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수 (法曹人)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한성수
大韓民國의 大法官
任期 1964年 3月 2日 ~ 1968年 10月 7日

身上情報
出生日 1910年 7月 7日 ( 1910-07-07 ) (113歲)
出生地 大韓民國 慶尙南道 山淸郡
死亡日 1988年 5月 6日 ( 1988-05-06 ) (77歲)
經歷 法院行政處長


한성수 (韓聖壽, 1910年 7月 7日 ~ 1988年 5月 6日 )는 大韓民國의 大法官 을 歷任한 法曹人이다. 長男이 大韓民國의 憲法裁判官 을 歷任한 한대현 , 사위가 大韓民國의 大法官 을 歷任한 李會昌 이다. [1]

生涯 [ 編輯 ]

1910年 7月 7日 慶尙南道 山淸郡 에서 태어나 5年制인 경성사범학교 와 1930年 1年制 경성사범학교 練習科를 卒業한 한성수는 普通學校 敎師로 在職하면서 1935年 中等敎員 資格 檢定試驗에 合格해 全州師範學校 , 新義州 洞中學校, 晉州師範學校 에서 敎師로 在職하였다. 敎師로 在職하면서 日本 高等文官試驗 豫備試驗을 거쳐 1942年 高等文官試驗 司法科에 合格했다.

以後 1945年 大邱地方法院 . 1947年 釜山地方法院 判事를 하다가 1948年 釜山地方法院 部長判事가 되었으며 1952年에 法院行政處 次長, 1955年 法院行政處長 , 1959年 大法官 麾下의 大法院 判事로 在職하다가 大法院長 職務代行이었던 배정현 等 6名의 大法官이 現職에서 물러나면서 1961年 6月에 大法院長 職務代行에 任命되었으며 1961年 서울高等法院 法院長을 거쳐 1964年 3月 2日부터 1968年 10月 7日까지 旣存의 大法官에서 職名이 變更된 大法院 判事를 歷任했다.

大法院長 職務代行을 맡았던 한성수는 1966年 10月 17日 春川地方法院 에 事務監査를 나갔다가 腦溢血 로 卒倒를 하여 重態에 빠지는 等 2年동안 裁判에 干與하지 못한 채 療養을 하다가 1968年 9月 30日 大法院長에게 社稷의 意思를 밝히고 10月 2日 正式으로 辭職書를 提出하여 6日 뒤인 10月 8日 受理되었으며 10月 21日 任命公證人이 되어 公證業務에 從事하였으나 健康上 理由로 1970年 12月 31日에 그만 두었다.

釜山地方法院 에서 在職할 때는 부산대학교 法學部와 東亞大學校 法學部에서 講師를 하였으며, 1952年 判事, 檢事 特別任用試驗委員, 1956年 法典編纂委員, 1965年 大寒國際法學會 理事職을 歷任했다.

主要 判決 [ 編輯 ]

  • 大法官 職務代理를 하던 1960年 11月 24日 比丘와 帶妻僧 사이의 主導權 爭奪과 關聯한 法的 紛爭인 佛敎 淨化 對策委員會 決意無效 確認訴訟 主審 判事를 맡아 "決意한 參加한 사람이 比丘와 對處 各 5名임에도 不拘하고 決意를 無效로 하려면 10名 全員을 相對로 해야 한다는 理由로 比丘 側의 敗訴 部分을 取消하고 公訴를 却下한 것은 被告人 當事者 資格 規定에 있어 法律上 誤謬를 犯했다"는 理由로 原審을 破棄하고 서울高等法院으로 歡送했다. [2]

各州 [ 編輯 ]

  1. “保管된 寫本” . 2018年 4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4月 7日에 確認함 .  
  2. 東亞日報 1960年 11月 25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