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震
(
1923年
7月 6日
~
2012年
4月 29日
)은
大韓民國
의
非轉向 長期囚
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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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全羅北道
沃溝郡
에 있는 가난한 農家에서 태어났으며
[1]
,
日帝强占期
에 家庭 形便이 어려워 學校는 全혀 다니지 못했다.
軍政期
부터
左翼
運動에 投身하고
조선로동당
에도 入黨하였다.
1950年
에
韓國 戰爭
이 勃發하여
朝鮮人民軍
이 群山 地域을 占領했을 때 이를 支持하였다. 後에 發表한 手記 <首領님 주신 땅이 내 信念의 土壤이였다>를 보면,
小作人
이던 前震은
朝鮮人民軍
晉州 後
土地改革
이 實施되어
땅
을 無償으로 받고 나서 感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政治에 同調하였다.
朝鮮人民軍이 後退하게 되자
朝鮮人民遊擊隊
에 入隊하여 遊擊隊 中隊長으로 參戰하였다. 全羅北道
任實郡
을 中心으로
백련산
과
성수산
一帶에서 遊擊 活動을 벌이던 中,
1951年
11月에 戰鬪를 벌이다가 重傷을 입고 백련산 洞窟에 隱身했다가 逮捕되었다.
裁判에서는 懲役 20年刑을 宣告받았다. 그러나 收監 期間 中 轉向을 拒否하여 非轉向 長期囚가 되면서,
大田矯導所
와 淸州保安監護所에서 約 38年間 收監 生活을 하였다. 戰爭 前에 婚姻한 아내와 딸이 있었지만, 收監 期間 中 어린 딸은 病으로 죽었고 아내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1989年
에 出獄하였으나 父母와 兄弟들이 이미 죽어서
仁川
에 所在한 한 工場에서
勞動者
로서 일하면서 혼자 살았다.
2000年
6·15 南北 共同宣言
에 依據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送還되었다. 送還 後 婚姻하여 家庭을 꾸렸고
祖國統一上
을 받고 "원쑤들의 모든 惡刑과 懷柔 속에서도 黨과 首領에게 다진 盟誓를 지켜 끝까지 싸운" 信念과 意志의 强者로 내세워졌다.
2004年
에는 前進의 삶을 素材로 한 小說 《내 땅》李 創作되었다.
[2]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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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主席께서 주신 땅은 信念의 土壤이였다 - 非轉向長期囚 前進의 글”. 朝鮮中央通信. 2002年 3月 20日.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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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