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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番째 釜山市長 挑戰 吳巨敦 민주당 候補|新東亞

인터뷰

4番째 釜山市長 挑戰 吳巨敦 민주당 候補

“釜山 發展은 내 平生 이뤄야 할 價値이자 信念”

  • 入力 2018-04-22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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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選擧 1.31%差…與野 바뀌고 徐秉洙 市長과 리턴매치

    • “釜山市民들度 地方政權 交替 必要性 節減”

    • “‘東北亞 海洋首都’ 釜山 建設은 文 大統領과 나의 約束”

    [박해윤 기자]

    [박해윤 記者]

    1987年 直選制 改憲 以後 與野가 바뀌는 政權交替가 세 次例나 이뤄졌다. 1995年 地自體 選擧가 始作된 後 首都圈(서울, 京畿, 仁川)을 비롯한 忠淸, 講院, 濟州에서는 적어도 한 番 以上 廣域自治團體長 所屬 政黨이 바뀌는 地方政權 交替가 이뤄졌다. 하지만 嶺南(大邱, 慶北, 慶南, 蔚山, 釜山)과 湖南(全北, 全南, 光州)에선 23年 동안 單 한 番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嶺南에선 現 自由韓國黨이, 湖南에선 現 더불어民主黨이 ‘絶對 與黨’이었다. 

    이들 嶺湖南에서의 地方政權 交替 與否가 6·13 地方選擧 最大 關心事로 떠오르고 있다. 全北·全南支社 選擧에서 民主平和黨이 더불어民主黨 牙城을 깰 수 있을지도 關心이지만, 焦眉의 關心事는 亦是 釜山市長 選擧다. 釜山은 문정수(民主自由黨), 안상영(한나라당), 허남식(한나라당), 徐秉洙(새누리당)로 이어진 歷代 民選 市長 모두 現 自由韓國黨의 前身 所屬이었다. 盧武鉉, 金正吉, 吳巨敦 等 釜山地域에서 민주당을 代表하는 人士들이 挑戰에 나섰지만 ‘우리가 남이가’의 壁은 너무 높았다. 

    4月 10日 現在 自由韓國黨에서는 徐秉洙 現 釜山市場을, 더불어민주당에서는 吳巨敦 前 海洋水産部 長官을 自黨 釜山市長 候補로 公薦한 狀態다. 이성권(바른未來黨), 박주미(正義黨) 等도 豫備候補로 登錄했지만 아직 黨內 公薦이 確定되지는 않았다. 

    지난 2014年 選擧에서 徐秉洙 候補(50.65%)와 吳巨敦 候補(49.34%)의 票差는 2萬701票(1.31%포인트)에 不過했다. 게다가 與野가 바뀐 狀態에서 치르는 選擧다. 두 候補의 리턴매치에 關心이 쏠리는 理由다. ‘신동아’는 2017年 12月號에서 徐秉洙 現 市場을 인터뷰한 바 있다. 報道의 衡平性을 갖추기 위해 이番에는 네 番째 挑戰에 나선 吳巨敦 候補를 만나 眞率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말더듬症이 키운 共感과 疏通의 힘

    記者가 ‘吳巨敦’이란 人物에 關心을 갖게 된 契機는 2005年 國政監査를 통해서였다. 當時 海洋水産部 長官이던 그는 答辯할 때 말을 甚하게 더듬었다. 한 議員이 “長官이 答辯을 느릿느릿하게 하는 部分은 (質疑時間에서) 빼주세요”라며 그의 말더듬症을 비꼬는 人身攻擊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萎縮되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堂堂하게 自身의 見解를 말하는 모습이 印象的이었다. 



    釜山에서 그를 만나자마자 말더듬症부터 話題에 올렸다. 그는 如前히 말을 천천히 하긴 했지만 그때처럼 甚하게 더듬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이야기하기에 더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말을 더듬게 된 原因은 나도 모른다. 初等學校 때부터 甚한 콤플렉스였다. 하도 더듬거려 冊을 소리 내서 읽는 게 不可能할 程度였다. 어린 마음에 傷處가 생겨 비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神奇하게 노래를 부를 때는 全혀 더듬지 않았다. 音樂先生님이 노래를 씩씩하게 부른다며 合唱團에 넣어주실 程度였다. 우리 合唱團이 大會에 나가 1等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自信感을 갖고 말더듬는 걸 고치려고 무던히도 努力했다. 아침마다 新聞 社說을 소리 내서 읽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더듬으며 생긴 傷處가 있다 보니 他人의 傷處와 苦痛에 더 共感할 수 있게 되었고, 相對方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疏通의 힘이 자랐다.”

