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중
(李槻重,
1819年
9月 25日
~ ?)은
朝鮮
後期의 王族 出身 文身이다.
안흥群
이숙의 鉏曾孫子이자, 이진태의 孫子, 李炳浩의 아들이다.
남연군
이구의 生家 쪽 서 四寸동생이 된다.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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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안흥群 이숙의 庶子였던 할아버지 이진태는
通德郞
을 지내고 事後
增
承政院
左承旨가 되었고,
1904年
4月 19日
內部協辦으로
追贈
되었다. 이진태의 庶子였던 아버지 李炳浩는 官職이 없었다가,
1867年
4月 12日
宗正卿
好調
參判
에
追贈
되었고, 1904年 4月 19日
內部
代身
에 追贈되었다. 이는 이규중의 出世로 인한 贈職이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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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武科에 及第,
1858年
(哲宗 9年)
1月 24日
목인배
(睦仁培)의 建議로
五衛將
에 任命되었다.
1863年
(哲宗 14)
4月 10日
兵曹의 建議로 忠壯衛將(忠壯衛將), 1866年(高宗 3) 8月 4日 忠翊衛將(忠翊衛將)李 되었다가 病으로 職任이 어렵다는 兵曹의 契에 依해 12月 6日 免職되었다. 바로 光陽縣監으로 任命되었지만
12月 19日
李朝가 契를 올려 身柄으로 職任을 맡기 어렵다 하여 罷黜되었다.
1867年
(高宗 4)
3月 23日
高宗
의 特命으로 嘉善大夫로 가자되었다.
4月 10日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883年
(高宗 20)
10月 30日
兵曹
가 契를 올려 그가 病으로 職任을 맡기 어렵다는 理由로 個差를 請하여 高宗이 允許하였다.
1886年
(高宗 23)
8月 17日
兵曹
의 建議로 護軍(護軍)에 任命되었다.
1888年
(高宗 25)
11月 25日
宗親府
에서
璿源譜略
을 受精할 때, 그를 別看役의 한 사람으로 推薦하여 高宗이 允許하였다.
1899年
(光武 2)
5月 21日
통진군수(通津郡守)로 赴任했다가
1902年
(光武 5)
3月 28日
嘉義大夫(嘉義)로 陞資하였다.
1900年
3月 7日에는 章陵 淸明節香에 待令하지 않았다 하여 議政府贊政 宮內府大臣署理 宮內府協辦
윤정구
의 彈劾을 받았다.
1902年
6月 24日
中樞院
衣冠에 任命되었지만
6月 25日
依願免職하였다.
1902年
7月 2日
議政府
參政
兼
度支部
代身 陸軍部長(議政府贊政兼度支部大臣 陸軍副將)
심상훈
(沈相薰)李 上疏를 올려 稅金 未納 關聯 官僚들을 指摘할 때, 그가 在職할 當時의
통진군
이 稅金 未納 最多라고 指摘되었다.
1904年
(光武 7年)
4月 14日
내장원경
에 任命되었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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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 할아버지 : 이진태
- 아버지 : 李炳浩
- 否認 :原州李氏(?年
7月 9日
死亡), 墓는 洋酒 용마봉(龍馬峰) 甲坐
- 否認 : 河東鄭氏(
1819年
1月 14日
~
1886年
6月 26日
), 정건묵(鄭健默)의 딸, 墓는 洋酒 용마봉 甲坐
- 첩 : 이름 未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