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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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김명혁 博士
出生 1937年 6月 4日 ( 1937-06-04 )
日本 도쿄
死亡 2024年 2月 18日 ( 2024-02-18 ) (86歲)
性別 男性
國籍 大韓民國
職業 敎授. 牧師
宗敎 長老敎 改新敎 ( 藝場合神 )

김명혁 (金明赫, 1937年 6月 4日 ~ 2024年 2月 18日 )은 大韓民國 의 神學博士이며 牧師 이다. 殉敎者 김관주 牧師의 아들이다. 총신대學校 에서 歷史神學敎授를 했으며, 合同神學校 校長과 敎育部 認可後 合同神學大學院大學校 敎授를 歷任했다.

韓國에서 그는 어거스틴 神學硏究와 宣敎神學에 關한 權威者이다. 韓國福音主義 協議會를 創立하여 15年동안 會長과 名譽會長을 歷任 하였다. [1] 또한 江邊敎會를 創立하여 現在 元老牧師로 있으면서 韓國敎會의 여러 團體에서 活動하고 있다. 隱退後에 여러 敎會와 矯導所를 訪問하여 傳道하며 사랑의 實踐을 몸소 實踐하였다. 그가 尊敬하는 人物로 自身의 父親 김관주 牧師, 한경직 牧師, 김치선 牧師, 손양원 牧師, 그리고 주기철 牧師이다.

學歷 [ 編輯 ]

  • 서울中學校 서울高等學校 卒業 (1953,1956)
  • 서울大學校 文理大 史學科 卒業(1961, B.A.)
  • 페이스 神學校(Faith Theological Seminary) 卒業(1964, B.D.)
  • 웨스트민스터 神學校 (Westminster Seminary) 卒業(1966, Th.M.)
  • 예일 大學校 神學院(Yale Divinity School) 卒業(1967, S.T.M.)
  • 아퀴나스 神學院 (Aquinas Institute of Theology) 卒業(1973, Ph.D.)
  • 풀러神學校 宣敎神學원(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1974, Research Associate)
  • 튀빙겐 大學校 (Tubingen University)(1984, Research Fellow)
  • 빌리그레이엄센터(Billy Graham Center)(1988, Scholar in Residence)

 經歷 [ 編輯 ]

  • 후암敎會 敎育牧師 (1974-78)
  • 총신대 講師, 助敎授, 副敎授 (1975-80)
  • 永安敎會 擔任牧師 (1978-79)
  • 江邊敎會 擔任牧師 (1980-2008.1)
  • 江邊敎會 元老/宣敎牧師 (2008.1-)
  • 合同神學校 副敎授, 敎授, 校長 (1980-1993)
  • 合同神學大學院大學校 敎授, 兼任敎授, 名譽敎授(1993-現在)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會長 (2002-現在)
  • 韓國世界宣敎協議會 共同會長 (1993-現在)
  • 蘇聯宣敎會 副理事長 (1992-現在)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共同副會長(2002-2003)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共同會長(2004-2005)
  • 韓國福音主義 協議會 會長

生涯 [ 編輯 ]

殉敎者 김관주 牧師와 아들 김명혁博士

南陽 (南陽) 김명혁(金明赫, 1937年 6月 4日) 博士는 殉敎者 김관주(金冠柱, 1905年 9月 25日-1950年 6月 23日) 牧師의 아들로 日本 東京에서 태어나서 2살부터 9살까지 平安北道 新義州에서 10살부터 11살까지 平壤에서 자랐는데 11살 때 信仰의 自由를 찾아 홀로 38線을 캄캄한 밤에 뛰어 넘어서 越南河였다. 총신대學校에서 歷史神學 敎授를 했으며, 合同神學大學院大學校에서 敎授와 總長을 歷任하였다. 韓國에서 그는 歷史神學에 關한 여러 卷의 著書를 썼으며 어거스틴 硏究에 關한 權威者이며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創設하여 15年 동안 會長을 歷任하였고 現在는 名譽會長이다. 또한 江邊敎會를 創立하여 現在 元老牧師로 있으며 韓國敎會의 여러 團體에서 活動하고 있다. 마음이 따뜻한 敎授이며 예레미아와 같은 눈물의 牧會者이다. [2]

