m, 길이 22m의 이 壁畫는 5925點의 3인치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日常에서 흔히 接하는 單語, 그림, 오브제가 主要 素材로 使用됐다. 多彩롭고 친숙한 이미지의 作品은 ‘강익중式 3인치 美術’을 刻印시켰다.

    “샌프란시스코空港 壁畫 作業 後 專業 作家의 길로 들어섰어요. 生涯 가장 많은 돈을 받은 作品이기도 했죠.”

    더 특별한 事件은 故(故) 백남준과 함께 코네티컷 注意 휘트니 美術館에서 2人展 ‘멀티플다이얼로그, 백남준과 강익중’ 展을 연 것이다. 當時 이 美術館의 큐레이터 維持니 사이는 강익중에게 “두 사람이 비빔밥처럼 갖가지 材料를 섞어 反復的으로 表現하는 共通點을 지닌 것 같다”며 共同 展示를 提案했다. 그에게 ‘백남준과 2人展을 한 作家’라는 타이틀이 붙는 瞬間이었다.

    “先生님이 展示에 앞서 美術館 側에 ‘나는 아무래도 좋다. 강익중이 좋은 자리를 얻는 게 重要하다’고 連絡하셨어요. 後輩 作家를 配慮해주시는 모습을 보며 眞正 ‘남을 품을 줄 아는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강익중을 向한 백남준의 愛情은 각별했다. 강익중이 백남준을 처음 만난 것은 1989年 10月 뉴욕 소호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展示會 때다. 백남준은 스스럼없이 後輩 作家인 그에게 다가와 藝術家의 길에 對한 忠告를 들려줬다.

    “旅行을 많이 다녀. 그림은 싸게 팔고. 파티에 자주 나가고.”

    백남준은 강익중의 最高 弘報 에이전트이기도 했다. “우리 益中이 잘 있냐?” “강익중을 아느냐, 有望한 作家다” “익中은 내 아들과 다름없다”고 周邊 사람들에게 말하며, 그의 認知度를 높였다.

    “先生님의 눈을 바라보면, 제게 늘 큰 에너지를 주시는 것 같았어요. 먼 未來인 30世紀를 내다보는 큰 어른이셨죠. 언젠가는 제게 ‘가난한 사람은 땅을, 빌딩을 사야 해’ 하고 말하셨는데, 아마도 제 아내의 未來 職業까지 豫測하신 것 같아요.(웃음)”

    그는 지난해 果川 現代美術館에서 ‘멀티플 다이얼로그∞’展을 열어 自身을 이끌어준 스승에 오마주를 바쳤다. 그는 現代美術館 1層에 TV를 塔 模樣으로 쌓아올린 백남준의 作品 ‘多多益善(多多益善)’ 周圍의 階段 壁面을, 自身의 ‘3인치’ 그림 6萬餘 點으로 감쌌다. 그는 “백남준의 山을 오르듯 배우는 마음으로 設置를 進行했다”고 當時를 回想했다.

    강익중의 人福(人福)은 故 金煥基 畫伯의 夫人 김향안 女史와의 因緣에서도 드러난다. 백남준이 藝術家로서 롤 모델이 됐다면, 金 麗史는 그의 精神的 後援者가 돼주었다. 그가 金 女史를 알게 된 것은 1995年 무렵. 金 女史는 旅行을 떠날 때 男便의 드로잉과 日記를 강익중에게 맡길 程度로 그를 믿고 아꼈다.

    “金 女史님은 제게 늘 ‘아침을 챙겨 먹어라’ ‘食堂에서 팁을 많이 줘라’ ‘機會와 誘惑을 分揀할 줄 알라’고 말씀하셨어요. ‘네가 하는 일이 歷史와 民族, 世上에 옳은지 늘 생각하고 行動하라’고 當付하셨죠. 그 가르침이 只今도 제 人生觀을 左右하고 있어요.”

    있으면 素朴하고, 없으면 堂堂하자

    얘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午後 5時가 넘었다. 어두워지기 前 첼시 25番街에 있는 그의 새 作業室로 移動하기로 했다. 맨해튼 南西쪽에 位置한 첼시는 數百 個의 갤러리와 갤러리 빌딩이 密集한 ‘現代美術의 아지트’로 通한다. 作品 展示·保管 空間으로 活用되는 그의 새 作業室은 첼시아트빌딩 20層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빌딩 亦是 그의 아내가 買入·開發한 것이다. 빌딩 3層엔 韓國 國際갤러리 이현숙 代表의 큰딸 티나 킴이 運營하는 티나 킴 갤러리가, 18層엔 有名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의 個人 作業室이 들어서 있다.

    그의 作業室에 들어선 瞬間, 歎聲이 절로 나왔다. 통琉璃로 된 居室 壁을 통해 맨해튼 南西쪽 都心과 허드슨 江이 한눈에 들어온다. 乘用車가 應接室 바로 옆까지 올라온다는 革新的 設計의 아파트 ‘스카이개라지(Sky Garage)’도 가까이 보였다. 이 亦是 그의 아내가 開發에 參與한 建築物이다. 그룹 ‘롤링 스톤스’의 리더 믹 再擧와 俳優 니콜 키드먼도 이곳에 入住할 豫定이라고 했다. ‘3달러짜리 點心’과 ‘맨해튼 노른자위 땅의 華麗한 作業室.’ 瞬間 이 極과 極의 對照에 아찔해졌다.

