遺棄 (明나라)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遺棄

遺棄 (劉基, 1311年 7月 1日 ~ 1375年 5月 16日 )는 中國 明나라의 軍事 戰略家, 政治家, 詩人이다. 者(字)가 백온(伯溫)이기에 유백온 (劉伯溫)으로 흔히 불린다. 諡號는 문성(文成). 浙江省 (浙江省) 溫州(溫州) 문성현(文成縣) 남전(南田) 出身이다. 그의 出身地 문성이 後에 靑田(靑田)이라 부르기 始作하여, 때때로 그를 乳淸展(劉靑田)으로 稱하기도 한다.

朱元璋 의 部下가 되어 明나라 를 建國하는 過程에 큰 功績을 올렸고, 建國 後에는 明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에 專念했다. 송렴 (宋濂)과 함께 當代 第一의 文筆家로도 알려져 있다. 著書로 『郁李子(郁離子)』 [1] 10卷, 『夫婦집(覆?集)』 24卷, 『事情집(寫情集)』 4卷, 『이미公집(犁眉公集)』 5卷을 남겼다. [2] [3] 그 밖에 命理學 (命理學) 敎科書인 『 적天壽 (滴天髓)』의 著者로 알려져 있다. [4] 社會 興亡을 豫言한 『秋배도(推背圖)』 를 쓴 것으로도 알려졌으나, 事實이 아니다.

中國에서는 諸葛亮과 比較하며 [5] 天才 軍事로 崇拜하고 있다. 明나라 初期를 舞臺로 하는 小說, 戱曲 等에 많이 登場한다. 小說이나 戱曲에서는 흔히 유백온으로 불리며 淸廉, 剛直한 性品으로 인해 사랑받는 便이다. 遺棄가 諸葛亮보다 더 뛰어난 策士였다고 하는 評價도 있다. 諸葛亮은 大業 達成에 失敗한 反面에 遺棄는 朱元璋을 도와 天下統一을 完成했기 때문이다.

生涯 [ 編輯 ]

1311年 浙江省 南殿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한 番 읽은 冊은 다 외웠고 文章을 잘 썼다. 特히 經學에 能通하고 다양한 學說에도 밝았다. 14살 때 『 春秋 』를 배웠는데 줄줄 읽을 뿐 아니라 冊 全部를 외워서 쓸 수도 있었다. [6]

元나라 末期 遺棄는 過去에 合格하여 西周(徐州) 考案(高安)의 현승(縣丞)으로 任命되었다. 그러나 剛直함이 지나쳐 上官과 摩擦 끝에 官職에서 물러났다. 얼마 後 다시 강절(江浙) 儒學部除去(儒學副提擧)에 赴任했으나, 亦是 彈劾을 받아 辭退한 後 故鄕에 隱遁해서 노도원(盧道元), 愚問貢糧(宇文公諒) 等 文人들과 어울려 西湖 (西湖) 遊覽으로 時間을 보냈다.

遺棄는 奇人이었다. 天下를 이야기할 때는 신중하고 嚴肅한 氣色이 얼굴에 드러났고, 兵法은 깊이를 재기 어려울 程度로 다양했고, 天文과 地理에 通達했으며, 未來를 正確하게 豫測하는 재주까지 갖추었다. 『名詞(明史)』 유기전(劉基傳)에는 “世上에는 그가 陰陽說을 利用하여 點 치는 技術이 能하다고 神奇하게 여기지만, 그 程度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點을 쳐서 앞날을 내다보는 게 아니라 '治國平天下'라는 뚜렷하고 遠大한 戰略을 품고 未來를 豫測했다는 뜻이다.

1356年 南京 을 陷落해 浙江省 東部를 掌握한 朱元璋은 遺棄, 長日(章溢), 섭침 (葉琛), 송렴 (宋濂) 等 "절동(浙東)의 네 先生"을 招請해 도움을 請했다. 이때 母親이 "예부터 亂世에는 君主를 따르지 않는다 했는데, 어찌 나가시려 하는가?"라고 挽留했으나, 遺棄는 끝내 朱元璋의 招聘에 應했고, 以後 朱元璋의 參謀로 活躍했다.

