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방송 事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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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事態 는 1991年 평화방송 勞動組合이 公正放送을 要求하며 罷業에 突入하자 社側이 勞組員 27名을 大量 解雇한 事件이다. 이 事件은 大韓民國 言論社 罷業 歷史上 1975年 東亞日報 白紙廣告 事態 (134名) 以後 가장 많은 解雇者를 輩出한 事件이다.

背景 [ 編輯 ]

1990年 4月 15日 開國한 평화방송 은 個國 한달만에 안성열 報道局長을 待機發令 措置하며 報道 프로그램을 一方的으로 縮小 改編했다.

조덕현 社長神父 等 經營陣은 報道 內容 뿐만 아니라 純粹 宣敎 敎養 프로그램에서도 出演者 選定, 發言內容 等에 干涉을 해왔다. 特히 正義具現司祭團 所屬 神父 等의 出演은 涉外過程에서 막고 放送內容度 事前 檢閱해 政府에 批判的인 內容은 交替하거나 削除하는 等의 措處를 取했다.

이에 抗議해 勞組는 "全國의 信者들이 모은 誠金으로 設立된 평화방송이 偏頗放送을 일삼는 것은 經營層이 政權과 結託해 가톨릭內 一部 保守主義者들의 立場만을 代辯해 온 것"이라며 非難하며 罷業에 突入했다. [1]

罷業 突入 [ 編輯 ]

평화방송은 1991年 1月 18日 製作을 拒否한 社會部 組合員 9名을 解雇하는 等 중징계했다. 이에 勞動組合은 이날 非常總會를 開催하고 罷業 斷行을 決意하고 平和放送 死守를 위한 鬪爭委員會를 結成했다. 社側은 이에 對해 勞組事務室 閉鎖로 맞섰고 報道局 幹部 4名은 會社의 措置에 抗議하며 集團 辭表를 提出했다. 평화방송 社側은 1月 22日 罷業 參加 組合員 28名을 懲戒위에 回附했다. 또 罷業 參加 組合員 全員(36名)을 業務妨害嫌疑로 告訴했다.

公權力 投入과 大量 解雇 [ 編輯 ]

1月 24日 社側은 公權力 投入을 要請해 警察 5個 中隊 700餘名이 投入되어 會社 建物서 籠城中이던 組合員 29名이 連行됐다. 言論社 罷業 現場에 公權力이 投入된 것은 1990年 KBS 한국방송 罷業 以後 最初의 事件이었다. 勞組는 以後 徹夜 斷食과 언론노련 事務室에서 籠城을 이어갔다.

社側은 6月 27日 27名의 罷業組合員 全員을 解雇했다. [2]

事件의 波長 [ 編輯 ]

金壽煥 樞機卿 은 1991年 2月 20日 平和放送 事態에 對해 敎會의 公式 立場을 밝히는 聲明書를 發表했다. 聲明書에서 金 樞機卿은 "평화방송은 福音 宣敎를 위한 宗敎放送으로 現 經營陣은 이 目的과 方法으로 會社를 運營하고 있다" 며 經營陣을 支持하고 "不法罷業 社員들中 잘못을 認定하고 함께 일하려는 사람은 善處하겠다"고 밝혔다. [3]

하지만 平和放送 事態는 사랑과 平和를 앞세우는 가톨릭이 使嗾로 있는 宗敎放送社에서 記者들을 大量解雇 하고 公權力 投入을 要請해 籠城中인 組合員을 强制로 退去시켰다는 點에서 社會에 큰 衝擊을 주었다.

各州 [ 編輯 ]

  1. “평화방송 宗敎 프로도 檢閱” (한겨레) . 1991年 1月31日에 確認함 .  
  2. 《언론노련 10年史》
  3. “평화방송 事態 經營陣 支持 金 樞機卿 석명 發表” (경향신문) . 1991年 2月20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