    APEC 釜山 誘致와 열린우리당 市長 候補

    4월 9일 오거돈 전 장관과 부산시장에 출마하는 다른 후보들이 한 행사장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박해윤 기자]

    4月 9日 吳巨敦 前 長官과 釜山市長에 出馬하는 다른 候補들이 한 行事場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박해윤 記者]

    그는 1974年 行政考試에 合格하며 公職의 길을 걸었다. 釜山市 行政副市長, 政務副市長에 이어 2003年엔 市長 權限代行을 맡는 等 30年 公職生活 大部分을 故鄕인 釜山에서 服務했다. 

    釜山市長 權限代行을 하다 2004年 6月 釜山市長 再補闕 選擧에서 열린우리당 候補로 出馬했다. 當時 열린우리당이 執權 與黨이긴 했지만 釜山地域 情緖上 열린우리당 候補가 釜山市長이 될 可能性은 낮지 않았나. 

    “當時 한나라당에서도 市場 候補로 迎入 提案을 받았다. 어쩌면 그쪽으로 가는 게 내 政治 人生에서는 더 便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個人的 政治 欲心 같은 건 없다. ‘釜山 發展’이 먼저다. 當時엔 APEC(아시아太平洋經濟協力體) 會議를 釜山에 誘致하는 게 釜山 發展에 매우 重要했다. 그래서 釜山市長 權限代行 資格으로 盧武鉉 大統領과 談判을 벌이러 靑瓦臺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내가 열린우리당 候補로 釜山市長 選擧에 出馬하는 條件으로 APEC을 釜山에 誘致할 수 있었고 關聯 豫算도 相當額 確保할 수 있었다.” 

    釜山 發展을 위해 自身을 犧牲한 건가. 

    “그건 아니다. 當時 盧 大統領을 비롯한 參與政府 關係者들과 釜山 地域 懸案을 두고 많은 對話를 하면서 疏通이 잘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釜山 發展을 위한 共感帶가 形成되었다.” 

    釜山市長 選擧에서 落選한 뒤 海洋水産部 長官으로 任命되자 報恩人事라는 批判이 일었다. 

    “그런 批判의 목소리를 나도 들었다. 그러나 海水部 長官에 任命된 것은 盧 大統領의 釜山 사랑 反映이었다. 釜山은 海洋을 통해서만이 經濟를 살릴 수 있다는 判斷에 따라 내 行政 能力을 認定하고 맡기신 것이다. 熱心히 그 任務를 遂行한 結果, 只今도 海水部 職員들로부터 가장 記憶에 남는 前職 長官이 되었고, 韓國 海洋 關聯 最高 專門家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自負한다.” 

    海水部 長官 以後 國會 入城도 可能했는데. 

    “總選 出馬 勸誘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全혀 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釜山 發展에 寄與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세 番의 失敗, 달라진 與件

    釜山은 2002年 大選에서 노무현 大統領을 排出했음에도 不拘하고 民主黨 支持勢가 弱했던 理由가 뭐라고 보나. 

    “釜山은 代表的 野黨 都市였다. 그런데 朴正熙 軍事獨裁 時節에 野黨이라는 理由로 엄청난 忽待를 받고 疲弊한 都市가 되었다. 이틈을 利用해 保守 勢力은 釜山의 主流層을 經濟的 理由로 保守化시켰다. 市民들은 與黨 都市가 되면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漠然한 期待 갖게 됐고 保守的인 性向의 都市로 變했던 같다. 그러나 이젠 市民들 사이에 政治權力을 바꾸지 않으면 釜山이 變化 發展할 수 없다는 共感帶가 形成되고 있다고 본다.” 

    2004年과 2006年, 2014年 3番이나 釜山市長에 挑戰했지만 失敗했다. 

    “처음 두 番은 地方 權力 交替만이 釜山을 바꿀 수 있다는 使命感에서 鷄卵으로 바위를 치는 心情으로 뻔히 질 줄 아는 選擧였지만 挑戰했다. 釜山의 變化와 發展에 對한 切實함은 내 一生을 통해 이룩해야 할 ‘價値’와 ‘信念’이 됐다. 2014年 選擧는 出馬 意思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나에 對한 支持 熱氣가 높았다. 그런 民心을 外面하는 건 市民들에 對한 禮儀가 아니다 싶어 使命感으로 出馬했다. 無所屬으로 出馬한 것은 當時 새정치민주연합의 看板으로는 釜山에서 權力交替가 이루어질 수 없는 環境이었기 때문이다.” 

    結果的으로 세 番 모두 釜山 市民의 마음을 얻는 데 失敗했다. 理由가 뭐였다고 보나. 

