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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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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公主 (太平公主, 665年 ~ 713年 )는 唐나라 의 皇族으로, 高宗 則天武后 의 딸이다. 姓은 李氏, 이름은 寧越. 測天 無後의 庇護 下에 强力한 政治 勢力을 形成했으며 睿宗 의 復位로 政權을 掌握했으나 뒤이어 卽位한 顯宗 과의 對立 끝에 沒落하여 自決했다. 위에 일찍 죽은 언니 安定公主(安定公主)가 있었다.

生涯 [ 編輯 ]

무測天이 가장 아낀 딸 [ 編輯 ]

인덕(麟?) 2年( 665年 ) 高宗과 則天武后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8歲 때 한 番 出家해서 太平(太平)이라는 號를 받았다. 어머니 무測天은 自身과 容貌나 性格이 가장 많이 닮은 [1] 막내딸 태평公主를 寵愛했고, 吐蕃 이 和親을 目的으로 公主의 出嫁를 請했을 때 則天武后는 딸을 먼 곳에 시집보내는 것이 싫어 道敎 寺院을 짓고 公主가 道士가 되었다고 속여 拒絶하기도 했다. [2] 高宗 또한 막내딸인 태평公主를 사랑해 그女가 내미는 文書는 읽지도 않고 署名을 해 주었다.

681年 公主는 설소(薛紹) [3] 와 婚姻해서 그와의 사이에서 2男 2女를 얻었으나 그는 낭야王 忠의 謀反罪에 連累되어 獄中에서 굶어죽었고, 690年 公主는 무遺棄(武攸?)와 再婚해(무유의의 前妻는 則天武后에 依해 處刑되었다) 그와의 사이에서 다시 2男 2女를 낳았다.

無主義 公州 [ 編輯 ]

病이 깊어진 高宗을 代身해 어머니 무測天이 收斂政治를 始作했을 때 태평公主는 그 相對役으로써 무測天의 政權에서 一翼을 맡았다. 690年 드디어 무測天이 皇帝로 卽位하고 茂朱 (武周)를 宣布하자 公主도 某黃(母皇)의 側近으로써 隱然中에 勢力을 지니게 되었다. 公主는 母親의 趣向에 들어맞는 젊은 男子를 則天武后에게 紹介하기도 했고, [4] 그 가운데 則天武后의 勢力을 등에 업고 權力을 濫用하던 설회의(薛懷義)를 側近에게 殺害하게 하는 等 남다른 行動力으로 母親의 寵愛를 받았다. [5] 무測天이 病으로 쓰러진 뒤 그 愛人이었던 場역지(張易之) ? 장창종(張昌宗) 兄弟가 專橫을 휘두르는 것이 極에 達하자 신룡 元年(705年) 宰相 장간지 (張柬之) 等과 함께 이들 兄弟를 죽이고 則天武后를 退位, 오빠 中宗을 復位시키는 政變에 同參한다. 中宗이 卽位한 뒤 皇族 가운데 重要人物로써 이름을 높이게 되었고, 안국상王(安國相王)으로 불리게 된 예왕 段과 함께 진국태평公主(??太平公主)라 불리게 되었다.

無爲의 禍 [ 編輯 ]

무測天의 退位로 天下는 다시 黨 王朝로 復歸하였으나, 張氏 兄弟와 結託하던 從兄弟 무삼사(武三思)가 장간지를 失脚시키고 四寸누이人 安樂公州(安?公主)와 짜고 710年 不倫이 暴露될 것을 두려워한 安樂公主가 어머니 위皇后와 짜고 中宗을 毒殺하였다. 「第2의 무測天」이 되고자 했던 位皇后는 온王(?王) 中舞(重茂)를 擁立하고 그를 내세워 自身이 實權을 잡고자 했지만, 태평公主는 이때에 조카 隆起(隆基, 後날의 黨 顯宗)과 模擬해서 위皇后 母女 및 그 一族을 모조리 誅殺하고 隆起의 아버지이자 自身의 親오빠인 안국상王 段을 卽位시킨다. 이로써 皇帝의 누이同生이 된 태평公主의 權勢는 頂點에 達했고, 睿宗은 위皇后 一派를 逐出한 功臣인 公主에게 1萬 好意 封土를 내리고 태평公主의 아들 설숭肝을 節君王(節郡王)으로 봉했다. 또한 睿宗은 누이를 依支하여 무슨 일이든 그女와 相議했으며, 照會에 태평公主가 나오지 않으면 宰相을 公主의 집으로 보내 諮問을 받기도 했다. [6] 한便 宰相 姚崇(姚崇) ? 壯熱(張?)을 左遷시키는 等 태평公主의 實權은 極에 達했지만, 이로 因해서 皇太子 隆起와의 對立이 차츰 깊어갔다.

公主는 셋째아들인 이융기를 太子로 冊封해서는 안된다고 主張했으나 睿宗의 맏아들인 宋王(宋王) 이헌(李憲)李 太子가 되기를 辭讓하여 結局 이융기가 太子로 冊封되었다. 公主는 太子가 派黨을 形成하고 있다고 睿宗에게 告하거나 宰相들을 불러모아 肺太子를 建議할 것을 慫慂하는 等 이융기를 除去하려 했다. 그러나 事前에 이를 알아차린 이융기의 勢力들은 睿宗에게 태평公主를 都城에서 내보내라고 간했다. 睿宗은 처음에는 이를 反對하였으나 結局 公主를 抱主(蒲州)로 이주시켰다.

皇太子 隆起와의 對立 그리고 죽음 [ 編輯 ]

712年 彗星이 出沒하자 公主는 이를 빌미로 睿宗과 太子 사이를 離間질하려 하였으나 睿宗은 오히려 太子에게 帝位를 讓位하고 太上皇으로 물러났다. [7] 새로 皇帝가 된 顯宗 과 태평公主의 對立은 激化되었다. 玄宗은 7名의 宰相 中 5名이 태평公主의 사람인 朝廷에서 政權을 掌握하지 못했고 [7] 公主는 英明한 顯宗을 廢位시킬 것을 謀議하였지만 그 陰謀는 漏泄되었다. 이듬해인 713年 태평公主가 左右림軍의 軍士를 動員해 顯宗을 除去하고 政變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理由를 들어 顯宗 自身이 3百 名의 兵士를 거느리고 태평公主 日當을 쳐서 쓰러뜨렸다. 公主는 남산사로 避身했지만 사흘 뒤, 玄宗의 心腹인 宦官 고력사 에게 自殺을 강요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 (平生 禁錮刑에 處해졌다는 說도 있다).

태평公主의 죽음으로 顯宗의 獨裁體制는 確立되었으며, 「開院의 치」라 불리게 될 黨 王朝의 中興과 最全盛期를 이끌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시앙쓰, 《皇帝를 支配한 女人들》, 강성애 驛, 미다스북스, 2012, p.306, ISBN   9788966370245
  2. 虛請웨이, 《中國을 말한다 9》, 김동휘 驛, 신원문화사, 2008, p.219, ISBN   9788935914487
  3. 性洋公主(城陽公主) 所生으로 태평公主에게는 從兄弟에 該當하였다.
  4. 자오輛, 《狂氣의 帝王學》, 김태성, 이은주 役, 한스미디어, 2006, p.168, ISBN   8959750468
  5. 이나미 리츠코, 《背信者의 中國史》, 김석희 驛, 作家精神, 2002, p.182, ISBN   8972881651
  6. 虛請웨이, p.220
  7. 虛請웨이, p.222
  8. 이나미,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