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興寺
(王興寺)는
百濟
扶餘
에 있던 寺刹로
577年
에 세워졌으나,
660年
백제 滅亡 後에 廢墟가 되어 現在는 節 터만 남아 있다. 2001年 2月 5日
大韓民國의 史跡
第427號
王興寺址
로 指定
[1]
되었다가, 以後 現在의 名稱으로 變更되었다.
創建
[
編輯
]
577年
에
百濟 威德王
이 自身의 죽은 王子를 위하여 절을 創建하였다. 《
三國史記
》에는
600年
봄 正月에
百濟 武王
이 創建하고, 30名이 僧侶가 되는 것을 許可하였다라고 記錄되어 있다.
[2]
그러나
2007年
10月 10日
王興寺址 터에서 發見된 舍利函 몸통에 漢字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3]
라는 글이 陰刻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實際 創建 羨道가 三國史記 記錄보다 23年 앞선 것으로 確認되었다.
消失
[
編輯
]
三國史記에
660年
11月 5日에
新羅
의
太宗 武烈王
이 "界彈(灘, 扶餘江)을 건너 王興寺潛性(王興寺岑城)을 攻擊하였고, 7日에 이겨 700名을 목베었다"라고 記錄되어 있다.
[4]
以後 절터는 廢墟가 되었다.
發掘 調査
[
編輯
]
1934年
忠南
扶餘郡
규암면 신리 一圓에서 旺興名 기와와 石造불 坐像, 土器조각 等이 發見되면서 처음으로 王興寺의 正確한 位置가 確認되었고,
[5]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는 백제文化圈 遺跡 整備事業의 一環으로
2000年
부터 附與 王興寺址(史跡 第427號)에 對한 發掘 調査를 實施하였다. 그리고 제5차 發掘調査를 마치면서,
2004年
6月 15日
"王興寺는 탑지와 金堂址가 南北 一直線上에 配置된 '1塔1金堂式'이며 이는 典型的인 백제式 嘉藍配置 構造인 것으로 確認됐다"라는 內容의 調査結果를 發表하였다.
[6]
또, 國立扶餘博物館은
2007年
10月 10日
王興寺址터에서,
百濟
時代 事理 莊嚴口를 發見하여 같은 해
10月 24日
一般에 公開했다.
[7]
出土 文化財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