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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只今 ‘마리아 칼라스’인가|신동아

文化 읽기

왜 只今 ‘마리아 칼라스’인가

激情的 디바의 삶과 藝術… 理由 있는 映畫 烈風

  • 정현상 記者

    doppelg@donga.com

    入力 2019-09-26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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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日 1回 上映에도 開封 두 달 만에 2萬7000 觀客

    • 觀客 大部分 멋쟁이 中壯年層

    • 탄탄한 스토리텔링 갖춘 다큐 映畫

    •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정현상 기자]

    [정현상 記者]

    指揮者 레너드 번스타인은 “完全한 戰慄”이라고 했고, 小說家 헤밍웨이는 “黃金빛 목소리를 가진 颱風”이라고 描寫한 世紀의 오페라 디바(diva·有名 女歌手) 마리아 칼라스가 돌아왔다. 7月 11日 開封한 映畫 ‘마리아 칼라스: 世紀의 디바’를 통해서다. 이 映畫는 씨네큐브 等 藝術映畫館, 대한극장과 메가박스 코엑스 等 一部 멀티플렉스館에서 1日 1回 上映하고 있는데, 觀客이 꾸준히 들어 9月 15日 現在 2萬7380名에 達했다. 

    1000萬 觀客이 드는 映畫가 있는 時代에 겨우 2萬7380명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劇的 要素를 加味한 클래식音樂 映畫가 이처럼 關心을 받는 것은 奇現象이다. 事後 42年이 지난 한 오페라 歌手를 아직도 이토록 좋아하고 記憶하는 이가 많다는 것이 놀랍다. 小說家 조정래는 “우리가 누군가를 記憶하고 기린다면 그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칼라스는 映畫뿐 아니라 인터넷, 유튜브, 音盤, 冊을 통해 如前히 살아 있다. 칼라스의 페이스북 팔로어는 55萬 名이 넘고, 60萬8000名이 ‘좋아요’를 눌렀다. 

    西曆(西曆)에서는 예수 誕生을 起點으로 紀元前(BC·before Christ)과 祈願後로 나누지만 오페라界에선 마리아 칼라스를 起點으로 새로운 時代가 열렸다고 칼라스 移轉을 BC(before Callas)라고 하고, 칼라스 以後를 AC(after Callas)라고도 한다

    珠玉같은 20餘 曲 전곡 들려줘

    전성기의 마리아 칼라스(왼쪽에서 두 번째). [영화사 진진 제공]

    全盛期의 마리아 칼라스(왼쪽에서 두 番째). [映畫社 진진 提供]

    8月 23日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藝術映畫館 씨네큐브. 映畫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觀客들은 公演이 끝난 것처럼 拍手를 쳤다. 映畫에는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가운데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 벨리니의 ‘노르마’ 가운데 ‘精潔한 女神이여(Casta Diva)’,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 가운데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 等 珠玉같은 20餘 曲이 全曲으로 흘러나온다. 

    “수많은 오페라 아리아가 마리아 칼라스 목소리로 흘러나와 映畫館이라기보다 實際 公演場에서 鑑賞하는 듯했어요. 칼라스의 人間的인 모습들도 가슴을 뭉클하게 해 무척 感動的인 映畫였어요.” 



    50代 O氏는 대단히 洽足해하며, 鑑賞評을 들려줬다. 이날 映畫館을 찾은 이들은 大部分 5060世代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中壯年層 男女가 自身들의 偶像을 映畫에서 다시 確認하고 젊은 時節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이런 現象에 對해 이탈리아에서 聲樂을 專攻한 公演 칼럼니스트 황승경 博士는 이렇게 表現했다. 

    “클래식 팬덤의 始初인 마리아 칼라스는 藝術的인 力量뿐 아니라 波瀾萬丈한 人生으로 因한 神祕感 때문에 時間이 흘러도 팬덤 現象이 反復되는 것 같습니다. 칼라스는 白鳥가 된 미운 오리새끼처럼 不遇한 어린 時節을 克服하고 劇的으로 登場한 그리스 出身 프리마돈나입니다. 그는 잦은 契約 破棄, 出演 拒否, 言論과의 不和, 船舶王 오나시스와의 스캔들, 재클린 케네디와의 三角關係 等 世界的 가십으로 新聞 社會面에 자주 登場했지요. 

    當時 다른 女性 오페라 歌手들이 玉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사랑의 아름다움을 主로 表現했다면, 칼라스는 劇的인 목소리로 人間의 本性과 救援을 드라마틱하게 呼訴한 아티스트였습니다. 칼라스가 創造한 假想의 人物들은 舞臺 위에서 살아 움직였어요. 時代가 지나가도 신비스러운 그의 노래와 熱情은 珠玉같은 旋律을 타고 듣는 이의 가슴을 적십니다.” 

