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드 마리보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피에르 드 마리보
Marivaux
作家 情報
出生
파리
死亡
파리 ,
國籍 프랑스
言語 프랑스語
職業 劇作家 , 作家 , 小說家 , 著者 , 言論人
主要 作品
署名

墓碑
墓所 Church of Saint Eustache

피에르 카를레 드 샹블랭 드 마리보 ( 프랑스語 : Pierre Carlet de Chamblain de Marivaux , 1688年 2月 4日 ~ 1763年 2月 12日 )는 프랑스 劇作家 利子 小說家 이다. 긴 이름을 줄여서 흔히 피에르 드 마리보 或은 마리보 라고 부른다.

生涯 [ 編輯 ]

아버지는 造幣國葬을 지냈으며, 어린 時節은 리옹 에서 자랐고 커서는 리모주 에서 보내면서 그 동안 法律을 배워 1712年에 파리 로 나왔다. 퐁트넬 , 라모트 等과 사귀어 그 紹介로 랑베르 侯爵夫人이나 賞湯夫人의 살롱에 出入했다.

文學에 뜻을 두어 처음에는 두세 가지 小說에 손을 댔으나 成功하지 못했고 1720年에 처음으로 悲劇 <안니바르>를 프랑스 劇場에서 상연, 劇作家로서의 첫出發을 했다. 이 悲劇은 失敗로 끝나고 말았으나 그 해 <사랑과 眞實> <사랑으로 硏磨된 아를르캥>의 두 戱曲을 이탈리아 劇場에서 상연, 特히 後者는 成功을 거두어 이 劇團과의 오랜 交涉이 始作된다.

그 해 로의 經濟政策 破綻으로 財産을 잃은 그는 生活을 위해 <르 스펙타퇴르 프랑세>(1722-23)를 비롯한 定期 刊行物을 혼자서 編輯, 發行했다. 여기에는 社會批評家로서의 手腕보다 오히려 自己를 表現하는 일이 적었던 그의 모랄리스트로서의 人品을 엿볼 수 있겠다.

그는 平生에 40篇 以上의 喜劇을 썼으며 그 主要한 것은 1722年의 <사랑의 奇襲>, 23年에 <二重의 外道>, 27年의 <第2의 사랑의 奇襲>, 30年에 <사랑과 偶然의 장난>, 37年에 <虛僞의 告白>, 40年에 <試鍊> 等이고, 生前에 上演된 29篇의 喜劇 가운데에서 프랑스 極端에 委任된 것은 10篇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當時의 '現代人의 自由로운 極端'이었던 이탈리아 劇團을 爲해 쓰여졌으며 코메디아 델 아르테 의 메커니즘 속에 輕快하고 微妙한 精神을 確立시켰다.

作品 世界 [ 編輯 ]

마리보는 少數의 例外를 除外하고는 恒常 하나의 테마, 卽 告白 以前의 相互間에 摸索하는 사랑의 마음을 꾸준히 描寫했다. 이 隱密한 感情은 自尊心·羞恥心에서 나온 온갖 障礙(誤解나 嫉妬나 속이 뻔한 거짓말) 等에 부딪히면서도 마지막의 '사랑의 告白'이라는 歡喜의 瞬間을 向해 引導되어 간다. 마리보 演劇의 喜劇性은 바로 이 點에 있다고 하겠으며 觀客으로서는 이미 明確해진 이 感情의 旅路를 主人公만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無益한 迂餘曲折을 겪는 모습은 觀客의 微笑를 자아내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靈魂의 微笑라는 喜劇美가 當時에 絶對的인 影響力을 지녔던 몰리에르 및 그 後繼들의 그것과 本質的으로 달랐음은 明確하다. 여기서는 性格의 銓衡이나 風俗描寫는 그 痕跡을 감추고 消極的(笑劇的)인 手法도 端役 가운데에서 겨우 若干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古典喜劇에서는 줄거리의 一部에 不過했던 戀愛를 擴大시켜 唯一한 테마로 하고, 이를 獨自的인 作極法과 文體로 處理하여 마리보는 프랑스 喜劇社에 戀愛心理劇이라는 새로운 分野를 開拓했다. 라신 에서 發端된 이 흐름은 19世紀의 뮈세 , 포르토리슈 에게로 繼承된다. 微妙한 女性心理를 다루는 極端的으로서의 세련된 手法은 同時代人으로부터 마리보다즈(마리보 趣味)라고 불려, 때로는 批判을 받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 그의 作品은 心理主義的 古典으로서 널리 애호되고 있다.

小說家로서의 마리報道 오늘날 再評價되고 있어 <마리안의 一生>(1731-41) <벼락富者가 된 農夫>(1734-35)의 두 長篇은 모두 庶民을 主人公으로 事實的인 風俗描寫나 心理描寫에 近代小說에의 接近을 느낄 수 있다.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