南陽은 1937年 6月 4日 日本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胡適은 그의 父親의 戶籍과 같은 平安南道 安州郡 안주읍 미상리 558番地이다. 그의 아버지 김관주 牧師는 尊敬받는 人物로서 平安南道 安州郡 안주읍 미상리에서 아버지 김현하 영수와 어머니 김정숙 勸士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김관주 牧師는 日本으로 가서 日本 도시샤 大學(同志社大?) 法學科를 中退하고 日本 도쿄 神學校를 나왔다. 그는 當時 醫學을 工夫하던 女性과 結婚을 하였다. 그는 조선국에 歸國하고 한경직 牧師의 招請으로 1938年부터 新義州 제이敎會에서 副牧師로 始作하여 後에 擔任牧會 使役을 9年 동안하였고 1947年 平壤 序文밖敎會로 옮겨 牧會를 하였다. 日帝 强占期에는 神社參拜를 反對하여 監獄에 자주 投獄되었다가 日帝가 敗亡하면서 釋放되었다. 그러나 以後 38線 以北에 들어선 共産 政權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蘇聯이 參與하는 政治에 協助할 것을 强要 받았으나 이를 拒否하자 壓力이 加해졌다. 그는 오히려 조만식 長老가 이끄는 조선민주당을 創黨하는 데 參與했고 以後 조선민주당을 脫黨하였다. 共産 政權은 結局 協助하지 않는 그를 1947年 11月 18日 平壤에서 逮捕해 平壤 外郭에 있는 使棟 炭鑛으로 데려가서 强制 勞役을 하도록 處理했고, 그는 1950年 6月 23日頃에 殉敎하였다.

南陽은 이런 그의 아버지의 殉敎信仰을 몸에 지니면서 자랐으며 後에 그의 삶도 殉敎的 信仰으로 살게되었다. 南陽은 어릴적에 安住에서 캄캄한 水曜日 밤 할머니와 온 家族이 燈불을 켜 들고 논밭 길을 걸어 멀리 있던 禮拜 處所에 가서 禮拜를 드리곤 하였다. 할머니(김정숙 捲糸)는 限平生 祈禱와 週日 聖水의 信仰을 지니고 媤집의 온 家族을 모두 예수님께 引渡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마다 山에 올라가 새벽祈禱를 平生토록 했다. 結局 男便을 悔改시켰고 세 아들을 모두 예수 믿게 했다. 男便은 領袖가 되었다. 南陽의 父親인 맏아들은 牧師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執事가 되었고 셋째 아들은 長老와 牧師가 되었다.

남양이 幼年 時節을 보낸 故鄕은 平北 新義州였다. 그의 父親 김관주 牧師가 1938年부터 8∼9年 동안 新義州 第2敎會에서 한경직 牧師와 함께 牧會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살 때부터 限平生 한 牧師의 至極한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한 牧師를 가장 尊敬하는 스승의 한 분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 主日學校 先生님들로부터 배운 信仰的 가르침이 그에게 큰 影響을 주었으며 父親이 日帝와 妥協하지 않는다고 자주 監獄에 잡혀 갔지만 어머니와 함께 監獄 담牆 밖에서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고 소리쳐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면서 殉敎信仰을 몸에 지니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初等部 時節을 보낸 곳은 平壤이다. 父親은 1946年 新義州 第2敎會를 辭任하고 47年부터 平壤 序文밖敎會에서 牧會를 始作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共産黨에게 붙잡혀 監獄에 갇히게 되었다. 後에 平壤外殼에 있는 使棟 炭鑛에 갇혀 있을 때 김일성 主席의 外叔인 강량욱 牧師가 그를 回游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姜 牧師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苦生하겠느냐”고 强하게 拒否했다고 한다.

