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君陵

( 平壤 檀君陵 에서 넘어옴)

檀君陵
(檀君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國寶
1993年 發掘과 改建 全義 檀君陵 모습.
種目 國寶 第174號
時代 古朝鮮
住所 평양시 江東郡 문흥리

檀君陵 (檀君陵)은 平壤直轄市 대성區域 에서 22 km 떨어진 江東郡 문흥리 대박산에 位置한 大理石 으로 지어진 돌무지무덤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는 이를 古朝鮮 의 指導者였던 檀君 (과 그의 夫人)의 陵이라고 主張한다. 1993年에 發見되었다. 面積은 1.8 km 2 이며 대박산 기슭에 位置해 있으며, 피라미드형人 陵의 높이는 22m, 너비는 50m이다.

平壤直轄市 近郊인 江東郡 邑의 西쪽 30리地點에 檀君王儉 과 關聯이 있는 遺跡들과 指名, 傳說과 說話들이 傳해져 내려오고 있었는데, 檀君陵이 位置한 대박산 은 檀君의 肖像畫를 모시고 祭祀를 지냈던 檀君洞과 檀君이 弘益人間의 理念을 하늘에 闡明했다는 아달山, 그리고 크고 밝은 山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由來 [ 編輯 ]

高麗史 》 地理誌에는 강동현 ‘박달곶촌’이라는 마을에 檀君陵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는 記錄이 나오고 1530年 에 編纂된 《 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는 江東郡에 2基의 큰 무덤이 있는데 西쪽에 있는 둘레가 410字 되는 墓가 檀君陵이라고 쓰고 있고 《肅宗實錄》에서도 肅宗왕이 檀君廟와 東明王 의 墓를 해마다 손질할 곳에 對한 建議書를 承認한 것이 밝혀져 있다. 또한 《 英祖實錄 》, 《 正祖實錄 》들에도 王들이 平壤監司에게 命하여 봄, 가을에 祭祀를 지내는것을 慣習化韓 事實도 記錄되어 있다. 《 世宗實錄 》37卷에도 端午, 秋夕에 檀君 을 始祖로 祭를 지냈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

한便 一部 在野史學者들은 檀君世紀 (檀君世紀)의 五世檀君 구을 在位十六年(五世檀君 丘乙 在位十六年..)이라는 記錄을 들어 "在位 16年에 親히 장당경(藏唐京)에 行次하여 三神團(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 無窮花)를 많이 심었고 그해 7月에 임금이 南쪽으로 循行하여 風流江(風流江, 大同江 줄기 沸流江)을 거쳐 宋孃(松壤, 平壤 )에 이르러 病을 얻으니 그곳에서 世上을 떴다"는 것이고 대박산 (大博山)에 葬事 지내고 右가(牛加)의 달문(達門)李 뽑혀서 대筒을 이었다는 內容으로 檀君陵의 主人公은 47名의 檀君 中 五世 檀君 구을(丘乙)이라는 主張이다. [1]

그러나 《 世宗實錄 》 地理誌 강동현 條에는 檀君陵에 對한 說明이 없다가 東國輿地勝覽 에 "...大塚(大塚) 中... 하나는 玄의 西쪽으로 3里에 있으며 둘레 4百 10隻으로 俗談에 檀君廟(檀君墓)라 傳한다." 라 하며 난데없이 登場한다. 또한 같은 冊에서 東明王 이 平壤에 都邑한 적이 없음에도 不拘하고 平壤 의 救濟宮(九梯宮), 기린굴(麒麟窟)을 民間에서 말하는 東明王 의 古跡이라 說明하는 것을 볼 때, 檀君廟를 비롯한 民間 傳說들은 쉽게 믿기 어렵다.

다만 36歲 成宗 20年(1489年, 氣幼年)에 官署地方을 旅行하며 平壤 에서 쓰였을 것으로 推定되는 秋江 남효온 (1454~1492)의〈단군묘 謁見〉이라는 詩이다.

檀君이 우리를 낳으시니 우리 江山에 사람이 많지 않나(檀君生我靑丘衆) / 패수에서 倫理道德을 가르치시고(敎我彛倫浿水邊) / 藥草를 찾고 刑罰을 내린 지 萬歲가 되어도(採藥呵斯今萬世) / 只今까지 사람들은 戊辰年을 記憶한다네(至今人記戊辰年).

