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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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장진홍 (張鎭弘, 1895年 6月 6日 ~ 1930年 6月 30日 ( 陰曆 6月 5日 ))은 大韓民國 의 獨立運動家로, 1927年 朝鮮銀行 大邱支店 爆破 事件 을 主導했다. 雅號는 窓餘(滄旅)이다.

生涯 [ 編輯 ]

慶尙北道 漆谷 出生이다. 一齊 大韓帝國 의 軍隊를 解散하면서 皇室 警護 名目으로 남겨놓은 朝鮮步兵隊 에서 服務했고, 1916年 朝鮮步兵隊에서 除隊한 뒤 動向 先輩인 이내성 의 紹介로 祕密 結社인 光復團 에 加入하여 獨立 運動에 뛰어들었다.

1918年 滿洲 로 亡命했다가 이국필 과 함께 러시아 地域으로 移動하여 獨立軍 部隊의 軍事 訓鍊을 試圖한 바 있으며, 1919年 3·1 運動 때는 家産을 팔아 全國을 다니면서 日帝의 3·1 運動 彈壓 過程을 調査, 記錄한 뒤 美軍 으로 服務 中인 김상철 에게 傳達하여 飜譯本을 配布해 달라고 付託하는 等 效果的인 獨立 運動을 위해 努力하였고, 3·1 運動 以後 國內의 獨立 運動이 萎縮되자 별다른 活動을 하지 못하고 있던 中, 光復團 同志인 이내성 의 紹介로 專門家에게 爆彈 製造法을 배우게 된 것이 朝鮮銀行 大邱支店 爆彈 投擲 事件을 일으키는 契機가 되었다. 爆彈을 直接 製造할 수 있게 된 장진홍은 慶尙北道 道知事와 慶尙北道 鏡察部, 朝鮮銀行 大邱支店(只今의 하나銀行 大邱企業金融센터支店 자리), 朝鮮殖産銀行 大邱支店 等의 目標物을 定해 單獨 擧事를 計劃했다.

1927年 10月 16日 칠곡의 집에서 爆彈을 製造하여 大邱까지 運搬한 뒤, 이를 膳物 箱子로 僞裝한 채 심부름꾼을 시켜 朝鮮銀行 大邱地點에 傳達했다. 銀行員이 눈치를 채고 警察을 부르면서 바깥에 옮겨둔 爆彈 箱子가 暴發하여 警察 4名을 包含한 6名이 負傷을 입었고, 장진홍은 無事히 달아났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親戚인 장용희 에게 安東 의 主要 施設을 爆破할 수 있도록 爆彈을 製造하여 傳達했으며, 親舊 김사실 과 함께 永川 에서의 擧事를 위한 爆彈도 製造했다. 이 두番의 後續 爆彈 테러 計劃은 實行에 옮기支持 않아 未遂에 그쳤다.

警察의 搜査網이 漸漸 조여오자 日本 으로 避身하여 오사카 의 동생 집에 隱身해 있다가 최석현 等을 앞세운 日警의 끈질긴 追跡 끝에 1929年 逮捕되었다. 이듬해 死刑 宣告를 받았고, 最終審에서도 死刑이 確定된 뒤 大邱 刑務所 에서 自決했다.

1962年 建國訓長 國民腸이 追敍되었다. 慶北 龜尾 에 銅像이 세워져 있다 [1] .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龜尾市 양포동 洞事務所, 양포동 人物 - 장진홍 先生 Archived 2007年 9月 27日 - 웨이백 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