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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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면
窺岩面
로마字 表記 Gyuam-myeon
行政
國家 大韓民國
地域 忠淸南道   扶餘郡
行政 區域 32個 , 193個
법정리 19個
官廳 所在地 규암면 階伯路 39(
지리
面積 46.58km 2
人文
人口 11,890名(2022年 2月)
世代 4,310世代
人口 密度 255.3名/km 2
地域 富豪
웹사이트 규암면 行政福祉센터

규암면 (窺岩面)은 大韓民國 忠淸南道 扶餘郡 에 屬한 이다.

歷史 [ 編輯 ]

日帝强占期前에는 천을面으로 불렸다

硅巖은 엿바위라는 뜻인데, 唐나라 蘇定方 이 扶餘를 侵攻할 때 바위 뒤에 숨어서 敵情을 엿보던 兵士가 泗沘城에 消息을 알렸다는 逸話가 있다. 硅巖은 白馬江 乙 사이에 두고 扶餘와 맞닿아 있는데 硅巖나루는 錦江을 건너 扶餘로 들어가는 重要한 交通路였다. 朝鮮 後期 五日場이 크게 蕃盛하면서 洪山莊 , 銀産腸 , 姜警長 저산팔읍 의 長詩 流通網이 硅巖나루를 통하여 內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루터 周邊에 五日場과 常設市場이 形成되어 扶餘의 物産이 集結되는 中心地 役割을 하였다. 硅巖나루는 忠淸道의 中心地 共注目 에 이르는 錦江 水路의 重要한 地點이었으며 江景을 거쳐 漢陽 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江 西쪽에는 내산 , 銀産 , 홍산 , 外産 , 保寧 , 靑陽 이 있으며 江의 東쪽에는 扶餘 , 論山 , 公州 가 자리하고 있다.

규암면의 中心을 이루고 있는 규암리는 高麗時代에 形成된 마을로 推定되며 晋州姜氏 淸州韓氏 가 오랫동안 居住해 왔다고 傳해진다. [1]

朝鮮 後期에 扶輿峴의 物流를 保管했던 해창과 홍산창이 규암리 自溫對 옆에 位置했었다고 傳해진다. 解放을 전후해서는 규암리의 腸이 扶餘邑內의 長과 比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 規模가 켰다고 한다. 硅巖 五日場은 3日과 8日에 열렸으며 쇠廛, 모시廛, 布木廛, 싸廛, 魚物廛이 主軸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때 群山 과 江景을 잇는 定期旅客船이 硅巖나루까지 延長 運行되었다고 하며, 滿潮 때에는 바다의 물이 거슬러 올라와서 사리 때에 새우젓 소금 을 실은 큰 商船이 潮水를 따라 거슬러 올라와 나루터에 碇泊한 채 穀食을 사가지고 내려갔다.

硅巖나루는 두 곳에 있었는데 自溫對 바로 밑에는 나룻배가 運行을 하였고, 그 下流에는 江景을 往來하는 돌배(數百 톤級의 動力船)과 商船이 使用하는 나루가 있었다. 日帝强占期에 新作路가 뚫리면서 버스와 車輛을 실어나르는 넓적배가 運行되었다. 또한 日帝强占期에는 나무배 數十 隻을 連結한 배다리를 놓아서 平素에는 사람과 牛馬가 通行을 했으며, 洪水로 流失된 後에는 나무다리 및 鐵線을 連結한 鐵배다리를 놓아 渡江을 하기도 했다.

1968年 백제大橋 가 竣工됨에 따라 硅巖나루는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五日場度 衰退하게 되었다. 現在 硅巖나루는 落花巖 - 구드래나루 - 自溫對 를 運行하는 遊覽船이 利用하고 있다.