戊辰年(戊辰年)은 바로 檀君 이 나라를 세웠던 紀元前 2333年이다. 이 詩는 檀君 에 對한 讚美와 함께 남효온 은 關西地方의 古朝鮮 , 高句麗 , 高麗 等의 遺跡地를 두루 찾아다니며 民族의 自負心과 矜持를 나타낸 것이 特別하다. 남효온 生六臣 中의 한사람으로 홍유손 , 정희량 과 함께 佔畢齋 김종직 의 弟子이며 同時에 淸寒子 김시습 의 弟子였다.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主張 [ 編輯 ]

金日成 1993年 10月 20日 檀君陵改建關係部門 일군협의회에서 한 演說 '檀君陵 改建 方向에 對하여'에 北의 公式 立場과 金日成 이 指示한 復元 方向이 나와 있는데, 槪略的인 內容은 다음과 같다.

  • 只今까지 檀君은 神話의 人物로 傳해져 왔으나, 이 發掘로 實際 存在하던 人物이라는 것이 明白하게 證明되었다.
  • 考古學硏究所를 비롯한 여러 硏究機關에서 檢證한 結果, 檀君의 키는 170cm가 된다.
  • 檀君이 實在한 人物이라는 것이 科學으로 考證된만큼, 곰이 變한 얘기 [3] 는 虛構였음이 밝혀졌다.
  • 檀君陵은 朝鮮民族 原始鳥의 무덤이므로 東明王陵보다 크고 雄壯하게 改建해야 한다. 높이도 더 높게 만들고, 흙이 아닌 돌을 利用해 피라미드式으로 쌓아야 한다.
  • 사람이 들어가 볼 수 있게 무덤칸에 冠帶를 2個 놓아야 한다.
  • 檀君의 遺骨은 南쪽을 向하여 오른쪽에 놓고, 夫人의 遺骨은 그 왼쪽에 놓아야 한다.
  • 壁畫는 이미 毁損되어 알아 볼 수가 없으므로, 굳이 새로 그릴 必要는 없다.
  • 고조선의 建築形式에 맞게 돌로 門을 세워야 한다.
  • 祭堂을 만들 必要는 없으나 南韓 사람들(大倧敎人 等)李 祭祀를 지내러 올 境遇를 對備해 床돌은 만들어 두어야 한다.
  • 더불어 妙香山 九月山 에 있는 檀君 關聯 遺跡도 整備하여야 한다.

改建 [ 編輯 ]

檀君陵은 1993年 처음 發掘되어 이듬해인 1994年 에 改建되었으며, 改建을 祝賀하는 碑石을 漢文과 한글로 세웠다. 돌무지무덤 앞에는 靑銅器時代 를 代表하는 遺物인 琵琶形靑銅劍의 조각이 兩갈래로 맞대어 서 있으며, 그것과 똑같이 大理石 기둥들과 檀君의 아들들을 描寫하여 彫刻한 立像들이 서로 마주보면서 서 있도록 하였다. 또한, 檀君陵은 "改建" 過程에서 發掘當時의 모습과는 相異한 將軍塚 形態의 華麗한 大理石 建物이 되어버렸는데 이러한 華麗한 裝飾과 피라미드 形態는 北 當局이 政治的인 目的으로 이런 形態로 改築한 것이 아닌가 하는 疑惑의 對象이 되고 있다.

論難 [ 編輯 ]

예부터 이곳에는 ‘檀君陵’이라고 불려 온 무덤이 있었다. 朝鮮時代 王命의 出納을 記錄한 承政院日記 에는 이 大舶산이 太白山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1530年 發刊된 ‘ 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둘레 410字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檀君廟라고 한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初期에는 檀君陵에 對해 傳說로 置簿했으나 以後 檀君陵을 大大的으로 개보수하면서 立場을 變更하였다. “平壤에 있다는 所謂 ‘檀君陵’은 荒唐無稽한 傳說에 不過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史學者 全州弄(全疇農)은 1963年 이렇게 主張했다. 그는 初期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古代史學界에 큰 影響力을 發揮한 史學者로 알려져 있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이같이 明文化(明文化)된 意見은 體制의 公式 見解와 다름 없었다. 그러고 나서 31年 뒤인 1994年 10月 11日 , 平壤 近郊의 江東郡 대박산 기슭에서 '檀君陵'의 竣工式을 開催했다. 22m 높이에 9層 피라미드 形態와 香爐, 石燈과 臣下 8名의 彫刻像度 세워진 巨大한 무덤이었다.