    이 映畫는 다른 藝術家들에게도 큰 울림을 안겨준다. 小說家 이경란 氏는 SNS 文字로 映畫 所感을 이렇게 적어 보냈다. 

    “映畫 ‘필라델피아’에 傷處 입은 짐승들이 서로를 핥듯 主人公들이 悲歎에 잠겨 춤추는 場面이 있다.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를 처음 새겨들은 건 그 場面에서다.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의 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a Morta)’가 흘러나온다. 깊고 슬프고 뜨겁고 서늘한 목소리. 그건 非但 映畫의 敍事 때문은 아니었다. 누구인가,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이.

    볼프 監督, 3年間 資料 蒐集

    다큐멘터리 映畫 ‘마리아 칼라스’에서 그를 보았다. 타고난 才能과 지긋지긋한 訓鍊, 그리고 徐徐히 自身의 삶이 된 노래. 그는 舞臺의 强者이면서 사랑의 弱者였다. 失敗한 結婚, 失敗한 사랑에서 그는 얼마나 軟弱한 女性이었던가. 變心을 言論 媒體로 傳해 들은 後 永遠처럼 길었을 時間 後에 돌아온 戀人. 그러나 끝내 그를 救援한 것은 戀人도, 家族도 아닌 舞臺였다. 舞臺 위의 디바는 그 自體로 完璧한 存在였고 그 完璧은 감춰진 눈물로 細工된 것이었다. 불이 켜지고 노래가 始作되면 그는 겨울 들판에 우뚝 선 忍苦의 기둥이었다. 到底(到底)하고 孤獨한.”

    이 映畫는 마리아 칼라스의 神祕와 魅力을 穩全히 다 傳해준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一端을 매우 새로운 形態로 보여주고 있다. 于先 마리아 칼라스가 自身의 人生을 自身의 言語로 털어놓는 것이 魅力이다. 卽 映畫를 이끌어가는 話者가 마리아 칼라스다. 죽은 칼라스가 내레이터라니 어떻게 可能한가. 帶域이다. 映畫 ‘칼라스 포에버’에서 칼라스 役을 맡은 프랑스 俳優 화니 아르黨이 話者 役을 맡았다. 그래서 映畫 原題가 ‘Maria by Callas: In Her Own Words(칼라스 곁에 마리아: 그가 直接 告白한 말들)’다. 이 내레이션은 言論과의 인터뷰나 날것 그대로의 필름 映像 等이 더해져 劇的 要素가 훨씬 豐盛해진다. 따라서 클래식 音樂에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도 興味로운 人生 映畫로 다가올 수 있다.

    톰 볼프 監督도 偶然히 마주친 運命처럼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發見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音盤을 듣고 대단히 魅惑됐는데, 그것이 칼라스의 노래였음을 알게 됐다. 그는 “그날 以後 칼라스의 軌道 全體가 나에게 열렸다”고 告白했다. 俳優이자 監督인 그는 칼라스의 一生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製作하기 위해 3年 동안 世界를 旅行하며 資料를 蒐集했다. 그리고 칼라스가 全盛期를 누릴 때를 記憶하는 이들, 그女와 가까운 親舊, 同僚를 만나며 그들이 갖고 있던 未公開 稀貴本 音盤과 映像, 便紙 等을 映畫에 담았다. 그래서 이 映畫에 새롭게 公開되는 資料가 많다.

    “제 안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어요”

    볼프 監督은 또 칼라스의 切親 나디아 스탠時오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스탠時오프는 칼라스에 對해서 매우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로 評傳 ‘마리아: 칼라스 리멤버드’의 저자다. 칼라스는 그에게 “내가 當身보다 먼저 죽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眞情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傳해주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이런 要素들로 인해 이 映畫는 칼라스 삶의 眞髓에 接近할 수 있게 한다. 

    마리아 칼라스를 理解하는 方式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의 華麗한 生活에 注目할 수도 있다. 그는 누구와도 다른 목소리와 技巧로 當代 最高 歌手의 班列에 올랐으며, 제트機를 타고다니며 社交 活動에 나서는 華麗한 제트族이었다. 乖愎하고 불같은 氣質로 有名했으며, 映畫俳優 그레이스 켈리와 알랭 들롱, 재클린 케네디와 처칠,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같은 當代의 셀럽들과 交遊하며 살았다. 

    하지만 볼프 監督은 最高의 名聲을 願하는 소프라노 ‘칼라스’와 女性으로서의 平凡한 삶을 꿈꾸는 ‘마리아’가 끊임없이 부딪치며 葛藤하는 데 焦點을 맞췄다. 映畫가 始作되면 칼라스가 죽기 3年 前 뉴욕에서 英國 放送人 데이비드 프로스트와 한 인터뷰가 나온다. 