行政 區域 [ 編輯 ]

朝鮮 後期에 규암면은 千乙面(淺乙面)이라고 불렸으며 靑山裏, 내리, 돌某오리, 檢福利, 창리, 걸山里, 반산리, 건지리, 나복리, 신대리, 용화리, 坪월리, 학곡리, 녹야리, 모동리,치리의 16個의 洞네가 屬하였다고 여지도서 (1757~1765)에 記錄되어 있다. 해창과 홍산창이 廢止된 後, 1914年 千乙面(淺乙面), 도성면(都城面), 송當面(松堂面)李 廢止되고 규암면과 규암리(옛 창리)가 公式 名稱으로 使用되게 되었다. 現在 법정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규암리
  • 금암리
  • 나복리
  • 내리
  • 노화리
  • 모리
  • 반산리
  • 扶餘두리
  • 석우리
  • 수목리
  • 신리
  • 신성리
  • 오수리
  • 外吏
  • 진변리
  • 함양리
  • 합송리
  • 합정리
  • 호암리

施設 [ 編輯 ]

규암리에는 面事務所와 警察署, 郵遞局, 농협이 자리잡고 있으며, 隣近의 外吏와 내리에 硅巖初等學校, 百濟中學校, 附與情報高等學校, 硅巖天主敎會, 硅巖監理敎會와 硅巖聖潔敎會가 所在하고 있다.

韓國戰爭을 避해 開城轉賣支廳이 1951年 규암면으로 移轉하여 왔다. 1978年 高麗人蔘窓 이 竣工되었고, 韓國人蔘公社의 紅蔘 製品인 正官庄이 生産되고 있다. 高麗人三槍은 5萬 6000平平의 敷地에 造成되어 있고, 人蔘 博物館이 開場되어 每年 1萬名이 訪問하고 있다.

호암리와 합정리 一帶에는 百濟歷史再現團地 가 造成되고 있다. 團地內에는 백제歷史文化館, 한국전통문화학교 가 들어서 있으며, 백제 王宮과 陵寺, 롯데 콘도미니엄이 建築되고 있다. [2]

文化遺産 [ 編輯 ]

釜山서원 은 규암면 진변리에 있는데, 朝鮮 中期 文人 이경여 가 落鄕 後 後學들을 기르기 위해 建立하였다. 高宗때 흥선大院君 의 書院 撤廢 政策에 依해 毁撤 되었으나 오늘날 復設되어 現在 白江 이경여 를 配享하고 있다.

규암리의 사람들은 自溫對를 할아버지 堂山, 水北亭 西쪽 맞은 便에 있는 봉구재를 할머니 堂山이라 부르는데, 해마다 陰曆 正月 初사흘 날에는 水北亭에서 自溫堂山祭 (할아버지 堂山祭)와 鳳九齋에서 할머니 堂山祭를 지낸다. 高麗 末부터 始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硅巖나루 옆의 큰 바위인 字溫帶는 百濟時代 王이 王興寺 에 行次할 때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고 했다는 傳說이 있으며, 巖壁에는 尤庵 송시열 先生이 自溫臺(自溫對)라고 쓴 親筆이 새겨져 있다.

水北亭 은 朝鮮朝 광해군 때 楊州牧使를 지낸 수북 金興國 (1557~1623)先生이 後學을 養成하기 위해 建立하였다. 따스한 봄날 周圍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扶餘八景中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호암리의 天井對 에는 백제의 首相인 佐平을 選出했다는 傳說이 傳해지고 있다.

百濟歷史再現團地 가 규암면 합정리에 建立되었다. 百濟歷史再現團地에는 백제歷史文化館과 백제王宮이 자리잡고 있다.

參考資料 [ 編輯 ]

'규암리 歷史民俗地 - 엿바위 自溫堂山 山神祭, 單山祭, 거리祭', 강성복저, 2005年 扶餘 文化院 發刊

各州 [ 編輯 ]

  1. 扶餘郡地 1卷(附與의 지리), 2003, 388쪽
  2. 前進式, 'S라인' 드러낸 百濟團地 롯데콘도 忠南道정신문

外部 링크 [ 編輯 ]