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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춘 (187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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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춘 (李建春, 1873年 陰曆 1月 18日 ~ 1936年 陽曆 1月 11日 )은 大韓帝國 의 外交 官僚이며 日帝强占期 에는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를 지냈다.

生涯 [ 編輯 ]

韓國 最初의 近代的 官立 敎育機關인 育英公院 에서 受學한 뒤 1895年 法部 注射가 되면서 大韓帝國의 官吏로 勤務하기 始作했다. 1996年 外部의 飜譯官補로 任命되었고, 以後 外部에서 注射, 飜譯官, 參書官 等을 지내며 外務 擔當 官僚로 履歷을 쌓았다.

韓日 倂合 條約 이 締結된 1910年에는 議政府 外事局長과 內閣 外事局長을 거쳐서 日本이 大韓帝國 皇室의 財産을 國有化하기 위해 設置한 臨時帝室有給國有財産調査局의 委員 等을 歷任한 狀態였다. 韓日 倂合 直後 朝鮮總督府 가 設置한 中樞院에 贊意로 任命되어 參與했고, 1921年 中樞院 改編 後에도 3年間 參議를 지내 中樞院 勤務 期間은 約 14年에 이른다.

1914年 第1次 世界大戰 支援을 위해 鏡城郡人後援會에 4원을 寄附한 일이 있고, 1915年 韓日 倂合 5周年을 記念하는 行事인 朝鮮物産공진회가 열렸을 때는 20원을 出演했다. 1916年 日帝는 中樞院 幹部들을 動員하여 後에 朝鮮史編修會 로 發展한 半島社編纂事業을 벌였는데, 이건춘은 調査主任으로 參加했다. 第3代 朝鮮 總督 사이토 마코토 3·1 運動 以後 宥和策으로 主唱한 文化統治와 關聯하여 儒敎 系列에서 代動詞門會 라는 親日 團體가 組織되었을 때는 評社長을 맡았다.

日本 政府로부터 1909年 皇太子도한記念章, 1912年 韓國倂合記念章 을 받은 것을 始作으로 1920年 勳4等 서보장, 1928年 쇼와大禮記念章을 各各 授與받았다.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과 2008年 公開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選定되었다. 2007年 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親日反民族行爲者로 最終 選定하여 親日反民族行爲 195人 名單 에도 包含시켰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7年 12月). 〈이건춘〉 (PDF) . 《2007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735~742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