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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성 (165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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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성( 1659年 ~ 1722年 )은 朝鮮 後期의 文臣으로, 肅宗 때 判書를 지냈다. 송시열 의 文人이며, 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 와 老論 一波였다. 本貫은 우봉이며, 字는 邪推, 號는 귀락당이다. 아버지는 右議政을 지낸 이숙 이고, 어머니는 大司成을 지낸 오백령 의 딸이다.

生涯 [ 編輯 ]

肅宗 때 文科에 及第하여 1697年에 地平이 되고 正言을 거쳐서 다시 地平과 正言을 하다가 1700年에 吏曹正郞이 되었다. 以後 副修撰, 副校理를 거쳐 1701年에는 吏曹佐郞을 하다가 兼文學을 거쳐 副校理, 敎理를 했는데 이 當時 老論 一波로써 張禧嬪의 賜死를 奏請했다. 以後 副應敎, 敎理, 사간, 兼補德을 거쳐서 連이어 敎理, 집의, 副應敎, 侍講官을 하다가 다시 兼補德이 되고 곧 敎理를 거쳐서 應敎가 되었다. 以後 兼弼善, 敎理, 普德, 侍講官, 侍讀官을 두루 했고 연이어 다시 敎理, 侍讀官, 執義를 하면서 老論의 中心人物로 成長해 나간다. 연이어서 다시 敎理, 侍讀官, 普德, 執義를 다시 하다가 1705年에 承旨 가 되며 堂上官이 되었다. 以後 大司成 吏曹參議 를 거쳐서 다시 右副承旨 가 되었으며 以後 大司成 , 大司憲 , 都承旨 , 同知義禁府事 를 거쳐서 以後 다시 大司成 을 하다가 漢城府 右尹 으로 昇進한다. 이로써 宰相의 班列에 오른 것이다. 1709年에 大司成 을 거쳐서 1710年에는 吏曹參判 으로 昇進, 以後 1711年에는 忠淸道巡撫使로 外職에 나가서 민정을 다스렸으며 以後 吏曹參判 大司諫 , 大司憲 을 하다가 다시 吏曹參判 , 刑曹參判 을 거쳐서 1712年에 다시 同知義禁府事 를 지내고 곧 다시 吏曹參判 이 되었다. 以後 同知經筵事를 겸하고, 곧 都承旨 를 하다가 다시 吏曹參判 이 되었다. 以後 大司成 , 副提學 , 吏曹參判 을 하다가 곧 다시 都承旨 가 되었다. 以後 京畿道觀察使로 外職에 나갔다가 1716年, 病身處分 以後에는 刑曹判書 에 올라서 政經의 班列에 오른다. [1] 以後 老論의 核心人物로 活躍했으며 以後 吏曹判書 , 禮曹判書 를 거쳐서 工曹判書 , 兵曹判書 를 하게 된다. 以後 同知經筵事를 다시 겸하다가 警鐘 卽位 後 兵曹判書 가 되었고 以後 漢城府判尹 刑曹判書 , 兵曹判書 를 하면서 右副賓客을 겸한다. 以後 知義禁府事 吏曹判書 를 거쳐서 다시 兵曹判書 가 되지만 1721年에 辛壬士禍로 逐出되고 流配된 뒤 流配地에서 죽는다. 英祖 卽位 後 身元된다.

오백령, 오시수 家門과의 關係 [ 編輯 ]

귀락당 이만성은 어머니가 묵재 오백령 의 딸인데, 묵재 오백령 은 이만성의 外할아버지가 된다. 그런데 오백령 의 曾孫子가 男인 淸南의 核心人物이자 右議政까지 지내다가 庚申換局으로 賜死된 수촌 오시수 인데 그와도 家族關係로 얽혀져 있다.

各州 [ 編輯 ]

  1. 病身處分 1年 後에 領議政에 김창집 , 左議政에 이이명 , 右議政에 권상하 가 오르고 吏曹判書에 송상기 가, 禮曹判書에 이만성 이, 刑曹判書에 민진원 이 올랐고 戶曹判書 권상유 , 兵曹判書 이건명 , 工曹判書 조태채 는 留任되었다. 名實相符한 老論 政權이 誕生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