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箝制
(李謙濟,
日本式 이름:
福田謙治
후쿠다 겐지
,
1867年
11月 9日
~
1947年
7月 6日
)는 舊韓末 武官으로 開化派의 一員이었고,
日帝强占期
에는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를 지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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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의
서울 鍾路區
예지동 出身이다. 家庭에서 漢學을 修學하고
1885年
에
武科
에 及第하여 軍人이 되었다. 宣傳官을 거쳐
訓鍊院
等에서 服務하였으며,
1895年
에 參領 階級에 올라
東學農民運動
鎭壓에 參加하였다.
1896年
에
慶尙北道
蔚珍郡
軍需에 任命되고
1898年
에는
大韓帝國 中樞院
衣冠이 되었다.
1899年
을 基準으로 品階는 情3품이었다. 이 해에 日本 政府로부터 勳4等 서보장을 받고,
日本軍
訓鍊을 參觀하기도 하였다.
1900年
에 日本에 亡命하여 7年 동안 滯在하였다. 開化派 官僚와 軍人들이 加擔한
유길준
의 쿠데타 陰謀 事件 때문이었으며, 이箝制는
이진호
,
이범래
와 함께 軍部에서 이 事件에 連累되었다.
[1]
大韓帝國 高宗
이 廢位되고 日本의 影響力이 커진
1907年
에 亡命을 끝내고 歸國하여 官職에 復歸하였다.
韓日 倂合 條約
이 締結된 이듬해인
1911年
에는
李王職
事務官에 任命되었고,
1915年
부터 長期間 中樞院 參議를 지냈다.
쇼와 天皇
卽位 記念으로 내려진 쇼와大禮記念章을 받았고, 中樞院 參議로 在職 中이던
1935年
을 基準으로 種4位 勳3等에 西魏되어 있었다. 같은 해
朝鮮總督府
가 市政 25周年을 記念하여 表彰한 表彰者 名單에도 들어 있었다.
死亡 時期는 不明이나,
1945年
8月 15日
에 日本이
太平洋 戰爭
에서 敗亡하는 時點에 70代 後半의 나이로 中樞院 參議直路 在職 中이었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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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과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選定되었으며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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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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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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