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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源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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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源外交 는 國內 消費量이 一定 水準에 이른 資源에 對하여 國內 業體가 直接開發에 參與함으로써 資源의 安定的 供給에 寄與하게 하는 等의 目的을 達成하기 위하여 國家가 外交力을 動員하는 것을 말한다. [1]

世界의 資源外交 [ 編輯 ]

大韓民國의 資源外交 [ 編輯 ]

1970年代 朴正熙 政府 가 輸出 振興을 위해 資源保有國과 技術協力 政策 輸出·입 合作事業 等을 통해 資源開發 活動을 하게 되면서 本格的인 國家 次元의 資源外交가 登場하게 되었다. [2] 以後 에너지ㆍ自願 消費量의 96%를 海外輸入에 依存하고 石油의 輸入의 82%가 中東地域에 偏重되어 있는 等 脆弱한 에너지 安保上의 問題點을 克服하고 産業ㆍ經濟의 持續的인 成長을 위해 必須的인 石油, 가스, 稀土類 等 資源의 安定的인 確保와 供給線 多邊化 그리고 自主開發率 提高를 目標로 아프리카ㆍ中南美ㆍ유라시아 地域 等 資源富國과의 友好協力關係 增進, 海外 資源開發事業 支援, 에너지 市場 安定化 및 新再生에너지 協力에 積極 參與하고 있다. [3]

1990年代 [ 編輯 ]

  • 産油國과의 原油導入의 長期契約比率을 45%에서 60% [4]
  • 칠레 로스 펠람브레스 東鑛山 合作開發推進 [5]
  • 韓國과 캐나다 에너지鑛物資源協議會 設置 [6]

2000年代 [ 編輯 ]

盧武鉉 政權 末期인 2006年5月11日 아제르바이젠 巡訪을 契機로 以南(inam)鑛區 開發mou 締結을 始作으로 中東中心으로 아프리카,러시아等 17個國 未開拓地帶에 對한 交涉을 實施하여 石油,가스燈의 自主開發율및 確保量이 늘어났고 鐵鑛石,有煙炭等의 鑛物資源도 確保量이 增加趨勢에 이르렀다. 全般的으로 單純持分參與 中心의 油田開發에서 벗어나 技術,經驗을 바탕으로 運營權을 確保한 事業場數가 크게 增加했다. [7] 盧武鉉 政權 末期인 2006年 政府가 發表한 海外資源開發 投資實績에 따르면 海外資源投資開發額은 21億달러로 IMF 外換危機 以後 海外資源開發 投資額이 4億6,000萬달러까지 減少했던 狀況에서 크게 늘어났다. [8]

李明博 은 2007年 서울外信記者클럽 懇談會에서 自身의 外交·統一 政策 構想을 發表하면서 安定的인 資源 確保를 위한 '에너지 실크로드' 構築을 밝혔는데 [9] 이는 大統領에 當選된 直後 李明博 政府 에서 資源外交에 있어 '資源開發 持株會社'를 통한 大型化 方針으로 本格化되었고 앞으로 이 會社의 民營化 問題, 資源開發의 主導權을 民間에 넘겨야 할지 與否가 論難 [10] 이 있은 가운데, 中東과 아프리카 等 未開拓地域에서 國家頂上級 資源外交를 推進하면서 石油의 自主開發率이 大幅 上昇하는 成果를 얻기도 했지만 2013年 監査院 監査 結果“政府가 形式的으로만 自主開發率을 높이는 데 置重했으며, 정작 非常時에 國內로 들여올 수 있는 自願 物量을 確保하는 데는 失敗했다”는 것이 드러나고 [11] 海外資源開發 事業 推進 過程에서‘만사형통(萬事兄通·대통령 兄을 통해야만 일이 된다)’이라는 指摘을 받은 이상득 前 議員을 비롯해 ‘王次官’으로 불린 박영준 前 知識經濟部 次官, 곽승준 高麗大 敎授 等 政權 實勢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雜音이 나오고 國會 에 依하여 非理 連累疑惑이 提起되자 MB 系인 權性東 새누리黨 議員은 "海外資源開發政策이 基本的으로 노무현 政府 에서 國家的 아젠다였고 이를 李明博 政府 에서 繼承해서 國政課題로 이뤄졌다"고 하면서 監査院 이 資源開發 投資의 90%는 "李明博 政府 때 强行됐다"고 指摘한 데 對해선 "우리 海外資源開發을 主導하는 石油公社 等 公企業의 力量이 不足하다는 部分, 또 産業部의 海外資源開發에 對한 戰略이 不足하지 않았느냐"며 自願 3社의 力量 不足 탓을 했다. [12]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