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피사로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프란시스코 피사로

프란시스코 피사로 곤살레스 ( 스페인語 : Francisco Pizarro Gonzalez , 1471年 또는 1476年 ~ 1541年 6月 26日 )는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이다. 잉카 帝國 을 征服하였으며, 現在 페루 의 首都인 리마 의 建設者이다.

初期 生涯 [ 編輯 ]

피사로는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 트루히요 에서 태어났다. 그는 陸軍 將校였던 아버지와 都市 貧民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私生兒 出身이며, 아스텍 帝國 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 와 6寸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不明確하지만, 大略 1470年代 程度에 태어났을 것으로 推定한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敎育에 큰 關心이 없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죽을 때까지 文盲으로 살게 되었다.

피사로는 1509年 11月에 新大陸, 卽 아메리카 大陸의 現在 콜롬비아가 있는 地域으로 航海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植民地를 開拓하려 하였으나, 氣候와 疾病 等으로 인해 結局 植民地 事業을 抛棄하고 本國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온 以後, 한동안 거리를 轉轉하다 1513年에 또다시 航海團에 入團하여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征服者 [ 編輯 ]

1509年 11月에 피사로는 알론소 데 五帝다가 이끄는 船團에 合流하여 現在에 콜롬비아로 航海했고, 1513年에는 바스코 발보아 의 船團에 合流하여 最初로 太平洋을 바라본 유럽人들 中 한 名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冒險을 통하여 植民地의 總督과 가까운 사이가 되게 되었고, 같은 해에 그는 原住民들과 家畜들을 管理하는 職을 맡게 되었다. 나중에 總督이 발보아를 漸次 싫어하게 되고, 마침내 除去해야겠다는 計劃을 짠 後, 그는 피사로에게 발보아를 直接 逮捕하여 데려오라고 命한다. 피사로는 그를 그대로 逮捕하여 끌어왔고, 발보아는 1519年 1月에 死刑당한다. 한便 피사로는 總督에 對한 忠誠心을 認定받아, 當時 막 지어지고 있던 파나마시티 의 市長職과 行政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된다.

한便,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帝國 을 征服했다는 消息은 피사로에게 큰 關心을 갖게 했고, 그는 南쪽에 있다는 黃金의 나라를 찾아 遠征隊를 꾸리게 된다. 그는 1524年과 1526年에 各各 한 番씩 遠征隊를 만들어 남아메리카 地域으로 向했는데, 痼疾的인 氣候 問題와 鄕土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後退해야만 했다.

狀況이 이렇게 되자, 파나마의 總督은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지만, 피사로는 이를 拒否했고 冒險을 繼續해나갔다. 그는 끊임없이 南下했고, 1528年 4月에 北部 페루 地方까지 進出하여 그 곳의 原住民들과 黃金을 發見하게 된다. 이 發見은 그에게 세 番째 遠征을 나서겠다는 熱望을 심어주었고, 以後 피사로는 곧바로 파나마로 돌아가 總督에게 支援과 함께 새로운 원정단 組織을 要請한다. 하지만 總督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向해 國王 카를로스 1世를 直接 說得하려 나선다. 그의 計劃은 대단히 成功的이어서, 그는 支援部隊 뿐만 아니라 그가 占領하는 땅에 對한 支配權까지도 一部 손에 넣게 된다. 그는 以後 그의 家族들과 親舊들까지 모두 불러모은 後 1530年에 파나마를 떠난다.

海岸가에는 워낙 好戰的이거나 異邦人들을 敵對하는 勢力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사로와 그 一行은 內陸을 통해 漸次 植民地를 開拓하기 始作한다. 그는 結局 잉카 帝國이 다스리던 領土까지 들어가게 되고, 當時 잉카 帝國의 皇帝였던 아타우알파 는 피사로가 그의 領土에 敢히 侵犯하는 것을 容納하지 않았으나, 1532年 11月에 피사로 一行에 依해 捕虜로 잡히게 되며 狀況이 逆轉되고 말았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房에 가득 들어찰만큼의 黃金을 주는 條件으로 自身을 살려줄 것을 빌었고, 또 實際로도 그렇게 하였으나 1533年에 피사로에 依해 死刑당하고 만다. 1535年 1月에 그는 現在 페루의 首都 리마를 세웠으며 이를 自身의 最大 業績으로 評價했다. 한便, 피사로는 그와 함께 잉카 征服에 나섰던 一行 中 하나인 디에고 알마그로와 內紛이 일어나게 되면서 結局 戰鬪까지 치르게 되고, 여기서 敗北한 디에고 알마그로는 捕虜로 잡혀 死刑당했다. 以後 이에 怏心을 품은 알마그로의 아들이 1541年 6月에 피사로를 리마에서 殺害함으로서 波瀾萬丈했던 生涯도 끝나게 된다. 그의 遺骸는 리마 大聖堂에 묻혔다. [1]

各州 [ 編輯 ]

  1. 크리스 하먼 (천경록 옮김) (2004). 《民衆의 世界史》. 冊갈피.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