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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韶 (潮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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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韶 (劉?, ? - ?)는 中國 後漢 ~ 三國 時代 曺偉 의 官僚로, 公裁 (孔才)이며 광평군 한斷絃(邯鄲縣) 사람이다. 傳한 조경숙王 의 아들 陰性事後 의 11世孫이다. [1]

生涯 [ 編輯 ]

建安 (建安) 年間( 196年 ~ 220年 )에 計利(計吏)로 拔擢되었으며, 尙書令(尙書令) 순욱 (荀彧)의 麾下에 들어갔다. 太史令(太史令)李 元旦(元旦)에 日蝕 이 일어날 것을 常駐하였고, 이에 朝廷에서는 會議를 豫定대로 進行할 것인지에 對해 論議하였다. 流蘇는 《 禮記 (禮記)》의 先例를 들어 會議를 進行해야 한다고 主張하였고, 순욱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御史大夫(御史大夫) 侈麗 (?慮)는 流蘇를 招聘하였지만, 치려는 免職이 되어 流蘇를 拔擢하지 못하였다. 以後, 流蘇는 太子사인(太子舍人) · 祕書郞(秘書郞)에 任命되었다.

黃초 (黃初) 年間( 220年 ~ 226年 )에 상서랑(尙書郞) · 山기시랑(散騎侍郞)李 되었고, 《 五更 (五經)》을 整理하여 《黃람(皇覽)》을 編纂하였다. 造詣 (曹叡)가 卽位한 後 眞류태수(陳留太守)가 되었으며, 다시 祈禱위(騎都尉)로 轉任되어 《律令론(律令論)》을 完成하였다. 以後, 散騎常侍(散騎常侍)를 除授받았다.

以後, 吳나라 의 皇帝 孫權 (孫權)李 搖動(遼東)의 公孫淵 (公孫淵)에게 獅子를 派遣해 그에게 연왕(燕王)의 爵位를 提供하자, 朝廷에서는 公孫淵을 討伐할지의 與否로 會議를 열었다. 流蘇는 公孫淵의 아버지인 公孫康 (公孫康)의 功績을 言及하면서 그가 위나라를 背信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公孫淵은 孫權의 獅子를 處刑하고 그 목을 위나라로 보냈다.

流蘇는 部(賦)를 짓는 데 能通하여, 《조도부(趙都賦)》를 짓자, 造詣가 이를 稱讚했다. 造詣는 다른 富를 짓도록 했고, 流蘇는 造詣가 宮을 새로 짓고 奢侈로운 生活을 하는 것을 批判하는 內容을 담은 《虛度部(許都賦)》와 《落島富(洛都賦)》를 지었다.

그 뒤, 孫權이 軍事를 일으켜 합비(合肥)를 攻擊하자, 정동將軍(征東將軍) 萬總 (滿寵)은 吳君을 擊破하기 위해 休暇中인 兵士를 召集하면서 中央에 軍事의 增援을 要請하였다. 이에 流蘇는 造詣에게 于先 步兵 5000名과 起兵 3000名을 派遣하면서 兵力이 많은 것처럼 僞裝한 뒤, 敵의 讓渡(糧道)를 끊어버리면 吳君이 撤軍할 것이라고 自問하였고, 그렇게 하자 吳君은 退却하였다.

以後, 朝廷에서 産氣시랑(散騎侍?) 하후慧 (夏候惠)에게 좋은 人材를 推薦할 것을 命하자, 하후慧는 流蘇를 皇帝의 側近으로 推薦했다.

勁草 (景初) 年間( 237年 ~ 239年 )에 造詣가 百官들의 勤務評定(勤務評定)李 定해지지 않은 것을 念慮하자, 流蘇는 造詣의 調書를 받고 《軍官考課(郡官考課)》 72篇을 完成하였으며, 《설略(說略)》 1篇을 編纂하여 상주하였다. 또한 儀禮의 制定과 音樂을 利用하여 歲時 風俗을 고치기 위해 《惡論(樂論)》 14篇을 完成하여 常住하려 하였으나, 그 以前에 造詣는 붕어(崩御)하였다.

定試 (正始) 年間( 240年 ~ 249年 )에 學問을 硏究한 公的으로 管內後(關內侯)에 封해졌고, 숨을 거둔 以後 光祿勳(光祿勳)에 追贈되었으며, 아들 儒林 (劉琳)李 뒤를 이었다. 著書로는 앞서 紹介한 것 以外에 《法論(法論)》, 《인물지(人物志)》等 100餘 篇이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歐陽脩 外, 《 新唐書 》 卷71床 標題11床 宰相世界1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