    ▼ 藝術은 缺乏과 貧困, 苦痛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經濟的 餘裕가 생기며 作品의 原動力이 사라진 건 아닌가요?

    “苦痛이 緋緞 가난에서 나오는 건 아니에요. 散漫함도 하나의 苦痛이 될 수 있죠. 조화롭지 않은 것을 조화롭게 만들려는 힘, 그 反作用이 作品의 原動力이 돼요.”

    ▼ 가난과 部(富)가 藝術家에게 어떤 意味를 지니나요?

    “가난과 部, 둘 다 不便한 것일 뿐이에요. 저는 恒常 ‘있으면 素朴하고, 배우면 謙遜하고, 없으면 堂堂하자!’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途中 作業室 壁面에 걸린 大型 달缸아리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음전하고 깊은 빛깔이다. 마음이 便安해진다. 그가 달缸아리에 반한 理由는 뭘까.

    “달缸아리를 좋아하는 理由는 純粹하고 堂堂하기 때문입니다. 最近 올림픽에서 金메달을 딴 金姸兒 選手를 보면서 달缸아리 같은 純粹함과 堂堂함을 느꼈어요.”

    그가 穿鑿하는 또 하나의 素材는 ‘한글’이다. 中國 상하이엑스포 韓國館은 그가 만든 3萬8000個 아트 한글타일로 꾸며져 있다. ‘正말 必要한 것은 別로 없다’ ‘기쁨 監査가 우리가 사는 별의 妖術暗號다’ ‘뉴욕 사람들은 콧구멍을 車 안에서 몰래 후빈다’…. 一名 ‘강익중體’로 쓰인 그의 익살맞은 警句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제가 한글로 作業을 하자, ‘中國에서 進行되는 展示이니 漢字로 壁을 꾸며야 하는 것 아니냐’는 指摘이 나왔대요. 제가 反對했죠. 韓國館은 무엇보다 ‘韓國的인 이미지’를 傳達해야 하는 空間이니까요. 한글은 造形美가 뛰어나 四角形 안에서 完璧한 均衡을 維持하죠. 한글은 地球의 자랑이에요.”

    그는 지난해 11月 ‘한글 世界傳播 프로젝트’의 一環으로 潘基文 유엔 事務總長의 官邸에 自身의 한글 作品을 寄贈하기도 했다. ‘한글과 유엔’이란 題目의 이 作品은 3인치 나무판에 유엔憲章 內容을 一部 要約한 한글 284字를 直接 새겨 넣은 것이다.

    “얼마 前 班 總長님과 食事할 機會가 있었는데, 每日 아침 제 作品을 보며 유엔憲章 內容을 되새긴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아는 것, 쉬운 것, 옆에 있는 것

    美術 트렌드가 急變하고, 아티스트들이 뜨는 作家를 좇아 模倣하는 時代. 오히려 강익중은 愚直하게 內面의 소리를 듣는 데 集中할 뿐이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美術이란 무엇일까.

    “저는 아는 것, 쉬운 것, 옆에 있는 것, 便한 것을 그려요. 그림을 그리는 作業도 結局 나를 探索하고 알아보기 위해 하는 作業이니까요. 남의 時刻에 맞추거나 海外 트렌드를 좇아가는 게 무슨 意味가 있겠어요. 우리 美術이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에 置重하면서 自己 목소리는 없는 것이 가슴 아파요. 저는 藝術家들이 ‘現代美術의 主人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그의 큰 關心事 中 하나는 統一이다. 韓半島 分斷 問題에 關心을 갖게 된 건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平和運動家라 여겨서는 아니다. 自身의 周邊에서 느끼던 問題를 表現하다보니 자연스럽게 關心을 갖게 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이 半으로 갈렸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藝術家는 自身의 位置를 把握하는 사람인데, 母國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問題라고 여긴 거죠. 무엇보다 理念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統一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社會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藝術家의 任務이잖아요.”

    그는 1999年 12月 京畿道 坡州 통일동산에서 ‘十萬의 꿈’ 展示를 열었다. 幅 5m, 높이 4m, 길이 600m의 구불구불한 展示 空間에 全世界 141個國 어린이가 ‘나의 꿈’을 主題로 그린 그림 5萬點을 展示했다. 元來 北韓 어린이들의 그림 5萬點을 함께 걸려고 했지만, 成事되지 않았다. 北韓 어린이들의 그림이 걸릴 자리는 ‘沈默의 壁’으로 비워뒀다.

    “‘나의 꿈’을 그리는 作業이 如意치 않아, 두 番째로 ‘어린이의 自畫像을 그려 交換하자’고 北側에 提案했는데 結局 成事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北韓 어린이들과의 作業을 抛棄하지 않을 겁니다.”

