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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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오 (崔東旿, 1892年 ~ 1963年 )는 日帝强占期 의 獨立運動家,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政治人이다.

生涯 [ 編輯 ]

1892年 6月22日 平安北道 義州郡 월화면 용운리의 篤實한 天道敎 집안에서 태어났다. 海州 崔氏로 一名 최학원(崔學源), 號는 의산(義山). 當時 義州는 東學農民革命 失敗 後 彈壓이 덜해 3代 敎主 義菴 손병희 가 宣敎에 力點을 둔 地域이다. 日帝强占期에도 敎勢가 維持돼 南쪽의 두 倍 以上 됐고 現在도 北韓 宗敎人 中 天道敎人이 가장 많은 理由이기도 하다. 최동오는 孫秉熙의 直接 指導를 받은 弟子였다. 1903年 東學 에 入道했고 天道敎 中央種學院 高等師範課와 法廷과를 卒業한 後 講道師로 任命돼 義州大敎區의 中堅으로 活動하다 3·1 運動을 主導的으로 이끌었다. 日本警察에 逮捕돼 監獄에 갇혀 있다가 釋放됐다.

日帝의 監視와 抑壓으로 國內 活動이 어려워지자 1919年 10月 天道敎 派遣으로 中國 上海로 亡命했다. 11月 臨時政府 內務部 慘事 및 國內 調査員, 20年 3月 內務部 地方局長으로 昇進해 國內 天道敎勢力과의 連繫를 圖謀했다. 또 上海와 北京에 天道敎 宗理院을 세우고 亡命 온 天道敎人들을 糾合해 統一·團結을 力說하고 民族意識을 鼓吹했다. 이때 나중에 査頓이 되는, 獨立軍 盲腸이자 같은 天道敎人 류동열 과 함께 일했다.

최동오는 창조派 立場에서 統合的이고 權威 있는 새로운 獨立運動機關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東北地方으로 자리를 옮긴다. 최동오는 24年 滿洲地域 獨立運動團體인 正義府(正義府)에서 김동삼·현익철·김이대·김원식 等과 함께 抗日運動을 했다. 25年 初 正義府 傘下 樺成義塾 을 建立해 塾長을 맡았다.

1929年 正義府·新民府·參議府가 不完全하게 統合된 國民府의 外交委員長을, 그 뒤 組織 改編으로 獨立運動事業을 專擔하게 된 朝鮮革命黨 의 國際部長을 맡았다. 최동오는 31年 7月2日 日帝가 朝中 離間策으로 造作한 萬寶山事件 이 일어나자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회(吉林韓僑萬寶山事件討究會)를 組織해 眞相調査와 中國官民과의 交涉을 指揮하기도 했다.

31年 滿洲事變 이 터지고 獨立軍에 對한 日帝의 攻擊이 거세지자 이듬해 11月 管內로 이동한 최동오는 北京과 上海를 中心으로 류동열·현익철·梁起鐸 等과 함께 朝鮮革命黨의 이름으로 活動을 繼續했다. 35年 7月에는 金元鳳·金奎植 等과 左右合作으로 獨立運動團體들을 統合해 民族革命黨을 創黨했으나 애初 大同團結 路線에서 離脫하자 37年 池靑天 等과 함께 朝鮮革命黨을 再建하기도 했다. 以後 右派 中心의 韓國獨立黨 의 常務委員 兼 祕書主任, 39年 11月 臨時의정원 副議長, 43年 臨時政府 法務部長 再任命 等 45年 8月 光復으로 歸國할 때까지 臨時政府 國務委員·臨時의정원 議員·外務委員 等 다양한 職責으로 活動했다.

日帝 敗亡 以後 45年 11月3日 최동오는 金九 · 김규식 等 重慶 臨時政府 要人들과 함께 1陣으로 傷害를 거쳐 金浦飛行場에 到着했다. 美軍政의 푸待接 때문에 個人 資格으로 還國할 수밖에 없었다. 최동오는 解放空間에서도 民族大統合을 바탕으로 한 自主獨立國家 建設에 邁進했다. 46年 2月 非常국민회의 副議長을 맡았고 그해 7月 左右合作委員會의 右側委員으로 活動했다. 12月 過渡立法議院이 構成됐을 때 官選議員으로 뽑혀 副議長에 選出돼 活動했다.

그러나 漸次 美-蘇 冷戰 雰圍氣가 高調되고 美國과 李承晩 勢力이 유엔 監視下 南韓 單獨選擧-單獨政府 樹立을 몰아가자 최동오는 金九·金奎植 等과 함께 48年 4月 歷史的인 南北 諸 政黨 社會團體 連席會議에 參與했다. 이러한 南北協商을 통한 民族統合 努力에도 不拘하고 分列·分斷과 半쪽政府는 旣定事實化했다. 더구나 李承晩 政府의 橫暴로 親日派 淸算마저 挫折되고 이어 6·25 戰爭이 勃發했다. 서울을 占領한 人民軍과 以北의 政治일꾼들은 이른바 ‘모시기 工作’을 통해 金奎植 等 南北協商에 參與한 人士들과 出獄人士들을 北으로 데려가는 作業을 서둘렀다. 臨時政府의 國務委員이요, 南北協商에도 參與한데다가 김일성과의 個人的인 因緣도 남달랐던 최동오 先生은 모시기 公爵의 核心 人物이었다. 大部分의 臨時政府 要因들과는 달리 美軍政에 參與해 통위部長으로 韓國軍 創設의 産婆役을 했던 류동렬 將軍도 對象이었다.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所謂‘모시기 工作’으로 최동오와 류동열은 拉北됐다. 當時 72歲 高齡이던 류동열은 50年 10月 18日 故鄕인 平北 博川과 가까운 희천에서 숨을 거뒀다. 류동열 事後 최동오는 拉北人士들로 構成된 在北平和統一促進會議 幹部로 活動하고 長官級 待遇를 받으며 13年을 더 살다가 63年 9月16日 心臟痲痹로 別世했다. 두 사람은 平壤 西南쪽 신미리의 愛國熱사릉에 安葬됐다. 南쪽에서는 拉北 行跡 때문에 뒤늦게 류동열은 89年 建國訓長 大統領章, 최동오는 90年에 建國訓長 독립장 敍勳을 받았다. 최동오의 아들과 며느리이자 류동열의 사위와 딸인 崔德新 류미영 도 反共反北의 길을 걷다가 1976年 美國으로 亡命하고 86年 自進 越北했다. 두 사람 모두 北쪽의 高位職에서 일하다가 生을 마감했는데, 現在 平壤 신미리 愛國熱사릉 에 묻혀 있다. [2]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