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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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채
作家 情報
出生 1917年 11月 21日 ( 1917-11-21 )
日帝强占期 朝鮮 慶尙北道 김천군
死亡 1991年 4月 11日 ( 1991-04-11 ) (73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職業 言論人, 出版人, 著述家
學歷 서울大 法大 行政學科 學士
장르 出版, 著述, 評論

최석채 (崔錫采, 1917年 11月 21日 ~ 1991年 4月 11日 )는 大韓民國 言論人 , 出版人 으로 號는 몽향(夢鄕)이다.

生涯 [ 編輯 ]

日本에 留學하여 言論社 記者 等을 지내다가 解放 以後 國內로 돌아와 言論人으로 活動했다. 1948年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에는 警察官이 되어 星州·聞慶·榮州 警察署長 等을 歷任하다가 6·25戰爭 中 釜山에서 일어난 5·26改憲波動 消息을 듣고 辭職書를 提出했다. 1955年 9月 自由黨 政權이 政治行事 때마다 學生들을 動員하는 것을 批判하는 「學徒를 道具로 利用하지 말라」는 社說을 쓴 것이 필화가 되어 拘束되었다. 1955年 9月 3日 최석채는 拘束되면서 "言論人으로서 懲役살이 하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할 말 못하고 報道의 使命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하였으나 30日間의 拘束期間 끝에 1956年 5月 大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으나 會社를 떠나야만 했다.

’ 조선일보 論說委員으로서 1960年 3月 17日子 「護憲救國運動 以外의 다른 方道는 없다」 3.15 不正選擧르 糾彈하는 社說을 썻다. 조선일보 論說委員과 主筆로 在任하는 동안에는 5·16軍事政變 以後 現役軍人들 80餘 名이 最高會議 建物 마당에서 軍事革命 支持 및 민정參與를 促求하는 데모를 하자 ‘요즈음에 와서 中高等學生들의 街頭行列이 每日의 茶飯事처럼 되어있다. 最近 玄關의 出迎에까지 學生들을 利用하고 堵列을 지어 3, 4時間동안이나 貴重한 工夫時間을 虛費시키고 殘暑(殘暑)의 曝陽(曝陽)밑에 서게 한 것을 目擊하였다. 그 玄關(顯官)李 大邱市民과 무슨 큰 因緣이 있고 또 擧市的으로 歡迎하여야할 대단한 國家의 公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數千, 數萬 男女學徒들이 勉學을 집어치워버리고 한 사람 앞에 10丸씩 돈을 내어 手記를 사 가지고 길바닥에 늘어서야 할 아무런 理由를 發見치 못한다.…’라는 內容의 社說 「一部 軍人들의 脫線行動에 警告한다」(1963.3.16.)를 1面 題號 바로 옆에 4號活字로 揭載하고 「非常事態臨時措置法」으로 政治批判이 封鎖되자 12日間(3.17.∼3.28.) 私設없이 新聞을 發行했다. 1971年 12月 「國家保衛法」李 國會에서 날치기 通過되자 이에 對해 支持 報道를 하라는 政府의 壓力에도 不拘하고 主筆職을 辭任하였다. 조선일보 論說委員으로서 1960年 3月 17日子 3·15不正選擧를 糾彈한 社說 「護憲救國運動 以外의 다른 方道는 없다」를 써서 話題를 일으켰고 1964年 4月 新聞編輯人協會 副會長으로서 言論言論倫理委員會法 反對鬪爭委員會 實行委員이 되어 "惡法을 反對하는 論理"를 펼쳤다.

1991年 4月 心臟病으로 自宅에서 逝去한 몽향 최석채는 2000年 5月 國際言論人協會 (IPI)가 創立 50周年을 記念해 選定한 世界言論自由英雄 50人에 選定되어 2004年 11月 故鄕인 김천시와 各界人士들이 基金을 모아 김천시 대항면 김천직地文化公園에 記念碑를 세웠다. [1]

學歷 [ 編輯 ]

  • 1940年 3月 日本 州쿄法律學校[中京法律學校] 修了
  • 1942年 8月 日本 주오大學[中央大學] 法學部 卒業
  • 1977年 2月 慶北大學校 名譽法學博士學位

經歷 [ 編輯 ]

1936年 日本 普通文官試驗에 合格하였다. 1942年 3月 ~ 1945年 8月 東京에서 發行된 雜誌 『호세이[法制]』의 編輯記者 1946年 3月~ 大邱에서 發行된 雜誌 『建國公論』의 編輯部長 1946年 7月 慶北新聞 編輯局 次長 1946年 12月 大邱에서 創刊된 雜誌 『婦女日報』의 編輯局長 1954年 大邱日報 編輯局 副局長 1955年 2月 大邱매일신문사 編輯局長 1955年 5月 大邱매일신문사 主筆 1959年 10月 조선일보 論說委員 (代表 社說: 1960年 3月 17日子 3·15不正選擧를 糾彈한 社說 「護憲救國運動 以外의 다른 方道는 없다」) 1960年 9月 경향신문 編輯局長 1961年 1月 조선일보 編輯局長 1961年 10月 조선일보 論說委員 1965年 조선일보 主筆 1964年 4月 新聞編輯人協會 副會長 1966年 4月 ~ 1971年 1月 新聞編輯人協會 第3代 會長 1972年 4月 文化放送社 會長 1974年 5月 ~ 1980年 7月 문화방송사와 경향신문사가 統合되면서 統合法人 會長

5·16奬學會 理事長 아시아신문재단 韓國委員會 委員長

1981年 4月 ~ 1987年 4月 大邱매일신문사 名譽會長 (定期 칼럼 「몽향칼럼」) 兼 聲曲(省谷)言論文化財團 理事長 1988年 11月 文化放送社 社長


受賞 [ 編輯 ]

  • 逝去 以後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서 本籍地인 金泉市 조마면에 追慕碑를 建立
  • 1952年 花郞武功勳章
  • 1971年 大韓民國 文化藝術賞(言論 部門)
  • 1977年 金冠文化勳章


著書 [ 編輯 ]

  • 《庶民의 港長(抗章)(1956)
  • 《日帝下 名論說집》(1975年)
  • 《韓國의 新聞倫理 等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공저, 1965 )
  • 『속 庶民의 港長』(1990)
  • 逝去 以後 後輩에 依해 生前에 쓴 글을 모은 『知性감民(至誠感民)』 出版
  • 逝去 以後 後輩에 依해 追慕文集 『洛東江 오리알』을 出版하였다. 出版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