參謀로서 遺棄는 시무十팔冊(時務十八策)을 올려 朱元璋의 갈 길을 提示했다. 紅巾賊의 名目上 守令인 한림아(韓林兒) 에 對해서, "牧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모시면 어떻게 되겠나?"라고 하면서 制止했다. 또한 朱元璋이 湖南의 陳友諒(陳友諒) 을 除外하고 燒酒의 張士誠(張士誠) 을 討伐하려 했을 때, 먼저 陳友諒을 討伐해야 할 理由를 進言했다.

"陳友諒은 自身의 主君을 威脅하고 部下들을 脅迫하여 亂을 일으켰으니 名分이 弱합니다. 또한 우리보다 上流 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張士誠은 돈만 밝히는 人士여서 陳友諒이 도움을 要請해도 絶對 軍士를 보내 돕지 않을 것입니다. 陳友諒이 潰滅되면, 張士誠은 孤立되니 攻掠하기 쉽습니다. 두 사람을 攻略해서 南方을 안정시킨 後 北의 中原을 取하면 天下制霸는 時間問題입니다." [7]

이처럼 그가 밝은 길을 提示하자 朱元璋도 遺棄를 크게 信賴해 “우리의 張子房(張子房, 丈量) ”이라고 불렸다. [5] 後世의 史家들은 "陳友諒을 平定하고 장사性을 討伐한 것이 중원을 平定하는 重要한 基盤이 되었으며, 鍮器의 功이 가장 컸다."라고 評했다.

明나라가 建國된 後 遺棄는 誠意백(誠意伯)에 봉해지고, 太史令 御史中丞 이 되어, 週로 調整의 安定에 힘썼다. 그러나 紀綱을 바로잡기 위한 嚴格한 法 執行을 主張하고, 强하게 이를 밀어붙였기에 李船長 , 호유용 等 다른 臣下의 미움을 샀다. 그들은 朱元璋에게 유기가 祭壇 앞에서 殺人을 저지르는 不敬罪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을 中傷謀略하는 等 다양한 理由를 들어서 告發했다. 이에 遺棄는 아내가 世上을 떠난 것을 핑계로 官職을 버리고 歸鄕했다.

遺棄는 끝까지 공정함을 維持했다. 나중에 朱元璋의 請을 받아들여 官職에 復歸한 後 李船長이 罪를 追窮받았을 때, 遺棄는 오히려 李船長을 保護하려 애썼다. 李船長의 勢力을 牽制해 주길 바라는 朱元璋의 뜻과 달리, 어떻게든 權力鬪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1371年 左丞相 李船長이 辭任한 지 두 달 뒤에 弘文館 學士 遺棄 亦是 丞相에 오른 王光陽 (汪廣洋), 호유용 等의 壓迫을 느끼고 목숨을 救하기 위해 스스로 辭任해 故鄕으로 隱退했다. 떠나기 前 遺棄는 朱元璋에게 "署理와 눈이 녹으면 봄이 옵니다. 寬大한 政策을 펼쳐야 합니다."라고 進言했으나, 朱元璋은 그의 忠言을 듣지 않고 수많은 獄事를 일으켰다.

疑心 많던 朱元璋도 遺棄에 對한 中傷謀略에는 "그 사람이 天下를 代身 取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建國 以前에 그 機會는 얼마든지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無視했다. 또한 周邊에서 遺棄가 비밀스레 點을 친다고 誹謗할 때도 "遺棄가 말하는 것은 王都이고, 언제나 孔子 等 聖賢의 말씀으로 自身을 引導하는 데 어찌 점치는 技術이라 하느냐?"라면서 叱責했다. [8]

그러나 風水에 밝은 遺棄가 王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에 自身의 墓를 쓰려 한다는 等 遺棄에 對한 中傷謀略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遺棄는 朱元璋의 疑心을 避하기 위해 南京에 머무르다가 근심이 極에 達해 病에 걸렸다. 1375年 朱元璋은 그를 故鄕으로 돌려보냈으나, 遺棄는 病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 만에 世上을 떠났다. 遺棄가 死亡한 지 네 해 後, 호유용이 遺棄를 毒殺했다는 疑惑이 퍼졌다. [3] 鍮器의 長子인 留連(劉璉)李 호유용의 壓迫을 못 이기고 1377年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疑惑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호유용이 遺棄를 除去하려는 皇帝의 뜻을 알아채고 알아서 이 일을 저질렀다는 疑惑도 있다. 어쨌든 이 일로 契機로 '호유용의 陰謀'로 불리는 大肅淸이 始作됐다. 朱元璋은 開國功臣과 그 加率 數萬 名을 一擧에 죽이는 大規模 虐殺을 恣行했다. "德을 쌓아 刑罰을 줄여야 합니다. 聖君은 政治에서 嚴格함과 寬大함을 함께 품어야 함을 留念하십시오."라는 鍮器의 마지막 忠言도 소용없었다.