    “基本的으로 내가 不足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釜山의 政治 認識을 바꾸는데 나도, 民主黨도 힘에 부쳤다. 하지만 이番엔 釜山市民들 認識이 바뀌고 있는 게 보인다. 30餘 年間 釜山의 政治權力이 한 番도 바뀌지 않으면서 고인 물이 되어 썩어버린 釜山 政治를 이番엔 바꿔야 하지 않겠나 하는 認識이 커지고 있다.”

    文在寅 大統領과의 因緣

    오거돈 전 장관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부산시 상임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왼쪽). 부산 지역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오거돈 전 장관. [박해윤 기자]

    吳巨敦 前 長官은 지난 大選에서 文在寅 候補 釜山市 常任選對委員長으로 活動했다(왼쪽). 釜山 地域 靑少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吳巨敦 前 長官. [박해윤 記者]

    自身의 不足함을 메우기 위해 그동안 어떤 準備를 했나. 

    “選擧를 意識해서 뭘 꾸미고 準備하는 性格이 아니다. 그저 釜山 發展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熱心히 했다. 2008年부터 4年間 한국해양대학교 總長을 하면서도 釜山을 海洋 都市로 만들어가는 데 寄與했다고 自負한다.” 

    吳巨敦 候補는 海洋大學校 總長 在任 期間 800億 원臺이던 大學 財政 規模를 1600億 원臺로 2倍 가까이 증가시켰다. 2009年부터 3年間 登錄金을 凍結한 狀態에서도 奬學金 受惠率 80%로 釜山·慶南地域 1位에 올려놓았다. 그의 在任 期間 中 海洋大는 當時 全國 4年制 國公立大學 中 敎育成果指數 3年 連續 1位, 敎育力量强化事業 4年 連續 選定, 2011年度 全國 國公立大學 就業率 1位를 記錄했다. 

    敎育者의 길을 걸으며 느낀 點이 있다면. 

    “釜山 地域 젊은이들이 首都圈 等 다른 地域으로 빠져나가는 건 正말 深刻한 問題다. 그렇다고 해서 일자리도, 꿈을 펼칠 張도 만들지 못한 채 釜山에 있으라고 할 수도 없다.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게 첫째 課題다. 經濟를 復興하고 좋은 일자리 만드는 것도 重要하지만 敎育하기 좋은 都市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大學들을 特性化해서 그 分野에서는 世界에서 認定받는 大學으로 만들어 오히려 外部에서 釜山으로 留學 오게 만들고 싶다.” 

    지난 大選에서 동명대 總長 자리를 抛棄하면서까지 釜山地域 常任選對委員長을 맡아 文在寅 大統領의 當選을 도왔다. 文 大統領과의 因緣은. 

    “私的인 因緣으로는 경남고등학교 先後輩 사이다. 1990年代에 내가 釜山市 公務員으로 일할 때 民主公園 建立 問題로 文在寅 辯護士를 만난 적이 있는데 대단히 合理的이고 성실한 분이란 느낌을 받았다. 海水部 長官을 할 때 文 大統領이 民政首席이어서 業務 關聯해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분이 自敍傳에 썼듯이 中央에서 長官이나 首席을 하고 釜山으로 돌아온 사람이 그 當時 우리 둘밖에 없어서 서로 共感하는 部分이 많았다.”

    民主黨 正體性은 疏通과 包容

    吳 前 長官은 過去 민주당 釜山市長 候補로 남다른 競爭力을 보여줬다. 中道性向人 데다 釜山의 主流 그룹에 屬한다는 特殊性 때문에 保守政黨 候補를 이길 수 있는 唯一한 代案으로 擧論돼왔다. 그런데 이番 選擧를 앞두고 민주당 內에서 民主黨 正體性과 맞지 않는 人物이라며 ‘吳巨敦 排除論’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나는 세 番에 걸쳐서 민주당 旗발을 들고 出馬했다. 文在寅 大統領을 만들기 위해 釜山市 常任選對委員長으로 全力을 다했다. 그 結果 釜山이 嶺南 地域에서는 唯一하게 勝利하는 데 寄與했다고 自負한다. 이런 나를 民主黨 正體性과 다르다고 하는 게 얼마나 說得力이 있겠나. 釜山에서 민주당이 이기려면 政派的 思考에서 벗어나야 한다. 疏通과 包容을 통해 釜山을 바꿔가야 한다. 疏通을 통해 釜山 全體를 아우르며 發展을 이끌어가자는 點에서는 文在寅 大統領과 나의 哲學이 一致한다.” 

    1948年生이니 나이가 올해로 滿 70歲다. 健康은 自身 있나. 

