震怖 海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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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怖 海戰
날짜 禑王 6年( 1380年 ) 8月
場所
錦江 어귀
結果 高麗 水軍의 勝利
交戰國
指揮官
나세 (羅世)
심덕부 (沈德符)
최무선 (崔茂宣)
定龍 (鄭龍)
윤송 (尹松)
최칠석 (崔七夕)
손詩랄(孫時剌)†
阿只발도 (阿只?都)
후지 쓰네미쓰(藤經光)
兵力
軍艦 100隻 海賊船 500隻
被害 規模
正確히 알 수 없음 正確히 알 수 없음
韓國史 最初의 艦砲 海戰

震怖 海戰 (鎭浦海戰)은 高麗 末期인 禑王 (禑王) 6年( 1380年 )에 나세 (羅世), 심덕부 (沈德符), 최무선 (崔茂宣) 等이 指揮하는 高麗 水軍이 大韓民國 忠淸南道 (忠淸南道)와 全羅北道 (全羅北道) 사이 錦江 (錦江) 河口인 震怖에 上陸한 倭寇 (倭寇)의 海賊船들을 艦砲 攻擊으로 불사르고 倭寇의 後方 退却路를 끊은 戰鬪이다.

최무선 이 製造한 火藥 이 처음으로 쓰인 戰鬪로써 韓國史 最初의 海上 火藥 武器 使用으로 記錄된다(다만 아시아 에서 最初의 海上 火藥 武器 使用은 崔茂宣보다 200年 前인 1161年 南宋의 長壽 이보가 金나라 艦隊를 相對한 黨도 戰鬪가 最初이다.)

槪要 [ 編輯 ]

高麗 後期인 高宗 (高宗) 10年( 1223年 )부터 朝鮮 初期까지 繼續된 倭寇의 侵入은 特히 高麗 末 約 40年間은 高麗 政府 自體의 存續을 威脅할 程度로 規模나 水準에서 成長해 있었다. 이미 공민왕 (恭愍王) 때에는 1百 回에 걸쳐 韓半島 東海岸에서 西南海로, 나아가 內陸으로까지 侵入이 번져갔고 [1] 高麗 朝廷에서는 海上에서의 보딩(Boarding) 戰術과 창칼을 잡고 휘두르는 短兵接戰에 뛰어난 倭寇의 攻擊에 맞서 제대로 된 對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민왕 6年( 1357年 )에 교동 (喬桐)을 占領해 漕運船을 掠奪하고, 다시 强化 禮成江 , 漢江 下流까지 나타나는 等 開京 附近까지 出沒하는 倭寇 앞에 高麗 調整은 沿岸 섬 地域을 거의 抛棄하다시피 한 狀態였고, 恭愍王 23年( 1374年 )에는 합포 에서 高麗軍이 倭寇에 크게 敗했다. 禑王 때에는 榮山江 (榮山江)과 洛東江 (洛東江) 하구, 京畿 近郊의 漢江 물길까지 倭寇 勢力圈 안에 들어가는 等, 韓半島 海岸線 全域이 倭寇에 거의 包圍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程度였다. [1]

倭寇에 맞서기 위해 高麗 調整은 數軍力을 復舊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倭寇가 本格的으로 出沒하던 무렵부터 海岸에 50곳의 防護所 또는 榮進水素를 두었으며, 恭愍王 代에는 바닷가 住民을 分類해 세 名을 한 戶로 해서 水軍 한 名씩을 내게 하였다. 倭寇 船團이 開京을 威脅하고 다시 蔚山 , 量産 , 密陽 等地를 侵略하던 禑王 3年( 1377年 )에는 해道都統使(海島都統使)로 任命된 崔瑩 (崔瑩)이 各 道에서 僧侶 2千 名과 船長(船匠) 1百 名을 徵發해 大大的으로 軍船을 乾燥하였다. 여기에 崔茂宣의 建議를 받아들여 10月에 火㷁都監 (火筒都監)을 設置하고 火藥과 各種 大砲 및 이를 실을 수 있는 戰艦 改良에 나섰다. [1] 特히 崔茂宣의 火砲 開發은 高麗가 倭寇에 맞서 守勢에서 攻勢로 轉換할 수 있게 해준 轉換點이었다.

