唯美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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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美主義 (唯美主義)는 耽美主義(耽美主義), 耽美派(耽美派)와 同意(同義)로, 19世紀 中盤, 合理主義 機械主義 에 對한 反動(反動)으로서 美學的 基準은 道德性·實用性·快樂 等에 얽매이지 않는 自律性을 지녀야 한다고 主張하는 態度 및 世界觀이다.

이런 唯美主義의 傾向은 이미 古代(特히 헬레니즘)·中世·르네상스(매너리즘)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近世에 와서 藝術과 文學에서 더욱 發展하여 19世紀末 유럽에서는, 藝術은 오로지 아름다움 自體를 위해서만 存在한다는 新潮 아래 '藝術을 위한 藝術'(l'art pour l'art)의 理論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唯美主義는 藝術至上主義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藝術의 自律性 問題는 歷史的으로 보아 當時 널리 퍼져 있던 實用主義的 社會哲學과 産業時代의 醜惡性 및 俗物根性에 對한 反撥로 提起되기 始作했다. 例를 들어 18世紀 獨逸의 哲學者 이마누엘 칸트는 〈判斷力 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1790)에서 自體가 目的이 되는 '자유로운 藝術'과 다른 目的을 지녀 勞動 및 手段이 되는 '賃金 藝術'을 區別하고, 美學的 基準은 道德性·實用性·快樂 等에 얽매이지 않는 自律性을 지녀야 한다고 主張함으로써 唯美主義의 土臺를 提供했다. 이런 藝術의 自律性 思想은 獨逸에서는 괴테와 J. L. 티크 等을 통해 바이마르 古典主義와 浪漫主義로 이어졌고, 英國에서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토머스 칼라일 等을 통해, 프랑스에서는 스탈 夫人과 고티에, 쿠쟁을 통해 普及되었다.

內容의 彌補다도 形式的 美의 完全(完全)을 重視했다. 와일드 , , 보들레르 等이 代表者이다.

美(美)를 가장 至高한 價値로 보고 모든 것을 美의 見地에서 把握하는 態度 或은 美의 創造를 藝術의 目的으로 삼는 思潮로, 耽美主義(耽美主義)나 審美主義(審美主義)라고도 한다. 純粹한 審美的 經驗은 그 實在性이나 有用性 或은 道德性과 같은 外的인 目的과 關係없이 審美的 對象을 私心 없이 觀照하는 것에 있으며 自律性을 지녀야 한다고 主張한 칸트(I. Kant), 藝術 作品의 目的은 오직 그 形式的 完壁性으로 存在하는 것 뿐 그 自體의 存在를 넘어선 어떤 目的도 없기 때문에 藝術이 人類의 文化的 産物 中에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主張한 고티에(T. Gautier) 等으로부터 그 起源을 찾을 수 있다. '藝術을 위한 藝術'을 目標로 하여 藝術 속에서 敎訓性을 除去하고 形式的 美學을 重視하는 藝術關으로서의 唯美主義는 窮極的으로 純粹藝術을 志向하게 된다.

文學에서 唯美主義는 敎訓的·功利的 意味를 排除한 純粹化 傾向을 尊重하는 文藝思潮를 指稱하는데, 공쿠르 兄弟(Goncourt Frres)나 플로베르(G. Flaubert) 等과 같은 作家들은 特히 부르주아 階級에 對한 幻想을 批判하는 作品을 發表하여 象徵主義 運動을 促進시키기도 했다. 19世紀 美國의 포우(E. A. Poe)와 프랑스의 보들레르(Baudelaire), 英國의 페이터(W. h. Pater)와 라파엘 電波(Pre-Raphaelite Brotherhood), 와일드(O. Wilde) 等에서 唯美主義는 크게 發展하였고, 韓國 現代文學에서는 唯美主義가 特定한 流派를 形成하지는 않았지만 時代狀況에 따라 다양한 形態로 나타났다. 金東仁의 「狂畵師」, 「광염소나타」, 金永郞의 「牡丹이 피기까지는」, 李孝石의 「메밀꽃 필 무렵」等이 唯美主義的 傾向을 드러낸 作品이라 할 수 있다.(채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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