김명혁이 그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年 7月 使動 炭鑛에서였다. 김명혁이 萬 11살 때 남루한 作業服 차림의 아버지를 만나서 人事를 나눈 다음 여기서는 週日을 바로 지키며 信仰生活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南쪽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그를 한참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너없이는 못살아 하시면서” 말씀하시며 울시면서 가라고 許諾을 하셨다. 結局 그는 48年 8月 靈的인 故鄕인 平壤을 등지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남겨두고 38線을 넘어 南쪽으로 왔다. 함께 오던 어른들은 人民軍에게 모두 잡히고 그만 혼자서 山과 들과 江을 뛰어넘어서 未知의 땅 南韓으로 달려왔다. 그는 두려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若干의 스릴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南쪽에 와서 어느 작은 草家집에서 만난 어느 靑年의 도움으로 그 靑年과 함께 汽車를 타고 서울 驛에 到着하여 서울 中區 을지로 3街 7樊紙까지 無事히 올 수가 있었다. 南陽은 그 靑年을 天使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數年 前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姨母님 집에서 살게되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牧師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牧師님과 新義州 제이敎會 出身인 김익순 長老가 그를 따뜻하게 對해주었다. 防産 國民學校 5學年에 入學하여 2年 동안 工夫를 열심해서 서울 中學校에 入學하였다. 그의 서울에서의 生活은 오래 繼續되지 못했다. 越南한지 2年 만인 1950年 6月 25日 6.25 戰爭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大邱에서 3年동안 避難 生活을 하면서도 信仰生活에 最善을 다했다. 새벽祈禱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主日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終日 敎會에 있으면서 禮拜 를 精誠껏 드렸고 奉仕와 顚倒에도 最善을 다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大邱제일교회에 다니면서 信仰生活을 했는데 그 때 어린이 使役의 代父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牧師로부터 많은 影響을 받았다.

또한 大邱에서 復興會를 여러곳에서 引導하셨던 이성봉牧師님의 復興會에 12番이나 參席하여 큰 恩惠를 받았다. 이성봉 牧師님의 按手祈禱를 12番이나 받았는데 祈禱 題目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牧師님이 되는 것이 祈禱 題目입니다” 라고 對答은 하군 했는데 서너番 後에는 묻지도 않고 “너 祈禱 題目이 좋은 牧師님이 되는 거지”라고 하시면서 按手 祈禱를 해 주시곤 했다고 김명혁 牧師는 말했다. 김명혁 牧師는 이성봉 牧師님으로부터 悔改와 恩惠 紗帽와 祈禱의 重要性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서 高等學生과 大學生 時節을 보냈는데 倉洞敎會와 대槍敎會에 다니면서 김치선 牧師 밑에서 보다 徹底한 信仰生活과 奉仕生活을 하게 되었다. 그는 김치선 牧師로부터 悔改와 새벽祈禱와 恩惠를 思慕하는 것과 顚倒의 靈的 遺産을 물려 받았다. 김치선 牧師님은 새벽마다 “2萬 8千餘 洞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주소서” 라는 祈禱의 音聲을 듣고 往十里 벌판에서 傳道를 하였다. 그는 이미 故 3때 無條件 土曜日과 週日에 往十里 벌판에서 傳道하여 學生이 60名 어른이 40名이 모이는 天幕에서 改革敎會를 하였는데 敎會의 이름을 漢陽第一敎會라고 하였고 2年 동안 牧會使役을 하였다. 그리고 高 3때 한경직 牧師를 만나서 좋은 牧師가 되기 위해서 大學校에서 무엇을 專攻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는데 歷史를 專攻하는 것이 좋다고 推薦해 주셔서 結局 서울大學校 文理大 史學科에 入學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文理大 史學科에서 西洋史를 專攻하면서 神學 硏究와 牧會 使役을 하는데 必要한 “均衡 잡힌” “兩面的인” “包容的인” “慣用的인” 思考의 틀과 眼目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大學生 時節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이명섭과 같은 좋은 信仰의 親舊들을 사귀게 되었고 보람된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1960年 4.19街 일어나던, 政治 社會的으로 混亂한 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問題를 가지고 그들은 文理大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眞摯하게 論議했다. 그 結果 “새 生活運動”을 始作하여 社會에 挑戰을 주었다고 한다.