展開 [ 編輯 ]

禑王 6年( 1380年 ) 8月, 倭寇들이 탄 배 5百餘 隻이 高麗 西海 楊廣道 (楊廣道)의 震怖 [2] 에 上陸했다. 當時 倭寇의 海賊船들은 큰 밧줄로 배마다 서로 잡아매고 있었고, 震怖로부터 錦江을 따라 上陸한 倭寇들은 隣近 州, 郡 고을로 흩어져 들어가 곳곳에 불을 지르고 掠奪을 벌였다. 《 高麗史 》(高麗史) 및 《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는 이때의 모습에 對해 "屍體가 山과 들에 덮였고 배로 옮기다 땅에 떨어진 쌀만 한 字나 되었다." 라고 記錄하고 있다.

高麗 調整은 해都元帥(上元帥) 羅世, 都元帥 심덕부, 副元帥 최무선에게 軍艦 1百 隻을 주어 倭敵을 追捕할 것을 命했다. 倭寇들의 海賊船에 비해 規模는 1/5밖에 되지 않는 考慮水軍의 軍艦이었지만, 震怖에 到着한 高麗軍은 倭寇가 錦江 어귀에 碇泊시켜 둔 배 5百 隻을 當時 崔茂宣이 開發한 火砲를 써서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배를 지키고 있던 倭寇들은 거의 불에 타 죽었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者들도 많았다고 한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에 실린 정이오의 《火藥庫機》(火藥庫記)는 이때 高麗軍이 軍艦 80隻에 火藥筩과 火砲를 配置하고서 震怖에서 맞아 攻擊해, 海賊船 30隻을 불사르고 怪獸 손시랄을 잡아 죽였다고 적고 있다.

戰鬪 以後 [ 編輯 ]

震怖에 碇泊해 두었던 배가 모조리 불타버리고 公主, 옥주 (沃州)까지 달아난 倭寇는 이산현과 英同縣을 비롯해 韓半島 內陸 깊숙이 全羅道와 慶尙道를 돌며 더욱 殘酷하게 掠奪을 일삼았다. 《高麗史節要》는 이때의 倭寇의 蠢動을 "三道 바닷가 고을의 땅이 텅 비었다. 倭亂이 있고 이같이 慘酷했던 적은 또 없었다."라고 記錄하고 있다. 김사혁 이 公主로 들어간 倭寇를 쫓아 4級을 베고, 다시 林泉(林川)에서 46級을 베는 戰果를 올렸지만, 倭寇는 捕虜로 잡고 있던 高麗 百姓(大部分 어린 아이)을 남김없이 죽였고, 가까스로 334人만이 살아 도망쳐서 高麗軍 楊廣道元帥(楊廣道元帥) 김사혁에게 救助되었다. 그러나 內陸을 돌며 掠奪을 벌이면서 智異山 近處 雲峰(雲峰)까지 集結한 倭寇는 病魔都元帥(兵馬都元帥) 李成桂 (李成桂) 等이 이끄는 高麗軍과의 戰鬪에서 首長 阿只발도 (阿只拔都)가 戰死하는 等의 被害를 입고 潰滅되었고( 黃山大捷 ), 以後 倭寇의 侵略은 크게 줄어들었다.

한便 高麗軍에서 보낸 진무(振武)로부터 震怖 海戰의 勝利 消息을 傳해 들은 禑王은 기뻐하며 消息을 가지고 온 振武에게 은 50兩씩을 주었고, 나세 等이 改善하자 雜戱를 크게 벌여 맞이하고 나세와 심덕부, 崔茂宣 等에게 金 50兩 씩, 脾臟 定龍과 윤송, 최칠석 等에게도 은 50兩 씩을 주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윤명철 《韓國海洋社》學緣文化史, 2008年
  2. 震怖의 位置에 對해서는 錦江 河口라고 하는 데는 學者들의 설이 一致하지만, 正確한 位置를 只今의 群山 앞바다로 볼 것인지 아니면 只今의 忠淸南道 舒川郡으로 볼 것인지에 對해 두 地域의 見解가 서로 나뉜다. 震怖를 群山 앞바다로 보는 說은 《東史綱目》에 震怖를 舒川 南쪽 26里에 있다고 한 것에, 《高麗史》 食貨志에 操縱包에 임피군 진성창이 있다고 한 記錄에 根據를 두고 있다. 진성창은 現在의 군산시 성산면 創案마을에 그 터가 남아 있으며, 舒川郡에는 高麗史 恭愍王 12年(1363年)組에 登場하는 長岩(長岩眞性)의 터가 남아 있다.

關聯 作品 [ 編輯 ]

  • KBS 1TV HD 역사스페셜 》 第43回 '崔茂宣의 震怖 大捷은 世界 最初의 艦砲 海戰이었다' - 2006年 4月 24日子 放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