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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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규
出生 1583年
京畿道 城南
死亡 1661年
死因 兵士
性別 男性
職業 吏曹判書,大司憲,忠淸監査
父母 정율

정세규 (鄭世規, 1583年 ~ 1661年 )은 朝鮮 後期의 文身이다. 本貫은 東萊 이고, 者는 洞里이다.

生涯 [ 編輯 ]

1613年 司馬試에 合格하고, 門蔭으로, 義禁府史를 거쳐 和順縣令,安山郡守等을 지냈으며, 1636年 에는, 忠淸感謝로 特進하였다.

丙子胡亂 [ 編輯 ]

이듬해 겨울, 淸軍이 侵攻하여, 丙子胡亂 이 터지자, 南漢山城 에 孤立된, 仁祖를 救援하기 위해, 8000名의 勤王軍을 組織해, 龍仁 의 험천까지 進出하는데 成功하나, 靑軍의 奇襲攻擊을 받고 大敗하였으나, 忠誠心을 認定받아, 敗軍의 罪를 免罪받았다.

胡亂 後 [ 編輯 ]

司憲府에서, 門蔭出身人 정세규가 特別한 靜寂이 없으므로 六境이 될 수 없다고, 剛하게 反對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세규는 以後 刑曹判書,全州府尹,大司憲 等을 지내었고, 吏曹判書에 이르렀다. 1654年 에는, 江華有數가 되어, 昇天,燕尾,甲串,광성 等에 陣을 設置하기도 하였다. 以後 1661年 老化로 死亡하였으며, 諡號는 敬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