評價 [ 編輯 ]

遺棄는 여러 冊을 남겼고 文章으로도 有名했으나, 後世 사람들은 鍮器의 學問的 成果보다 그가 보여 준 軍事 戰略을 더 높이 評價했다. 明나라 末期의 文人 超굉(焦?)은 『玉堂叢語(玉堂叢語)』에서 "遺棄는 文人으로 非凡한 氣像이 있어 사람들 想像을 超越했다. 特히 天文과 兵法에서 核心을 꿰뚫는 洞察力이 뛰어났다."라고 稱讚했다. [6]

天下의 앞날은 내다보았으나 自身의 不幸한 죽음을 알지 못했던 鍮器의 삶에 對해 明나라 末期의 有名한 文人 長대(張岱)는 이렇게 말했다. "유백온은 큰 功을 세웠지만 그 報答은 크지 않았다. 그는 배운 재주로 出世했고, 그 재주로 인해 不幸해졌다. 平生 性品이 剛直하여 일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비록 試驗해서는 안 될 藥을 먹은 줄 알았지만, 적어도 君主는 自身의 眞心을 알아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亦是 自身의 悲慘한 最後는 막지 못했다. 萬若 神仙이 있었다면 어찌 그가 몰랐을까? 疑心이 많은 主君 앞에서 英雄이 世上을 속이는 말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9]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 遺棄 [劉基] (歷史 따라 배우는 中國文學史, 2010. 3. 24., 이수웅) .....元나라 말 鄕里에 隱居할 때 創作한 寓言體의 散文集 『郁李子(郁離子)』는 比較的 훌륭한 作品으로 評價받고 있다. 모두 18張 195節로 되었으며 寓言의 形式을 빌려서 哲學, 政治, 倫理, 道德 等의 見解를 展開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날카롭게 社會를 諷刺하고 있다. "욱(郁), 文野(文也), 리(離), 明夜(明也)"라고 한 題目에서 뜻을 斟酌할 수 있다. 迂言 또는 神話의 形式을 빌려 쓴 小品文(小品文)이다. 비록 主題는 政治를 諷刺하는 것이지만, 筆致가 簡潔하고 鮮明해 價値 있는 作品이다.
  2. 『이미公집』은 遺棄 事後, 그의 長男이 아버지가 남긴 草稿를 集成해서 펴낸 것이다.
  3. [네이버 知識百科] 遺棄 [劉基] (中國歷代人名事典, 2010. 1. 20., 임종욱, 金解明)
  4. [네이버 知識百科] 적天壽 [滴天髓] (力學事前, 2006. 2. 10., 노영준) .....中國 名臺(明代)의 誠意백(誠意伯)李 著述한 名利서이다. 四柱學의 解說書는 『沿海自評』과 『적天壽』에 크게 依據한다. 現在에도 이 두 冊을 原書로 하고 있다. 『沿海自評』은 그 大部分이 內激의 解說이고, 『적天壽』는 外隔意 보는 法에 關해서 詳細한 技術이 담겨 있다.
  5. [네이버 知識百科] 遺棄 [劉基, liu j?] (中國歷代人物 肖像畫) .....傾斜(經史), 天文(天文), 兵法(兵法)에 精通했고, 朱元璋을 補佐해 明나라 開國에 큰 貢獻을 했다. 後人들은 그를 제갈무후(諸葛武侯)와 比較했고, 朱元璋도 여러 次例 그를 ‘나의 者房(子房)’이라고 稱讚했다.
  6. 판수즈, 『官僚로 산다는 것』, 이화승 옮김(더봄, 2020), 12쪽.
  7. 판수즈(2020), 15쪽.
  8. 판수즈(2020), 13쪽.
  9. 판수즈(2020), 26쪽.

咀嚼 [ 編輯 ]

  • 百戰機略 - 兵法書.
  • 적天壽 - 오늘날에도 命理學의 敎科書로 쓰일정도로 有名한 命理學關聯 理論 書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