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진 大捷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다음은 정암진 大捷 에 關한 內容이다.

壬辰年 時 왜는 15萬 8800名의 倭軍을 9군으로 나누어 고니시 柳키나와(小西行長)가 이끄는 1軍(1萬 8700名), 가토 기요마사(加藤?正)가 이끄는 2軍(2萬 800名),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3軍(1萬 1000名)은 突擊部隊로 漢陽을 占領하여 宣祖를 잡고, 나머지 軍은 各 度를 占領하려는 戰略을 가지고 쳐들어왔다. 그 中 高바야價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6軍 1萬 5700名은 全羅道를 占領, 모리 테壘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7軍 3萬名은 慶尙道를 占領하려는 戰略이었다. 고바野歌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왜 제 6軍이 東來에서 함안을 거쳐 南江을 건너 宜寧을 지나 六十嶺을 넘어 全羅道를 占領할 計劃이었다. 이 戰略에 따라 왜 제 1, 2, 3軍 突擊部隊가 北上한 後, 왜 제 6軍 1萬 5700名이 釜山 東來에서 함안을 거쳐 湖南으로 進出하기 위해서 壬辰年 7月 정암진 나루에 到着했다. (그 以前 壬辰年 6月 嶺南道銃義兵大將 耐菴 鄭仁弘이 이끄는 義兵과 倭軍과의 洛東江 防禦戰이 있었다.) 郭再祐는 이 정암진 附近의 南崗의 地形地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郭再祐가 過去 合格이 取消된 後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낚시하며 歲月을 보내던 바로 그 南江 地域이다. 郭再祐는 이때 정암진 언덕에 兵士들을 埋伏시킨 뒤 날랜 兵士 몇名을 選拔, 南江을 건너는 倭軍을 늪地帶로 誘引한 다음 화살攻擊으로 전멸시켰다. 倭軍 偵察隊는 정암진 一帶가 늪지이기 때문에 部隊의 通行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通過할 수 있는 地點 近處에 나무 標示 等 표식을 만들었다. 郭再祐는 倭軍 偵察隊의 行動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表紙목을 늪지로 옮겨 꽂고, 表式들을 늪지로 向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음날 倭軍이 잘못 標示된 表紙목과 表式들을 따라가다 늪지에 빠지자 郭再祐는 언덕에 숨어있던 兵士들에게 攻擊令을 내려, 奇襲 攻擊을 加해 倭軍을 沒殺시켰다. 官軍이 整備되지 못했던 壬辰倭亂 初期 이 정암진 大捷으로 왜 6軍의 全羅道 進擊을 막아 全羅道를 保全하는 것이 壬辰倭亂 勝利의 端初가 된다. 壬辰倭亂 時 結局 倭軍은 全羅道를 占領하지 못했고 이로 因해 李舜臣 將軍의 全羅 左水營 等이 陸地로부터의 倭軍의 攻擊없이 自由롭게 活躍할 수 있었다. 壬辰倭亂 初期 바로 이 정암진 大捷 勝利가 連鎖的으로 李舜臣 將軍 活躍을 可能케 한 것이다. 이 정암진 大捷이 바로 郭再祐가 壬辰倭亂에서 나라를 救한 決定的 貢獻이다. 壬辰倭亂時 穀倉地帶인 全羅道를 防禦함으로써 왜 突擊部隊의 補給線이 南海를 돌아 西海로 올라가는 해로와 慶尙道 內陸 洛東江을 通한 兵站線 두 가지만 남게 되고, 이 中 해로는 李舜臣 將軍의 依해 遮斷되고, 洛東江 兵站線은 郭再祐, 정인홍, 성천희, 김면, 변연수 等 嶺南 義兵들에 依해 遮斷되어, 北上한 倭軍들의 世가 弱해지고 結局 再整備된 官軍과 名君의 攻擊을 못 견디고 後退하게 된다. 그리하여, 丁酉再亂市에는 왜는 壬辰年 敗因을 全羅道 陷落 失敗로 보고 全羅道를 통해 北上하는데 總攻勢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