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승 (187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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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李基升, 日本式 이름: 山村基升 야마무라 基쇼 , 1872年 5月 30日 ~ 1953年 1月 2日 )은 日帝强占期 忠淸南道 地域 維持이며 資本家이다.

生涯 [ 編輯 ]

忠南 瑞山 의 名望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韓日 倂合 條約 締結 前까지 商業에 從事했던 人物이었다. 1906年 日本 에 産業 視察을 다녀온 뒤, 이 經驗을 바탕으로 1908年 瑞山郡 태안면(現 泰安郡 )에 花林農場을 設立해 農事 改良과 造林 事業에 注力했다. 敎育에도 關心을 보여 泰安初等學校의 前身인 華陽義塾을 세우기도 했다.

韓日 倂合 後에는 湖南銀行 의 監査役과 取締役에 올랐고, 泰安地方金融組合 組合長, 泰安消防組合 副組合長, 泰安衛生組合 副組合長을 맡는 等 이 地域의 有志로 活動했다. 泰安에서 果樹, 菜蔬, 苗木을 栽培하고 養蠶도 實施해 絹織物을 生産하여 各種 品評會와 博覽會에서 많은 褒賞을 받았다. 朝鮮總督府 로부터도 여러次例 表彰과 賞을 받았고, 1915年 에는 日本 政府가 주는 다이쇼記念大禮長도 받았다.

1921年 에는 朝鮮總督府 産業調査委員會 委員에 任命되었는데, 이를 契機로 産業 分野 뿐 아니라 公職에도 進出하게 되었다. 朝鮮總督府는 植民地 經濟支配 體制의 方向을 提示하기 위해 設立한 産業調査委員會에 朝鮮人 委員 10名이 包含시켰고, 包含된 이들은 모두 大資本家나 大地主였다. 以後 忠南 水産會長, 忠南 農會 副會長과 特別委員을 지냈으며, 1928年 1929年 日本 皇室의 宴會에 거듭 招待되는 等 影響力을 認定 받았다. 特히 1929年 도쿄 에서 열린 國花御筵에는 朝鮮人 民間人으로서는 唯一하게 招請을 받았다.

1930年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에 任命되어 1936年 까지 在職했다. 中樞院 參議로 있으면서 書面으로 提出한 中樞院 會議 答申書를 통해 總督 政治를 讚揚하였고, 文盲率이 높고 敎育 程度가 낮은 朝鮮에서 畫廊도 와 같은 固有 宗敎는 迷信에 빠질 憂慮가 많다는 意見을 낸 바 있다. 1935年 朝鮮總督府가 總督府의 朝鮮 統治를 도운 功勞者 353名을 뽑아 펴낸 《朝鮮功勞者명감》 [1] 에는 "時勢를 잘 把握하여 그 推移를 잘 順應하여 우리 朝鮮統治에 關해서 그 方向을 잘 아는" 人物인 것으로 評이 실려 있다.

光復 後 1949年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에 逮捕되었으나, 이미 反民特委 活動이 無力해진 뒤였기에 곧 起訴猶豫 處分을 받아 풀려났다. 審問過程에서 이기승은 自身이 中樞院 參議로 拔擢된 經緯를 全혀 알지 못한다고 陳述하고, 會議에는 强要에 依해 한次例 參席했으나 日本語 를 잘 하지 못해 앉아만 있다 왔다고 말했다.

事後 [ 編輯 ]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公開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包含되었고, 2007年 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95人 名單 에도 選定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朝鮮功勞者명감’親日 朝鮮人 3百53名 記錄 - 現役 國會議員 2002年 發表한 親日名單 日치 相當數”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6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