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映宣 (畫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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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映宣
身上情報
出生 日帝强占期 평양부
死亡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分野 西洋畫
主要 作品
影響

朴映宣 (朴泳善, 1910年 4月 10日 ~ 1994年 6月 15日 [1] )는 韓國 의 西洋畫家이다.

生涯 [ 編輯 ]

平壤 出身이다. 1931年 朝鮮美術展覽會 를 통해 登壇한 뒤, 日本 에 留學해 가와바타 美術學校 를 卒業했다.

日帝强占期 末期에 韓國과 日本의 西洋畫家들이 共同 結成한 單曠懷 에 加入해 活動하였고, 好戰的인 美術 作品을 展示한 決戰美術展 에 作品을 出品했다. [2] 이로 因해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가운데 美術 部門에 包含되었다.

光復 後인 1946年 左翼 系列 美術人 모임인 朝鮮美術家同盟이 김주경 을 中央執行委員長으로 推戴해 結成되었을 때 中央執行委員과 繪畫部 委員長을 맡았으나 [3] , 以後 朝鮮美術家同盟이 朝鮮美術同盟 으로 改編되는 過程에서 政治 論理가 美術에 介入하는데 對하여 反對하고 純粹美術을 擁護하여 右派的 立場을 開陳하였다. [4] 이화여자대학교 , 弘益大學校 , 徐羅伐藝術大學 , 중앙대학교 美術大學의 敎授를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會員을 歷任했고, 1969年 3·1文化相 , 1982年 國民勳章 文化場을 받았다.

박영선은 누드畫를 包含하여 女性을 素材로 한 人物化를 즐겨 그렸다. 色彩와 構圖를 强調하는 畫風은 西洋畫의 優雅함과 세련됨이 가득하여 現代的인 느낌을 주며, 女性의 얼굴도 西歐型으로 描寫된다. 1955年 부터 4年間 프랑스 에 留學하여 活動하면서 作風에 큰 變化가 일어나 이 時期를 起點으로 크게 두 時期로 나뉜다. 파리 遊學 前에는 寫實主義的 傾向이 剛했으나, 留學 後에는 幻想的이고 抽象的인 畫風으로 變化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元老西洋畫家 朴泳善氏 別世”. 東亞日報. 1994年 6月 16日. 30面面.  
  2. 金玟秀 (2004年 9月 5日). " 當時 親日 안한 사람은 實力이 없었어" - 所謂 '才能론·狀況論·全國民 親日論'을 反駁함” . 오마이뉴스 . 2008年 6月 16日에 確認함 .  
  3. 編輯部 (1999年 12月 22日). 《韓國現代 藝術史大系 1 (解放과 分斷 固着 時期)》. 서울: 時空社. 241쪽쪽. ISBN   895270522X .  
  4. 編輯部 (1999年 12月 22日). 《韓國現代 藝術史大系 1 (解放과 分斷 固着 時期)》. 서울: 時空社. 255쪽쪽. ISBN   895270522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