    2004年에는 統一 念願을 담은 지름 15m의 超大型 特需風船 ‘꿈의 달’을 一山 湖水公園에 띄웠다. 이 風船은 世界 141個國 어린이들의 그림 12萬6000餘 張을 붙여 製作한 것이다. 그는 當時 달을 띄우며 다음과 같은 所望을 남겼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았던 하나 된 祖國의 달을 띄워보고 싶었다. 이것은 過去의 달이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꿈이 담긴 未來의 달이기도 하다.”

    統一이 되기 前 臨津江에 어린이의 그림으로 世界 最初의 떠 있는 美術館 ‘꿈의 다리’를 만드는 것은 강익중의 오랜 所望이기도 하다.

    그림으로 전세계를 연결하는 아티스트, 강익중

    2007年 강익중의 차이나타운 作業室에서 어린이들과 함께했다. 그는 어린이 그림으로 未來의 希望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의 視線은 非但 韓半島에 머물지 않는다. ‘眞正한 코스모폴리彈’으로서 作品을 통해 世界 平和를 말한다. 그 始作은 2001年 유엔本部 訪問客센터 로비에서 열린 ‘놀라운 世上’前이었다.

    “이 行事가 2001年 9月11日 開幕하기로 했는데, 그날 테러가 發生해 行事 오프닝이 相當 期間 延期됐어요. 135個國 어린이 3萬餘 名의 다양한 그림을 통해 平和를 이야기하자는 趣旨의 展示였죠. 어린이들의 作品은 訪問客의 接近 禁止 措置가 解除된 後 뒤늦게 世上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어요.”

    강익중은 最近 世界 어린이들의 그림 蒐集에 沒頭하고 있다. 甚至於 “어린이 그림은 株式(主食), 내 그림은 腐蝕(副食)”이라고 말할 程度다. 그가 어린이 그림에 이토록 愛着을 갖는 까닭은 뭘까.

    “어린이들이 未來의 主人公이잖아요. 아이들의 꿈과 希望을 한데 묶어 ‘서로를 理解하고 認定하는 世上을 만들자’는 메시지를 傳하고 싶었어요.”

    그가 요즘 가장 에너지를 쏟는 ‘希望의 壁’ 프로젝트도 어린이 그림과 關聯이 있다. 그는 아이들의 꿈을 담은 그림을 모아 大型 作品을 만들어 美國 신시내티 病院, 충남대병원, 서울 牙山病院 等에 設置했다. 現在 國內外 몇몇 病院에서도 ‘希望의 壁’李 完成되기를 기다리는 中이다.

    “아픈 아이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또한 情報技術(IT)李 發展한 韓國의 이미지를 살려, 全世界 病院에 大型畵面을 設置해 아이들이 다른 나라 親舊들과 서로 人事하며 友情을 나누게 하고 싶어요. 全世界가 어린이들의 꿈으로 連結됐으면 합니다.”

    ‘아트 脯 피플’

    公共美術家로서 그의 想像力은 끝이 없다. “公共美術은 明朗한 革命”이라 믿는 그는 ‘사람들을 위한 美術’의 價値를 힘주어 말한다.

    “公共美術은 모든 사람을 기쁘고 幸福하게 하는 ‘아트 脯 피플(Art for People)’이에요. 特定 사람, 民族을 아프게 하거나 少數者를 貶下해서도 안 되죠. 그런 意味에서 서울 光化門廣場에 놓인 設置物이 조금 안타까웠어요. 階段灣 있어 障礙人은 올라가기 어렵더라고요. 公共美術에는 모든 사람을 配慮하는 착한 마음이 必要해요.”

    그가 말하던 ‘藝術의 世界’는 人生의 理致와도 맞닿아 있었다. 묵직한 洞察이 담긴 答辯을 들으면서 나는 몇 番이고 무릎을 쳤다. 特히 좋아하는 作品에 對한 그의 說明을 들을 때가 그랬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作品은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에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한 解脫의 微笑를 짓고 있잖아요. 事實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때, 모두 自身의 얼굴을 그려요. 그렇다면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의 作家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境地에 이른 사람이겠죠. 作品을 할 때, 언제 붓을 드느냐보다 언제 붓을 내려놓을지 아는 게 더 重要해요. 理髮할 땐 가위질을 언제 멈춰야 하는지, 株式 投資에선 언제 팔아야 하는지 아는 게 重要한 것처럼. 저요? 저는 붓을 언제 내려놓아야 할지 하루는 알다가, 다음날은 모르겠다가 그렇더군요.”

    얘기를 마치고 보니 벌써 해가 졌다. 강익중의 作業室을 나서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그의 作品이 떠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日常의 些少한 素材를 담았다. 하지만 그가 傳하는 울림은 크다. 統合과 和解, 幸福을 말한다. 저마다 다른 色彩와 個性을 지닌 작은 그림 數萬 個가 모여 하나의 ‘놀라운 世界’가 되고, 그 調和 속에서 제各各은 固有의 빛을 잃지 않는다. 그게 우리가 바라는 世上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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