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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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화진
基本 情報
出生 1884年 8月 19日 ( 1884-08-19 )
朝鮮
死亡 1949年 6月 22日 ( 1949-06-22 ) (64歲)
性別 男性
職業 演奏者, 敎育인
장르 國樂

함화진 (咸和鎭, 1884年 8月 19日 ~ 1949年 6月 22日 )은 日帝强占期 에 主로 活動한 國樂人이다. 雅號는 梧堂(梧堂)이다.

生涯 [ 編輯 ]

高宗 21年인 1884年에 代代로 王室의 樂士를 지낸 양근 咸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함화진(咸華鎭)이었다. 함화진의 집안은 世襲的인 樂士 家門으로 曾祖父 함윤옥은 順調 憲宗 때 樂士였고, 할아버지 함제홍은 憲宗 때 短簫 젓대 의 名手로 불렸다. 큰아버지 함재홍은 젓대, 아버지 함재운 거문고 의 代價였다.

함화진은 李王職 雅樂部 의 首長인 第2歲 雅樂師長을 歷任한 함재운의 莊子로 태어나 이병문에게서 거문고를, 명완벽 에게서는 伽倻琴 을 傳受받았다. 專攻은 거문고였으나 國樂理論 部門에서도 一人者가 되었다. 10代 時節인 1900年 에 假典樂(假典樂)李 된 뒤 1901年 典樂(典樂), 1913年 아악수장, 그 뒤 雅樂師를 次例로 지냈다. 1932年 에는 아버지가 맡았던 자리인 第5歲 雅樂師長에까지 올랐고, 1939年 에 隱退했다.

한便 1912年 부터 朝鮮正樂傳習所의 伽倻琴 敎師로 在職했고, 1931年 부터 李花女子專門學校 에서 國樂理論과 거문고, 伽倻琴, 洋琴 等 實技를 가르쳤다. 1930年代 에는 編磬 編鐘 을 製作하고 處容舞 를 再現하는 等 國樂 傳統의 復舊와 保存에 많은 努力을 기울이기도 했다.

日帝 敗亡 後 美軍政 이 實施되면서 李王職雅樂部가 사라지고 함화진을 中心으로 大韓國樂院 이 結成되었다. 大韓國樂院은 아악 傳統을 固守하던 舊 李王職雅樂部와는 달리 倡樂, 器樂, 唱劇, 舞踊, 農樂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民族音樂의 樹立을 目標로 했다. 大韓國樂院이 全國農樂競演大會를 開催하는 等 國樂界 內部에서 一種의 社會參與派를 形成하면서, 이 團體를 이끈 함화진은 남로당 不法化와 左翼 勢力 索出 過程에서 左翼으로 몰려 被檢되었다.

主要 著書로는 《朝鮮아악槪要》(1915), 《朝鮮樂器便》(1933), 《李朝惡制源流》(1933), 《增補歌曲源流》(1938), 《朝鮮音樂通論》(1948) 等이 있어 國樂 硏究에 자주 引用된다. 遺稿로 《國樂50年 回顧錄》을 남겼다.

日帝 强占期 末期에 國樂界의 代表 格으로 朝鮮文藝會 , 朝鮮音樂協會 等 親日性이 剛한 音樂인 團體에서 活動한 일이 있어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音樂인 部門에 包含되었다. 이 名單에 收錄된 國樂人은 함화진과 金基洙 두 사람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