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아이흘러
(Willi Eichler,
1896年
1月 7日
~
1971年
10月 17日
)는
獨逸
의
言論人
利子
政治人
이었다.
政治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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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人집안에서 태어난 아이흘러는 1922年부터
괴팅겐
의 哲學者 레오나르드 넬손(Leonard Nelson)의
祕書로 일했다. 1923年에
獨逸社會民主黨
에 入黨한다. 넬손의 追從者로 넬손이 만든 國際社會主義者鬪爭同盟의
方針에 따르다가 社會黨민주당으로부터 1926年 黜黨된다. 1932/33年에 아이흘러는 나치反對 鬪爭을 위해
國際社會主義者鬪爭同盟이 만든 日刊紙 'Der Funke'의 編輯人을 歷任한다. 1932年 帝國議會 選擧에서
獨逸 共産黨
과
獨逸社會民主黨
의 共同選擧運動을 위한 活動으로 많은 有名知識人과 學者들의 支持를 얻는다.
亡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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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年
프랑스
로 移住한다. 루테티아 그룹(Lutetia-Kreis)에 屬해
히틀러
獨裁에 對抗하는 人民戰線의 形成을 試圖한다.
後에 英國으로 가서 다시 獨逸社會民主黨에 合流한다.
歸還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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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年
그는
獨逸
로 돌아와서 獨逸社會民主黨 再建에 參與한다. 同時에 '精神과 行動'이라는 雜誌를 創刊하고 그가 死亡하는
1971年
까지 發行者를 지낸다. 또한
1951年
까지 라인新聞의 編輯長으로 일한다. 政治 經歷으로는 社民黨 中部라인地域 代表와 1947/48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州議員을 지냈다.
1946年
에서
1968年
까지 獨逸사민당 最高委員을 지냈으며 슈마허 死後에는 代表의 役割을 했다. 그 外에도
고데스베르크 綱領
準備委員會 代表를 지냈으며, 1947/48年에는
英國軍政
의 諮問委員會 委員을 지냈고, 獨逸 經濟 再建에 關한 일을 했던
프랑크푸르트
의 經濟諮問委員會의 委員도 歷任했다.
1949年
에서
1953年
까지
聯邦議員
을 지냈으며 1952年부터는 言論, 放送, 映畫關聯 常任委員會 副委員長을 지낸다.
아이흘러는 戰後 獨逸社會民主黨의 影響力있는 綱領理論價 中의 하나였으며,
고데스베르크 綱領
을 草案作成과 修正에 重要한 役割을 했다. 後에 獨逸 社會민주당 關聯 財團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財團
의 共同代表로 일했다.
[1]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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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s Parlament als Reprasentant der Offentlichkeit im Rundfunk
, in: Die Freiheit des Rundfunks, Munchen, 1956.
- Grundwerte und Grundforderungen im Godesberger Grundsatzprogramm der SPD
, Bonn,1962.
- Hundert Jahre Sozialdemokratie
, Bonn, 1973.'獨逸 社會民主主義 100年', 李泰永 譯, 中央敎育文化, 1989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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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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