    “先天的으로 좋은 健康을 갖게 해주신 父母님에게 感謝하게 생각한다. 糖尿나 成人病은 勿論 없다. 먹는 藥도 없고. 餘談이지만 팔굽혀펴기 100回 程度는 只今도 自身 있다. 登山이 趣味인데 젊은이들에 뒤처지지 않고 오른다. 健康나이는 40代 못지않다고 自負한다.” 

    하루 日課가 어떻게 되나. 


    “대중없다. 어떤 날은 새벽 4時에 일어날 때도 있고, 普通 6時엔 起牀한다. 요즘은 ‘釜山 네 바퀴 大長程’을 하고 있다. 하루 8時間 以上 釜山 구석구석을 돌고 있다. 온終日 市民들 만나고 밤 12時에 들어갈 때도 있지만 疲勞感을 느끼지 못한다.” 

    市民들을 直接 만나보니 밑바닥 民心이 어떤가. 

    “經濟에 對한 걱정을 대단히 많이 한다. 그리고 ‘이제 世上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도 釜山의 主人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希望을 갖고 있다는 걸 確實히 느낀다. 政權交替 통한 政黨 間 競爭 없이는 釜山 發展도 없다는 認識이 確固하게 자리 잡은 것 같다.”

    사람 中心의 革新的 스마트 都市

    ‘第2의 首都’로 불리던 釜山의 位相이 沒落했다는 指摘이 많다. 釜山이 當面한 가장 큰 問題點을 꼽는다면. 

    “첫째, 地域 經濟를 이끌어가는 主體들이 企業의 競爭力과 新成長 動力을 確保하지 못하는 地域 經濟 리더십 不在다. 둘째, 主力 産業을 確保하지 못하고 일자리 創出이 不可能한 旣存의 産業에만 依存하는 産業構造다. 셋째, 社會 文化 全般의 創意性과 多樣性 等 價値 體系의 大革新이 必要하다. 이러한 危機를 克服하기 위해서 釜山은 實事求是(實事求是)를 追求하는 革新을 통해 强한 經濟 體質의 都市로 바뀌어야 하고, 사람 中心의 幸福한 都市, 革新的 스마트 都市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 原因을 찾는다면. 

    “크게는 首都圈 爲主로 이루어지는 中央集權的인 政治 構造에 起因한다. 改憲을 통한 地方分權 確立이 무엇보다도 重要하다. 分權을 통해 釜山이 自立的인 都市國家로서의 位相을 確保해야 한다. 그래서 東南圈 經濟를 牽引할 수 있는 經濟 허브 都市가 되어야 한다. 釜山 內部的으로는 累累이 强調했듯이 30年 가까이 一黨이 獨占해온 構造를 改善해야 한다. 政治權力 交替를 통해 市民의 幸福을 最優先에 두는, 市民과의 疏通과 共感에 바탕을 둔 是正 革新이 꼭 必要하다. 不通의 行政과 市場과 公務員 主導型의 行政을 市民 幸福 中心으로 改革해야 한다.”

    東北亞 海洋首都

    釜山 發展을 위해 時急히 解決해야 할 것이 있다면. 

    “釜山의 産業構造를 革新해야 한다. 일자리와 附加價値가 擴大되지 않는 只今의 産業構造를 융·複合 産業化를 통해 新成長 動力을 가진 産業構造로 만들어야 한다. 신발 産業 以後 主力産業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4次産業革命型 海洋·物流 産業을 釜山의 主力으로 삼아야 한다. 釜山만의 特性을 살린 海洋과 物流 等을 ICT와 事物인터넷과 連繫한 스마트海洋·物流産業化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停滯된 釜山의 經濟成長을 牽引해야 한다.” 

    釜山 發展을 위해 政府에 바라는 게 있다면. 

    “文在寅 大統領은 大選 當時 나와 協議를 통해 釜山을 21世紀 新海洋 時代에 걸맞은 東北亞 海洋首都로 만들겠다고 公約했다. (文 大統領이) 釜山에서 南北 宗團 鐵道를 거쳐 유럽까지 가고, 極東 러시아 가스管이 부산항까지 내려오는 等의 構想을 밝힐 때 가슴이 벅찼다. 以外에도 嘉德新空港, 2030 登錄엑스포 等 釜山 經濟 體質을 바꿀 수 있는 計劃들이 蹉跌 없이 實現되어야 한다. 釜山만이 가질 수 있는 長點인 海洋을 活用한 ‘東北亞 海洋首都’ 비전은 釜山의 먹거리와 일자리 問題를 解決할 새로운 未來다. 이의 完成을 위한 支援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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