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모 不可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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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모 不可렐리
個人 情報
本名 Giacomo Bulgarelli
出生日 1940年 10月 24日 ( 1940-10-24 )
出生地 이탈리아 볼로냐
死亡日 2009年 2月 12日 ( 2009-02-12 ) (68歲)
포지션 미드필더
球團 情報
등番號 4番
球團 記錄*
鳶島 球團 出戰 ( 得點 )
1959-1975
1975
볼로냐 FC 1909
코네티컷 바이센테니얼스
391 (43)
2 (0)
國家代表팀 記錄
1962-1967 이탈리아 29 (7)
* 球團의 出戰回數와 得點記錄은 正規 리그의 公式 리그 競技 記錄만 集計函.

자코모 不可렐리 ( 이탈리아語 : Giacomo Bulgarelli , 1940年 10月 24日 ~ 2009年 2月 12日)는 이탈리아의 蹴球 選手이다. 포지션은 미드필더 였으며 볼로냐 FC 1909 원클럽맨으로 그곳에서 無慮 16年 동안 選手 生活을 했다. 1962年 FIFA 월드컵 1966年 FIFA 월드컵 이탈리아 蹴球 國家代表팀 의 一員으로 出戰한 바 있다. 位置 選定 能力이 卓越했고 視野가 넓었으며 蹴球 知能이 매우 뛰어난 選手로 有名했다.

選手 經歷 [ 編輯 ]

클럽 經歷 [ 編輯 ]

不可렐리는 1959年에 볼로냐 FC 1909 에 入團한 以後 無慮 16年 동안 그곳에서만 選手 生活을 한 眞正한 원클럽맨이었다. 1959年부터 1975年까지 16年 동안 볼로냐 FC 所屬으로 無慮 391競技에 出場해 43골을 넣었다. 選手로서는 黃昏期인 35歲 때 볼로냐를 떠나 美國으로 가서 選手 生活의 막바지를 보냈는데 單 2競技만 出戰했기에 事實上 볼로냐 FC 한 곳에서만 모든 選手 生活을 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1960年代 볼로냐 FC 1909 의 中興期를 이끈 人物 中 하나였다.

國家代表팀 經歷 [ 編輯 ]

不可렐리의 國家代表팀 經歷은 그리 좋은 便은 아니다. 1960年 로마 夏季 올림픽 에서 3競技에 出戰했던 그는 1962年 FIFA 월드컵 이탈리아 蹴球 國家代表팀 의 一員으로 出戰하였다. 當時 이탈리아는 西獨 , 칠레 , 스위스 와 함께 2條에 屬했다. 1次戰에서 西獨과 0 : 0으로 비긴 이탈리아는 2次戰에서 개최국 칠레와 最惡의 싸움판 競技를 벌인 끝에 0 : 2로 敗해 脫落 危機에 놓였다. 마지막 스위스와의 競技에서 不可렐리는 2골을 터뜨리는 猛活躍을 하며 3 : 0 大勝을 거두었으나 1勝 1無 1敗에 그치며 2勝 1無를 記錄한 西獨과 2勝 1敗를 記錄한 칠레에 밀리며 結局 組別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의 첫 番째 월드컵은 초라하게 幕을 내렸다.

그리고 4年 後 不可렐리는 이탈리아 蹴球 國家代表팀의 主張이 되어 1966年 FIFA 월드컵 에 出戰했다. 이 때 이탈리아는 蘇聯 , 칠레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 함께 4條에 屬했다. 1次戰 칠레와의 리턴매치에서 이탈리아는 산드로 마촐라 , 파올로 바리손 의 골로 2 : 0 勝利를 거두며 4年 前 敗北를 雪辱하는데 成功했다. 그러나 蘇聯과의 2次戰에서 0 : 1로 敗北하며 다시 또 흔들리기 始作했다. 그리고 3次戰 相對는 바로 아시아의 處女 出戰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當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大會 最弱體로 豫想되었기에 이탈리아가 壓勝을 거둘 것이란 豫測이 支配的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始終一貫 優勢한 競技를 펼치고도 좀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골문을 열지 못하며 苦戰했다.

그리고 前半 34分, 자코모 不可렐리 本人은 逆襲을 展開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라이트 하프 박승진 을 向해 태클을 걸었는데 그만 박승진이 空中으로 떴다가 不可렐리 本人의 다리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큰 負傷을 當하고 말았다. 結局 不可렐리는 負傷으로 아웃되었고 이탈리아는 10名이 뛰어야 하는 狀況이 되고 말았다. [1] 主張 不可렐리가 빠진 이탈리아는 中心을 잃고 右往左往하는 모습을 보였고 끝내 前半 42分, 박두익 에게 決勝골을 許容하며 아시아의 處女 出戰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0 : 1로 敗北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는 2個 大會 連續으로 組別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의 두 番째 월드컵도 이렇게 초라하게 幕을 내렸고 不可렐리 本人도 1年 後 國家代表팀에서 隱退했다. 이탈리아에서 開催된 UEFA 유로 1968 에 參加한 이탈리아 代表팀 名單에도 包含되었지만 大會 出戰 記錄은 없었다.

플레이 스타일 [ 編輯 ]

不可렐리는 미드필더의 完全體로 불렸던 選手였다. 卓越한 位置 選定과 優秀한 볼 키핑 能力과 넓은 視野를 바탕으로 한 볼 配給 能力이 一品인 選手여서 플레이메이커로 定評이 나 있었다. 그리고 몸 싸움도 잘 하는 便이어서 相對 選手를 壓迫하는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근면함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長點은 起伏이 없었다는 것이다. 每 競技마다 起伏 없이 꾸준한 技倆을 維持하는 選手이기에 監督 立場에선 宏壯히 魅力的인 選手였다. 리더십도 대단히 뛰어난 選手로 所屬팀인 볼로냐에서도 또 國家代表팀에서도 主張을 맡았던 選手였다. 이탈리아의 名匠 파비오 카펠로 는 불가렐리를 "이탈리아 歷史上 가장 偉大한 미드필더"로 描寫했고 現在 세리에 A 에서도 最高의 미드필더들에게 그의 이름을 딴 불가렐리상을 授與하고 있다.

各州 [ 編輯 ]

  1. 1966年 FIFA 월드컵 까지는 選手 交替 制度가 없어서 11名 選手가 모두 풀타임을 消化해야 했고 負傷을 當해 뛰지 못하게 되면 부상당한 選手가 빠진 채로 競技를 해야 했다. 이 때문에 펠레 도 負傷으로 뛰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結局 브라질 이 탈락하자 이에 反撥하였고 一時的으로 隱退를 宣言하면서 選手 保護 制度를 만들어 달라고 FIFA 에 强力히 要請하였고, FIFA도 펠레의 要請을 받아들임으로써 1970年 FIFA 월드컵 때부터 카드 制度와 選手 交替 制度가 생겼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