    칼라스: “제 안에는 두 사람이 있어요. 마리아로 살고 싶지만 칼라스의 모습도 維持해야죠. 그 둘을 最大限 같이 지키려고 합니다.” 

    프로스트: “둘 中 하나를 定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이기나요?” 

    칼라스: “둘이 共存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칼라스도 마리아로 살아왔으니까요. 제 노래와 제 일에는 恒常 제 自身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일에 眞心으로 臨하니까요. 그래서 누군가 제 노래와 이야기에 正말로 귀를 기울이신다면 저 自身(마리아)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帶域으로 投入돼 世界的 소프라노로

    마리아 칼라스는 1923年 12月 2日 美國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그女의 本名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세실리아 칼로曳撈풀로(Maria Anna Sofia Cecilia Kalogeropoulos)이다. 그의 아버지가 性을 칼라스로 바꾸었다. 音樂的 才能이 있어 8歲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嚴格한 音樂敎育을 받기 始作했다. 

    1937年 父母가 離婚한 뒤 칼라스는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갔다. 열세살의 나이로 國立音樂院에 들어갔다. 音樂院 入學 資格이 17歲 以上이었지만 그는 나이를 속이고 入學했다. 노래를 잘하는 데다 키가 컸기 때문에 可能했다고 한다. 그 뒤 아테네 音樂院에 入學해 칼라스는 世界的인 歌手 엘비라 데 이달고를 師事한다. 칼라스가 平生 尊敬하며 따른 이달고는 “같은 말을 두 番 할 必要가 없을 程度로 똑똑하고,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까지 있었던 뛰어난 學生”으로 칼라스의 學生 時節을 回想했다. 

    以後 1945年 聲樂 授業을 끝낸 칼라스는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가 있는 美國으로 돌아간다. 꿈꾸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劇場에서 오디션을 보지만 自身에게 어울리지 않는 役을 제안받고 拒絶했다. 그리고 1947年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 劇場에서 ‘라 조콘다’ 舞臺로 데뷔하고, 마에스트로 툴리오 세라핀에게 拔擢됐다. 26歲 때인 1949年 主演 소프라노가 갑자기 빠지면서 帶域으로 投入된 오페라 ‘발퀴레’가 成功하면서 世界的 소프라노로 발돋움했다. 理解에 自身보다 28歲나 나이가 많지만 ‘첫눈에 반한’ 建築業者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와 結婚했다. 

    20代의 마리아는 뚱뚱한 便이었다. 하지만 칼라스는 映畫 ‘로마의 休日’에 나온 날씬한 오드리 헵번에 깊은 印象을 받아 살을 빼기 始作해 1年 사이 30kg을 減量하고 패션에도 눈을 떠 ‘칼라스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成功街道를 달리며 全盛期를 누리던 칼라스는 어머니와의 不和, 言論에서 터뜨린 刺戟的 스캔들로 지쳐갔다. 素朴한 幸福을 願했으나 歌手로서의 칼라스를 더 願한 男便과도 葛藤을 겪었다. 뒤에 한 言論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아이도 낳고 싶었고 幸福한 家庭을 이루고 싶었지만 音樂이라는 運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며 悔恨을 드러냈다. 

    1959年 結婚 生活에 厭症을 느끼던 칼라스는 自身에게 好感을 標示하던 그리스 出身 船舶王 事業家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招請한 크루즈 旅行에 男便과 함께 갔다. 그 旅行에서 오나시스와 運命的인 사랑에 빠진다. 映畫에서는 當時 狀況에 對한 獨白이 이렇게 이어진다.

    오나시스에 反하다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마리아 칼라스. [영화사 진진 제공]

    그리스 船舶王 오나시스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마리아 칼라스. [映畫社 진진 提供]

    “遊覽船 旅行 初期부터 아리스吐(아리스토텔레스 愛稱)가 제가 찾던 親舊란 걸 알았어요. 그의 魅力에 깊은 印象을 받았죠. 强烈한 사람이었어요. 周邊의 視線을 끄는 能力도 있었고요. 삶을 즐길 줄 알면서 生命力이 넘쳤습니다. 男便과의 긴 말다툼에 짜증이 나서 甲板 위로 나가 홀로 바람을 쐬다가 깜깜한 바다를 凝視하는 아리스토를 봤습니다. 우리 友情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처음 느껴보는 氣分이었어요. 제게 무척 必要했던 友情이었죠. 함께 있으면 자유로웠고 여성스러워졌어요. 그를 무척 사랑하게 됐어요.” 

    遊覽船 旅行에서 돌아온 칼라스는 男便과 헤어지기로 決心한다. 긴 離婚訴訟과 健康 惡化로 힘들어했지만 知人에게 보낸 便紙에도 적혀 있듯 ‘아리스吐가 있어 더 바랄 게 없는’ 삶이었다. 아리스吐는 칼라스보다 17年 聯想이었다. 칼라스가 다시 公演을 이어갈 때 그의 音樂的 깊이는 한 次元 더 成熟해졌다. 音樂에 對한 哲學도 달라졌다. 

