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正路 도끼事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忠正路 도끼事件 (忠正路 ── 事件)은 1958年 9月 벌어진 大韓民國 乾達들 間의 衝突事件이다.

鳴動派에서 內部의 背信者들로 因해 明洞의 組織員들은 동대문파로 몰려가고 또한 區域을 넘겨주기도하여 鳴動派는 무너져가는 狀況이었다. 이판사판으로 동대문파에 宣戰布告를 보내 싸움이 일어난 일이다. 1958年 9月 어느날 이화룡은 東大門牌와 싸움을 準備中印度중 검은色 지프車 일고여덟 臺가 當時 大同靑年團 出身 이화룡 이 이끄는 脫北者 組織이 掌握中이던 明洞 에 나타나 靑酸加里를 投擲하고 中部警察署 隣近에서 拳銃을 쏘고 淸溪川 너머로 逃走했다. 이화룡은 이를 東大門 師團 이정재 의 挑發로 看做하고 全 組織員을 집합시켜 報復을 命令했다. 그날 밤 지프車 15臺를 빌린 鳴動派는 서울運動場(現 東大門歷史文化公園 ) 앞에 모여 낫, 도끼, 쇠파이프 等의 武器를 챙겨 제各其 이정재, 임화수 , 유지광 等 동대문파 幹部들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情報가 새나간 탓에 동대문파 幹部들은 모두 鍾路 4街 에 숨어 있었고, 빈 집을 마주한 鳴動派 組織員들은 오도가도 못하다가 지나가던 巡警의 檢問을 받자 唐慌한 한 組織員이 巡警의 뺨을 때렸다. 巡警이 派出所 쪽으로 도망치자 다른 組織員이 그쪽으로 羊날 손도끼 를 投擲했다. 巡警에게 맞지는 않았지만 警察官들이 뛰쳐나오자 마피아 組織員들은 지프를 타고 逃走했다. 그러나 도끼라는 證據物이 現場에 남겨져 있었고, 自由黨 政權이 동대문파를 政治깡牌 로 雇用하고 있었던 時節인지라 鳴動派에 對한 檢擧活動이 卽時 始作되었다.

主動者로 이화룡, 정팔, 신상현(신상사), 李永順(맨발의 大將) 等 네 名이 拘束起訴되어 暴力敎師 嫌疑로 懲役 3年을 宣告받았다. 當時 自由黨 政權의 앞잡이 노릇을 한 동대문파에 對한 反感으로 辯護士 30餘名이 容疑者들에 對한 無料辯論을 自請하였다. 이 事件으로 鳴動派는 沒落했지만, 이기붕 이 利川의 選擧를 뺏으려고 警察을 動員해 罪目을 國會테러와 出馬테러 集會테러 演說테러 等 黃金馬車 襲擊事件과 忠淸로 도끼事件을 利用해 이정재의 利川의 選擧를 빼앗고 權力乙잡지 못하게했다. 오히려 塞翁之馬로 3年 뒤 5·16 쿠데타 가 일어났을 때 東大門派가 잡혀들어가고 그 幹部들은 死刑당한 檢擧旋風을 避할 수 있었다. 以後 監獄에서 나온 이화룡은 犯罪世界를 떠나 映畫産業에 投身하고, 신상현은 1965年 鳴動으로 돌아와 組織을 再建한다. 신상현의 신상사파 는 現代 韓國 마피아 巨物인 김태촌 等의 出身 組織이기도 하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