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마립간
(慈悲麻立干, ?
[1]
~
479年
3月 12日
(
陰曆 2月 3日
), 在位
458年
陰曆 8月
~
479年
3月 12日
)은
新羅
의 第20代 임금이다.
눌지 麻立干
의 맏아들이며,
失性 尼斯今
의 外孫子이다. 王妃 金氏는
舒弗邯
미사흔
의 딸로, 在位 4年째인
461年
陰曆 2月
에 夫人으로 맞았다.
459年
陰曆 4月
왜
人들이 兵船 百餘 隻으로 襲擊하고
月城
을 에워쌌다. 新羅軍은 麻立干의 指揮에 따라 城에서 지키다가 敵이 退却하는 것을 기다려 追擊, 바다 어귀로 몰아 물에 빠져 죽게 한 敵兵이 折半이 넘었다.
462年
陰曆 5月 다시 倭가 쳐들어와 활개城을 占領하고 百姓 1千餘를 生捕했다. 이듬해인
463年
陰曆 2月 또다시 쳐들어와 삽兩性을 攻擊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麻立干이 벌지와 덕지에게 明解 埋伏해 있다가 後退하는 倭兵을 邀擊, 크게 이겼다. 이 해 왜의 侵入을 沮止하기 위해 變更에 두 個의 城을 쌓고 陰曆 7月에 君을 査閱하였으며,
467年
에는
戰艦
을 受理했다.
468年
봄,
高句麗
와
말갈
이 失職을 襲擊하였다. 理解 陰曆 9月
하슬라
住民中 15歲 以上 되는 者들을 徵集해 以下에 城을 쌓았다. 麻立干은 以後 防衛體系 確立에 主力,
469年
陰曆 4月의 水害 復舊를 위해 陰曆 7月에 新羅 全域을 巡幸했으며,
470年
三年山城
을,
471年
모로性
을 쌓고,
473年
명활성을 受理했으며,
474年
일모, 斜視, 鑛石, 답달, 求禮, 좌라 等의 城을 쌓았다.
475年
陰曆 1月
에
명활성
으로 居處를 옮겻다.
[1]
그後 12年間 명활성은 王의 居處로 使用됐다.
475年
陰曆 9月
高句麗 長壽王
이
百濟
를 치자,
개로왕
이 太子
문주
를 보내 救援을 要請하니 麻立干이 백제에 援軍을 보냈으나, 新羅軍이 채 到着하기도 前에 백제가 무너지고 蓋鹵王은 이미 殺害되어 있었다. 이 事件은
新羅本紀
에는
474年
으로 記錄되어 있으나,
高句麗本紀
나
백제본기
에는 모두 475年으로 記錄되어 있어 新羅本紀의 記錄이 잘못된 것으로 看做된다.
476年
陰曆 6月 倭가 東쪽을 侵犯하자, 麻立干이 덕지에게 明解 擊退하게 하여 2百餘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477年
陰曆 5月에 또다시 크게 君을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 왔으나 所得 없이 돌아갔다.
家計
[
編輯
]
- 父王 :
눌지 麻立干
(訥祗 麻立干)
- 母后 : 아로夫人 金氏(阿孝夫人 金氏)
- 王后 :
復戶
의 딸,
미사흔
의 딸
같이 보기
[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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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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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 三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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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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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在不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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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尊된 王의 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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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은 글씨
: 被葬者가 明確하게 認定받는 王陵
- *
: 被葬者가 異說 없이 確實하게 認定받는 王陵
- 기울기
: 被葬者가 明確하다는 見解가 있는 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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