    “노래가 멈추면 音樂이 始作한다고 하죠. 音樂이란 言語로 담기엔 너무 厖大하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늘 謙遜하게 尊重하면서 音樂을 對해야 합니다. 제게 노래란 自信感의 表現이라기보다 調和의 境地에 닿으려는 努力입니다.” 

    하지만 成功的인 公演만 있었던 건 아니다. 美國 메트로폴리탄 劇場에서는 自己 音樂을 固守하는 固執 탓에 그야말로 ‘解雇’까지 됐으며, 公演을 取消하는 것으로도 惡名이 높았다. 하지만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 鍛鍊됐고, 音樂的 完成度도 더 向上됐다. 世界의 都市 어디든 가는 곳마다 盛況을 이뤘다. 그런 칼라스에게 1965年 엄청난 危機가 다가온다. ‘노르마’ 公演 中 갑자기 失神했다. 大盛況을 이룬 뉴욕 公演 以後 心身이 지쳐 있던 것이다. 極甚한 不安과 憂鬱症이 찾아왔다. “두려움이 목을 조이고 自信感도 떨어진” 時期였다. 칼라스는 “魂이 消盡된 氣分”이었다고 當時를 回顧했다.

    戀人 結婚 消息 新聞 보고 알아

    칼라스는 이때부터 1968年까지 公演 活動을 쉬고, 오나시스에게 獻身했다. 하지만 이 時期에 何必 오나시스는 재클린 케네디에게 關心을 보인다. 칼라스는 不安을 느낀다. 1968年 1月 파리에 머물던 칼라스는 그리스의 오나시스에게 便紙를 보냈다. 

    “사랑하는 아리스吐, 生日 膳物로는 보잘것없지만 할 말이 있어. 지난 8年 半 동안 함께 많은 일을 겪었고 이 말을 할 수 있어 眞心으로 幸福해. 當身이 자랑스러워. 몸과 마음을 다해 當身을 사랑해. 當身도 나와 같기를…. 自尊心 때문에 認定하긴 싫지만 當身은 내 숨이야…. 當身의 靈魂, 마리아.” 

    이처럼 熱烈한 사랑을 告白했지만 그해 10月 衝擊的인 消息이 新聞에 報道됐다. ‘재키 케네디, 오나시스와 그리스에서 結婚.’ 칼라스는 엘비라 先生님에게 보내는 便紙에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썼다. 

    危機를 맞이하면 칼라스는 이런 祈禱를 했다. “神이시여, 좋은 일이든 아니든 願하는 대로 주세요. 하지만 그걸 견딜 힘도 같이 주셔야 해요.” 신은 칼라스에게 正말로 견딜 힘을 같이 줬던 걸까. 말 그대로 칼라스는 그 어려움을 克服해나간다. 이듬해 舞臺에 오르고자 했으나 如意치 않았고, 파솔리니 監督의 映畫 ‘메데이아’에 出演하면서 活動을 再開한다. 칼라스는 1971年부터 2年間 뉴욕 줄리아드 音大에서 學生들을 가르치면서 다시 自信感을 되찾는다. 1973年에는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서울 런던 도쿄 等 여러 大都市를 巡廻하며 公演에 나서 大歡迎을 받았다. 映畫 속 이 場面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主人公 비올레타가 죽음을 앞두고 통절하게 부르는 아리아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李 피아노 旋律로 흘러나와 感動을 더한다.

    “備忘錄은 제 노래 속에”

    오나시스는 結婚 3年 만에 칼라스를 찾아와 다시 스캔들을 낳았다. 처음엔 拒否했던 칼라스도 結局 그를 받아들인다. 오나시스는 재클린과 離婚을 決心하지만 때를 놓치고 1975年 病院에서 숨지고 말았다. 오나시스는 죽기 前 칼라스에게 “난 當身을 사랑했어. 늘 열렬하진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熱心히 最善을 다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76年 칼라스는 다시 舞臺 復歸를 準備했는데, 샹젤리제 劇場에서의 리허설이 형편없었다는 言論 報道로 復歸하지 못했다. 

    1977年 9月 16日 아침 마침내 마리아 칼라스는 53歲의 나이로 파리 自宅에서 숨을 거두었다. 死因은 心臟痲痹. 그즈음 憂鬱症과 不眠症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舞臺 復歸를 꿈꾸며 練習했다고 한다. 生前 인터뷰에서 그는 自身의 備忘錄을 이렇게 言及했다. 

    “제가 쓴 備忘錄은 제 노래 속에 녹아 있습니다. 제가 아는 唯一한 言語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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