南陽은 1961年 大學을 卒業한 後 總會神學校에 入學하였다. 그 當時 敎授陣은 박형룡, 名신홍, 한철하, 崔議員, 오병세, 강태국 敎授들로 構成되어 있었는데 그는 한철하 博士로부터 學問的 挑戰과 感化를 많이 받았다. 敎會史를 事件 爲主가 아닌 主題와 흐름 爲主로 硏究하게 된 것이었다. “어거스틴 硏究” 講義 時間에는 어거스틴의 初期 作品들을 英文으로 읽으며 그의 神學 方法論과 信仰과 理性과의 關係에 對한 그의 立場들을 다루었는데 그 當時 그에게 많은 感動과 學問에 對한 情熱을 불어 넣어 주었다. 結局 그는 後에 어거스틴을 專攻하며 碩士 學位와 博士學位 論文을 쓰게 된 動機가 되었다.

그는 總會神學校에서 두 學期 工夫를 마치고 1962年 美國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 神學校로 留學 가서 神學授業을 繼續했다. 돈이 不足해서 飛行機를 타는 代身 배를 타고 두 週 半 동안의 航海 後 샌프란시스코에 無事히 到着했다. 그리고 卽時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이틀 동안 밤낮으로 달려가서 훼이스 神學校에 到着하자 마자 工夫를 始作했다. 校長 매크레李博士의 “敎會史” 講義를 잘 듣고 工夫를 잘 해서 稱讚을 받았고, 校內 印刷所 責任者의 信任을 얻어서 印刷所에 가서 일하면서 生活費와 學費를 벌기도 했다.

그는 1964年 훼이스 神學校를 卒業하고 신학사(B.D.)를 얻은 後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神學校에 入學하여 1年 半 동안 神學碩士 過程에서 敎會史를 專攻했다. 碩士學位 論文의 題目은 “神의 都城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歷史理論” 이었는데 이는 後에 博士學位 論文으로 發展했다. 1966年 웨스트민스터 神學校를 神學碩士 學位(Th.M.)을 얻으며 卒業한 後 뉴 헤이븐에 있는 예일대學校 神學院에 入學하여 또 다시 神學碩士 過程에서 歷史神學을 專攻했는데. 歷史神學 敎授 者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敎授님의 指導를 받아 쓴 碩士學位 論文의 題目이 “敎父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解釋” 이었다. 그는 1972年 12月 아퀴나스 神學院에서 哲學博士(Ph.D.) 學位論文을 完成한 後 1973年 1月 예일대학으로 다시 와서 리써치 펠로우로 한 해를 지냈다. 그리고 마지막 1年은 풀러神學校에서 宣敎學을 硏究하게되었는데 그의 삶과 牧會에 깊은 影響을 받게되었다. 12年 동안의 美國 留學生活을 마치고 1974年 가을에 歸國한 後 후암敎會에서 5年 동안 大學生과 靑年들을 指導하며 敎育牧師로 牧會한 일이 있었다. 그의 指導로 牧會와 宣敎에 獻身한 弟子들로는 안성원, 김동화, 박선규, 최성호, 李瑱, 양용태, 한옥희, 탁정희 等이 있었다. 후암敎會 使役을 마치고 1978年 6月 22日부터 1979年 2月 18日까지 8個月 동안 永安敎會에서 開拓 牧會를 하였다. 1980年 4月 6日 江邊敎會를 設立하여 28年 동안의 江邊敎會의 牧會를 한 後에 2008年 1月 13日에 隱退를 하였다. 2024年 2月 18日 春川에 있는 山川무지개敎會에 說敎를 가던중 交通事故를 當하여 小天下였다.

神學思想 [ 編輯 ]

歷史的 正統 改革主義보다는 福音主義 神學者로서 韓國敎會의 聯合運動에도 寄與하였다. 歷史的 宣敎學的 接近에서 그의 神學思想의 評價가 再照明되어야 한다. [3]

같이 보기 [ 編輯 ]

脚註 및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