古朝鮮의 成立은 傳統的으로 《 三國遺事 》의 聯隊에 따라 紀元前 2333年 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史學界는 1993年 에 檀君 遺骨의 電子常磁性共鳴法(ESR)의 數値가 5011±267年으로 測定되었다며 [4] 古朝鮮의 成立 連帶를 紀元前 30世紀까지 올려잡고 있으나, 大韓民國 의 史學界는 考古學的으로 當時 韓半島에 大規模 建築物을 造成할 수 있을 程度의 文明이 存在했는가를 들어 疑問視하고 있다.

一部 在野史學界 또한 《 閨怨士禍 》를 비롯한 一部 在野司書들은 古朝鮮의 首都로 記錄된 "平壤"李 現在의 平壤直轄市가 아니라 다른 場所일 것이라는 假說을 提示하며 平壤直轄市의 古朝鮮 首都설에 對해 懷疑的인 立場을 드러냈다. 理由는 遺骨 年代測定에 使用한 方法이 數百萬 年 前 遺物을 測定하는 데 쓰이는 方法이라는 點, 史料를 根據로 判斷할 때 平壤이 古朝鮮의 首都가 된 것은 紀元前 7世紀 以後로 後期에 屬한다는 點 等이다. [1]

이처럼 大韓民國 學界를 비롯한 外部의 史學界는 大部分 檀君陵을 認定하지 않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하지만 朝鮮時代 에도 檀君陵에 對해서는 믿을 만하다는 取信론(取信論)과 佛身論이 分明히 存在했고 取信論者들은 複數의 檀君廟가 있을 可能性을 提示했다. 그래서 17世紀 中葉 學者 許穆 같은 이는 檀君이 歷史的 存在임을 確信하고 이를 土臺로 ' 檀君世가 '까지 著述했고 韓末 國史 敎科書에서는 '帶同歷史', '東國史略', '新訂東國歷史' 等처럼 檀君陵을 歷史的 事實로 敍述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신채호 가 檀君陵을 理解하는데 近代歷史學的 解釋을 導入했고, 團地 檀君廟의 存在만을 認識했던 박은식 과는 달리 征服 君主로서의 側面을 浮刻시켜 檀君 이 遠征 途中 江東에서 死亡한 까닭에 檀君陵을 江東에 造成했다고 敍述했 듯이 檀君廟日 可能性이 높다. [1] [5]

報道 [ 編輯 ]

檀君陵의 發掘 發表는 世界 各國에 報道되었으며, 그에 따른 여러 가지 論難을 낳았다. 大韓民國 의 各種 放送媒體度 檀君陵 發掘 및 復元 消息을 報道했으며, 一部 歷史 敎科書에도 그 事實이 실려 있다. 다만, 大韓民國 이 公式的으로 北의 主張을 認定하는 것은 아니다.

檀君陵을 紹介한 프로그램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성환 (2009). 《日帝强占期 檀君陵收縮運動》. 京仁文化史. ISBN   9788949906683 .  
  2. “國土를 읽다, 이종범의 士林列傳(南孝溫 放浪, 記憶을 向한 鬪爭)” . 프레시안. 2007年 10月 8日 . 2013年 6月 21日에 確認함 .   이름 目錄에서 |이름1= 이(가) 있지만 |姓1= 이(가) 없음 ( 도움말 )
  3. 北韓 學者들間에도 熊女를 女神으로 모셨다는 主張을 펴며 곰이 아닌 熊女族 神話의 홍산文化 와 連結짓는다. 女神像은 홍산文化 의 中心地인 랴오닝省 차오양視(朝?市, 朝陽視) 뉴許良(牛河梁, 우하량) 與信墓(女神?)에서 1984年 出土된 흙으로 빚은 女神의 얼굴上으로 國家1級 遺物로 指定되어 랴오닝省孤高硏究所(??省考古?究所)에 所藏되어 있으며 2002年 64件의 禁止出國典攬文物 中 하나로 指定되었다.(국가급 中國文化遺産總覽의 홍산文化 女神像(?山文化 女神像, 2010.8.1 圖書出版 황매희 出版) 參照)
  4. 《檀君과 古朝鮮 硏究》, 檀君學會 엮음, 지식산업사, 2005年, 265쪽
  5. “檀君 무덤 있다 VS 없다..조선의 認識” . 聯合뉴스(네이버). 2009年 11月 13日 . 2013年 6月 27日에 確認함 .   이름 目錄에서 |이름1= 이(가) 있지만 |姓1= 이(가) 없음 ( 도움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