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숙
(
1935年
~
2016年
2月 19日
)은
大韓民國
의
言論人
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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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年
京畿道
水原市
에서 태어났다. 男便은
高麗大學校
敎授를 歷任한 梨泰院이고 아들은
契員藝術大學
敎授를 歷任한 李英駿, 딸은 이지영이다.
[1]
서울大學校
國語國文學科를 卒業하였고
1960年
結婚하여 專業主婦로 지내다가
1965年
東亞日報
에 入社해 出版局(신동아·여성동아) 記者로 일하였다.
1975年
東亞自由言論鬪爭委員會 事態로 동아일보에서 解職되었고
2002年
동아自由言論守護鬪爭委員會
委員長이 되어 活動하였다.
[1]
1984年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에서 工夫를 하였고
1987年
準備하던 美國 留學을 抛棄하고 <한겨레> 創刊 事務局에 發起委員으로 參與했다.
1988年
5月 '한겨레' 創刊 뒤 論說委員, 企劃委員 等을 맡아 '慰安婦 被害 對策' 等
女性問題
輿論化에 앞장섰다.
1991年
통일국민당 女性擔當 特報로 暫時 政界로 進出했다. 以後
한림大學校
社會福祉大學院에서 家族治療 硏究過程을 修了한 뒤 '조성숙家庭暴力相談所'를 열어 女性 人權 保護 活動을 펼쳤다. 以外에도 韓國新聞倫理委員會 委員, 서울家庭法院 調停委員, 韓國家族文化院 理事 兼 副院長, 江南家族相談센터 共同代表 等을 지냈다.
[1]
[2]
<어머니라는 이데올로기-어머니의 經驗世界와 自我찾기>(
2002年
), <女子로 산다는 것>(
2012年
) 等의 著書와 여러 卷의 共著를 펴냈다.
2008年
부터
신장
透析
鬪病生活을 했다.
2014年
自傳에세이 <한겨레와 나>를 整理해 한겨레에 寄贈했다.
[1]
各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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