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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麗末鮮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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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李蘭, 1357年 ~ 1428年 8月 5日 )은 高麗 末期의 武臣이자 朝鮮 初期의 武臣, 軍人이자 王族이다. 本貫은 全州 이고, 者는 白兄(伯馨), 號는 청헌(淸軒), 諡號는 文章(文莊)이다. 朝鮮 太祖 李成桂의 異服兄이자 四寸兄인 靈性軍(永城君) 이천계 (李天桂)의 아들이며, 이천계는 桓祖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큰아버지 완창대군 (完昌大君) 利子興(李子興)의 養子로 入籍되었다. 따라서 이란은 太祖 李成桂의 糖質(堂姪, 五寸조카)李 된다. 事後 아들 移徙철 의 出世로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에 追贈되었다가 다시 高宗 때 가서 密陽郡에 追封되었다. 圃隱 정몽주 , 三峯 정도전 의 文人이다.

生涯 [ 編輯 ]

靈性軍(永城君)에 追封된 이천계 (李天桂)의 長男이다. 高麗 末 圃隱 정몽주 , 三峯 정도전 의 門下에서 性理學 을 受學하고 1377年 (高麗 禑王 2) 別試에 及第하여 한週(翰注)를 지냈다. 1392年 7月 朝鮮 開國 後 個國 原從功臣 에 收錄되었다.

1400年 (正宗 2年) 第2次 王子의 亂 當時 友軍 將軍(右軍將軍)으로 在職하며 회안대군 방간의 便에 加擔했다가 敗北하고 그해 2月 流配刑을 받았다. 그러나 朝鮮 太宗 卽位 後 復權되어 소윤(小尹)을 歷任하였다. 1412年 3月 에는 大護軍(大護軍)李 되어 辭職(司直) 조복초(趙復初) 等과 함께 漢城 정선방(貞善坊)의 돌다리 工事를 監督하였다. 그러나 다리가 무너지자 司憲府 로부터 勤務怠慢, 監督怠慢의 理由를 들어 만들 때에 堅固하게 하지 못하여 무너지게 만든 罪를 請하였으나 太宗 이 이를 撫摩시켰다.

1413年 에는 권희달(權希達)李 巨加를 해주(海州)로 護送했을 때, 술을 마시고 上護軍(上護軍) 王인(王隣), 皇上(黃象) 等과 함께 是非가 붙어서 毆打事件이 벌어져 物議를 빚기도 했다. 1415年 에는 朝鮮 太祖 의 氣神을 전후해서 剝去非 의 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고 妓生을 데려다가 놀았다가 司憲府 에 發覺되어 彈劾을 當했다. 司憲府는 權溥(權堡)와 이난(李蘭)·김서(金敍)·이맹유(李孟?)를 義禁府에 내려서 율(律)에 따라 論罪(論罪)하게 하였다. 權溥 等은 太祖의 氣神(忌晨)에 剝去非(朴去非)의 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며 妓生을 불러 風樂을 베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일이 發覺되어 糾彈했던 것이다. 그러나 太宗은 功臣의 子弟라고 論하지 않게 했다. 以後 그의 科田 은 빼앗겼다가 1417年 5月 에 還給되었다.

以後 內禁衛 僉節制使(內禁衛僉節制使)가 되었다가 1424年 (世宗 6年) 8月 에는 世宗大王 에게 밭 1結을 膳物로 下賜받았다. 1428年 2月 左軍 同志冢弟(左軍同知摠制), 輔國崇祿大夫 吏曹判書 를 거쳐 同志冢弟(同知摠制) 全羅道 處置社(全羅道處置使)로 赴任하였다. 1428年 8月 5日 任地에서 死亡하였다. 事後 아들 移徙철 의 出世로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에 贈職되었다. 1872年(高宗 9) 壬申年에 密陽郡에 追封되고 領宗正卿에 追贈되었다. 事後 京畿道 金陵(金陵) 計座(癸坐)에 安葬되고, 勢德社(世德祠)에 配享되었다. 夫人은 貞敬夫人 增 夫婦인 파평尹氏로 提學 尹社友(尹師愚)의 딸이고, 같은 언덕에 따로 安葬되었다.

家計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