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필하모니 管絃樂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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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獨逸語 : Munchner Philharmoniker )은 獨逸 의 代表的인 管絃樂團 이다. 바이에른 放送局 所屬인 바이에른 放送 交響樂團 , 國立 管絃樂團人 바이에른 國立 管絃樂團 과 함께 뮌헨 을 根據地로 하고 있으며, 市立 管絃樂團의 役割을 遂行하고 있다.

歷史 [ 編輯 ]

1893年 오스트리아 出身의 音樂愛好家인 프란츠 카임이 뮌헨에서 創團한 社說 管絃樂團人 '카임 管絃樂團(Kaim-Orchester)' 이 始初로, 2年 뒤에는 뮌헨 톤할레의 尙州 管絃樂團이 되었다. 初代 常任 指揮者는 1893年 10月 13日 에 創團 公演을 指揮했던 한스 빈더슈타인이었고, 이어 헤르만 춤페와 페르디난트 뢰베,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가 次例로 職責을 繼承했다. 特히 뢰베와 바인가르트너는 베토벤 브루크너 等 獨逸系 傳統 레퍼토리들을 集中的으로 다루어 固定 레퍼토리로 確立시켰다. 말러 도 客員 指揮者로 자주 登場해 交響曲 第4番과 第8番을 初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0年代 부터는 深刻한 財政難에 直面하게 되었고, 結局 1908年 創團者였던 카임이 樂團 運營에서 손을 떼면서 이름도 '뮌헨 演奏協會 管絃樂團'으로 바꾸었다. 改稱과 同時에 뢰베를 다시 常任 指揮者로 招聘했고, 뢰베는 1次 世界大戰 直前인 1914年 까지 職責을 維持했다. 大戰 中에는 常任 指揮者 없이 客員 指揮에 依存했고, 戰後인 1919年 한스 피츠너 가 常任 指揮者로 就任했으나 短期間 在任에 그쳤다.

피츠너의 後任으로는 지크門트 폰 하우除去 가 任命되었고, 브루크너의 交響曲을 旣存의 弟子 改撰판이 아닌 自筆補에 充實한 編輯으로 재간행한 原電판 演奏의 普及에 크게 이바지했다. 1928年 에는 現在의 이름으로 最終 改稱했다.

1933年 에 나치스 執權 後 樂團의 性向도 親나치스로 기울었고, 1938年 에는 하우제거의 後任으로 熱烈한 나치스 支持者인 오스발트 카바스타 가 常任 指揮者로 赴任했다. 戰爭 中에는 나치스의 國策 管絃樂團 中 하나로 認定받아 活動할 수 있었으나, 1944年 戰況의 惡化로 인해 活動 停止 措置를 當했다. 尙州 公演場이었던 톤할레度 爆擊으로 破壞되었고, 戰後 美軍政의 許可를 받고 새로 赴任한 常任 指揮者였던 한스 로스바우트 의 指揮로 뮌헨 大學 講堂 等에서 演奏會를 續開했다. 카임 管絃樂團 時節 公式 데뷔 舞臺를 가졌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도 種種 客員 指揮者로 出演해 公演 收益金을 樂團에 寄附하기도 했다.

로스바우트의 後任으로는 프리츠 離居 루돌프 켐페 가 次例로 常任 指揮者 職責을 맡았고, 1979年 세르주 첼리비다케 가 常任 指揮者에 赴任하면서 樂團의 名聲이 急上昇했다. 첼리비다케는 嚴格하고 까다로운 리허설과 商業的인 錄音 拒否, 突發的인 言行 等으로 惡名이 높았으나, 樂團의 演奏力과 表現力을 끊임없이 硏磨해 世界的인 水準으로 向上시키는 데 成功했다.

첼리비다케가 1996年 에 他界한 뒤에는 3年 동안 客員 指揮 體制로 運營되다가 1999年 제임스 리바인 이 創團 後 最初의 美國人 常任 指揮者로 赴任했고, 레바인은 2004年 보스턴 交響樂團 으로 옮길 때까지 職責을 維持했다. 그 後任으로는 크리스티안 틸레만 이 任命되었으며 틸레만의 赴任과 同時에 樂團의 客員 指揮를 자주 맡았던 主賓 메타 가 桂冠 指揮者 稱號를 授與받기도 했다. 크리스티안 틸레만 은 2011年 任期를 끝으로 드레스덴 國立 管絃樂團 의 常任指揮者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며, 로린 마젤 이 2012年부터 3年 契約으로 常任指揮者職을 맡았다. 그러나 2014年에 마젤의 健康이 急激히 惡化되면서 그 해 뮌헨 필하모닉 常任指揮者職을 辭任하였고, 마젤은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7月 14日에 他界하였다.

以後 런던 交響樂團 의 首席指揮者였던 발레리 게르기예프 가 2015年부터 뮌헨 필하모닉의 常任指揮者로 赴任하여 只今에 이르고 있다. [1]

尙州 公演場과 主要 活動 [ 編輯 ]

2次大戰으로 톤할레가 破壞된 後 레지덴츠 宮殿에 있는 헤르쿨레스잘과 獨逸 博物館 會議場 等을 公演場으로 使用했으나, 1985年 街스타이크 필하모니 가 完工되면서 常駐 樂團이 되었다. 離居 在任期까지는 主로 바이에른 地方 內에서 有名한 樂團이었으나, 켐페가 이어받은 後 錄音 活動을 積極的으로 始作하면서 有名稅를 얻기 始作했다. 켐페의 後任으로 赴任한 첼리비다케는 公式的인 商業 錄音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바이에른 放送을 中心으로 演奏會 中繼가 活性化되면서 그 音源을 無斷으로 複製한 海賊版까지 만들어지는 等 話題를 불러일으켰다.

첼리비다케는 晩年에 소니 클래시컬이 映像物 形態로 브루크너 交響曲 6-8番을 製作하는 데 同意했고, 製作된 映像物은 LD와 비디오 테이프 等으로 流通되었다. 첼리비다케 事後 아들의 許諾을 받아 EMI에서 放送 實況 音源을 土臺로 公式 CD 세트들을 出班했으며, 特히 브루크너 交響曲의 錄音들은 極端的으로 느린 템포와 透明한 音響으로 話題가 되었다. 後任인 레바인은 욈스 클래식스에 音盤들을 吹入했으며, 最初로 美國 作曲家들의 作品을 樂團의 音盤 目錄에 包含시켰다. 틸레만은 專屬 音盤社인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實況 錄音 爲主로 音盤 作業을 進行하고 있다.

常任 指揮者들 外에도 한스 크나퍼츠부슈 가 브루크너 作品을 中心으로 몇 種類의 스튜디오 錄音과 實況 錄音을 남겼으며, 귄터 반트 의 放送 音源度 헨瑟러 等에서 發賣되고 있다. 하우除去와 카바스타 在任期에 帝國 放送에서 만든 放送用 錄音들도 프라이저와 뮤직 앤 아츠 等에서 復刻되어 發賣되었다.

定期 演奏會 外에도 樂團員들의 室內樂 演奏會와 오데온 廣場 野外 演奏會, 靑少年 音樂會와 어린이 音樂會도 열리고 있으며, 不定期的으로 公開 리허설도 行하고 있다.

歷代 常任 指揮者 [ 編輯 ]

參照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